천년고찰(千年古刹) 나주 중봉산 죽림사(竹林寺)를 찾아서..
오전에 결혼식에 참석하였다가 오후에 집으로 오는 길에 나주 남평에 있는 천년고찰 죽림사를 찾았다.
○ 탐방일 : 2016년 9월 24일
○ 소재지 : 전남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 산1번지
○ 죽림사 소대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로, 중봉산(中峯山)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죽림사 사적에 의하면 백제 비유왕 14년(440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종죽암(宗竹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되어 있으며,
또 다른 기록인 죽림사기(竹林寺記)에도 창건연대가 440년이라 적혀 있다.
1983년 극락보전을 보수할 때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 16과(顆)와 청동불두(靑銅佛頭)가 발견되어 죽림사는 적어도
통일신라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창건 시의 규모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7전(殿), 3당(堂), 2실(室), 3요(寮), 6암(庵), 1사(寺)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극락보전(極樂寶殿)과 영산전(靈山殿)·삼성전(三聖殿) 등의 전각과 염화실(拈花室)·청향각(淸香閣)·회심당 등의 요사,
수각·부도(5기)·대형맷돌·석조여래좌상 등이 있다.
청향각에는 보물 제1279호(1998년6월29일)로 지정된‘죽림사 세존괘불탱(世尊掛佛幀)’이 있으며,
죽림사 극락보전은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92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보전은 죽림사의 주요 불전으로 정면과·측면 각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초석은 덤벙주초, 공포는 주심포식이고, 내부는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으며 불단 위로는 보개를 얹었다.
영산전(靈山殿)은 정면 3칸·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삼성전(三聖殿) 역시 영산전과 같은 규모로 내부에 산신탱(山神幀)과 독성탱(獨聖幀), 칠성탱(七星幀)이 걸려 있다.
영산전 앞뜰에는 전체 높이 141cm의 석조여래좌상이 놓여 있으며, 사찰 입구 축대 앞에 청계당대사 부도와 월하당대사 부도 등
18세기 중엽에 조성된 부도 5개가 일렬로 놓여 있다.
아직 단청을 하지 않은 일주문..
잠시 도로를 따라 오르면 천년고찰 대한불교조계종 죽림사 표지석이 있고..
그 옆으로 청계당대사와 월하당대사 부도 등 18세기 중엽에 조성된 부도 5개가 일렬로 놓여 있다.
청계당대사(淸溪堂大師)부도는 좌측의 첫 번째 것인데 높이는 120cm이다.
자연석을 약간 다듬은 하대에 석종형의 탑신과 그 위로 방형의 옥개석을 올려 놓았다.
상륜은 매우 특이한 형태로 마치 죽순모양인데 중간에 1조의 홈을 돌려 노반의 형태를 갖추었다. 탑신 중앙에 당호가 음각되어
있으며, 그 옆에 “건융경신4월일(乾隆庚申四月日)”이라는 명문이 있어 1740년(영조16)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오른쪽에 위치하는 부도는 원형의 복연석 대좌에 석종형 탑신과 8각의 옥개석을 갖추었으나 마모가 심하다.
정상에는 별석의 상륜인 보주가 올려져 있고, 탑신 중앙의 당호 명문은 마모가 심하여 이름을 판독할 수 없다.
그 옆에 “건융정3월(乾隆丁三月)”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1747년(영조 23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높이는 125cm이다.
월하당대사(月河堂)부도는 좌측에서 두번째로 높이 1m, 폭 70cm로 기단은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사용하였고,
8각형의 탑신과 팔각지붕형의 옥개석이나 본래의 모습은 다른 부도와 마찬가지로 훼손되었다.
이밖에 당호를 알 수 없고 훼손된 소형의 부도 2기가 더 있다..
도로를 따라 상사화가 아름답게 피어있다..
극학교를 건너면 사찰의 영역이다..
계단을 올라서면 청향각과 요사가 자리하고 있다.
청향각에는 보물 제1279호(1998년6월29일)로 지정된 ‘죽림사 세존괘불탱(世尊掛佛幀)’이 있다.
이것은 1622년(광해군14년)에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 괘불로서는 가장 빠른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예와는 달리 독존인 여래좌상으로 비단 채색화이다.
색조는 주로 홍색을 띠고 있으며, 은행나무로 만든 함에 들어있으며 함의 전면에 옻칠이 두껍게 발라져있다.
괘불함은 길이 298cm, 너비 22.5cm, 두께 22.5cm이며 무쇠로 된 장석의 형태 및 옻칠, 은행목의 결구법으로 보아
괘불과 같은 시기로 보고 있다.
또한 괘불을 운반할 때 사용되는 도구들도 남아 있다. 특히 함 속에 괘불 복장낭(腹藏囊) 한 개가 들어있었다.
복장낭은 “탱화 복장낭”이라고도 하는데, 오곡과 약재가 행엽형(杏葉形) 주머니 안에 들어 있어 습기와 미생물의 오염을 막는
역할을 하므로 방습 · 방충효과를 위해 탱화(괘불) 제작시에 필수적으로 만들어져 왔다.
화기에 의하면 이것은 혜은(慧銀)의 공덕으로 이루어졌고, 신수(愼受)가 증명하였으며 수인(首印). 신헌(信軒)이 그렸다.
그림의 구도는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가님이 항마촉지인을 한 채 광배를 배경으로 오색구름에 휩싸여 있다.
여래의 법의는 통견으로 우측 팔에서 맨 살이 노출되어 있으며 붉은 색 주조에 녹색이 섞이고 화문(花紋)은 밝고 맑다.
특히 광배의 보상화 무늬는 금색으로 화사하고 찬란하다. 얼굴은 둥글넓적한 모양으로 긴 눈썹과 약간 치켜 오른 눈이 인상적
이며 입은 작은 편이나 콧수염과 턱수염이 있어 위엄을 보인다. 귀는 넓고 장대하며, 짧은 목에는 삼도가 희미하다.
머리는 뾰족하게 솟은 날카로운 육계가 특이하며 나발 사이로 빚어 나온 계주는 마치 반달모양 같다.
어깨는 당당하며 꽃무늬가 화려한 적색가사를 두르고 있다. 가사 모서리는 국화문을 촘촘이 배치하였다.
몸집은 단아하고 비례가 알맞은 고아한 작품이다.
다만 몸의 비례에 비해 촉지인의 오른 손이 너무 길게 내려와 전체적으로 어색해 보인다.
구름의 표현은 상단의 경우 색동 띠를 여러개 이어놓아 마치 무지개를 보는 듯하며 하단에는 국화와 모란을 인화문처럼 그렸다.
괘불의 크기는 전체가 263.5×500cm이고, 화면이 243.3×435cm이다.
하단에 불화기가 있는데 죽림사 부분을 지우고 옆줄에 다시 쓴 것으로 보아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 아닌가 한다.
天啓二年壬戌十一月十七日竹林寺 崔中掛佛世尊幀 基布大施主高任吉兩主 供養大施主□知高龍兩主 饌物大施主至善比丘
施主勝彦比丘 韓夢義兩主 鄭仁□□□ 圭?□□□ 證明愼受 士畵首印 信軒 別座一元比丘 玉□比丘 敬連比丘 大功德主慧恩比丘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92호, 죽림사 극락보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전후퇴이며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비바람을 막기 위해 풍판(風板)이 설치하였다.
2.2m 높이의 막돌 쌓기 기단위에 건축하였는데 초석은 덤벙주초로 2고주
5량이다.
공포는 외1출목의 주심포식으로 내부에 출목이 없고, 기둥 위의 공포 사이에 소루로
꾸며진 커다란 화반이 있다.
벽면의 단청은 조선후기 단청 중에서도 묘사력이 좋은 편이나 1983년 수리 시에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
문은 모두 띠살창인데 앞쪽과 오른쪽에 문이 있고, 또 뒤쪽에도 문이 있는 것이 독특하다.
전체적으로 아담하고 짜임새가 간결한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은 것이다..
개구부는 정면을 보고 좌우 출입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면과 우측에 출입문이 있고, 후문에도 출입문이 있는 것이 독특하다..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두툼한 배흘림을 약하게 표현하고 있다..
내부는 기둥없이 통칸으로 처리하여 확 터진 듯한 느낌을 준다..
아미타불을 모신 곳이기 때문에 불단이 옆쪽에 자리잡고 있다.
불상도 왼쪽에 앉아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건물의 구조가 마치 부석사의 무량수전처럼 앞면이 길다..
후불탱화는 길이 264cm , 너비 160cm이며, 재질은 삼베이고 제작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8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그림은 석가모니의 영산회상을 그린 것으로 중앙에 석사여래를 그리고 보살과 제자, 신중들이 둘러 서있는 모습이다.
누런 삼베에
녹색과 홍색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림의 상하좌우의 끝에 사천왕을 배치하고 하단부터 6대보살과 10대 제자
그리고 천중을 배열하였는데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라가면서 인물의 크기가 현저하게 작아진다.
천중들도 거의 좌우대칭으로 검은 하늘을 제외하고는 구름에 둘러싸여 있다. 석가여래의 항마촉지의 수인, 정상계주와 육계,
길상좌를 한 결가부좌 등이 특징이다.
화기에 탱화의 조성에는 학헌(學憲)과 각행(覺行) 스님이 증명하였고, 당시의 주지는 신한(信閑)이었다.
그림을 그린 스님은 필영(弼英). 이한(怡漢). 적조(寂照) 등 6인이 참가하였고, 시주자는 부분적으로 남아 자세히 알 수 없다..
천정은 층단을 둔 우물천장으로 보개가 있다..
극락보전 옆의 영산전(靈山殿)..
정면 3칸·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으로 좌측에 미륵보살(彌勒菩薩), 우측에 제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을 봉안하고 있다..
석가모니불 좌우에 있는 십육나한은 제1 빈도라발라타사, 제2 가낙가벌차, 제3 가낙가발리타사, 제4 소빈타, 제5 낙거라,
제6 발타라, 제7 가리가, 제8 벌도라불다라, 제9 술박가, 제10 반탁가, 제11 라호라, 제12 나가서나, 제13 인게타,
제14 벌나파사, 제15 아씨다, 그리고 제16 주다반탁가존자로 구성되어 있다..
사찰 내 나한전, 응진전, 혹은 영산전 등에 봉안되는데 중앙의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각 8인씩 배치되며,
그 뒤쪽으로 제석천과 신장, 명부사자 등의 호법신이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삼성전((三聖殿) 역시 영산전과 같은 규모로 내부에 산신탱(山神幀)과 독성탱(獨聖幀), 칠성탱(七星幀)이 걸려 있다.
삼성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전통신앙인 삼신신앙(三神信仰)과의 습합현상을 살필 수 있게 된다.
때로는 고려 말의 삼대성승(三大聖僧)인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의 삼성과 칠성·독성 등을 봉안하기도 한다..
칠성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본래 중국의 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생긴 신앙이다.
대개는 손에 금륜을 든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주존으로 하여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에 협시로 둔다..
독성은 천태산(天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독수성(獨修聖)이라 불린 나반존자(那畔尊子)를 일컫는다.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서 성인의 위치에 올라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수독성탱(修獨聖幀)·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는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모신다.
그림은 천태산과 소나무·구름 등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錫杖),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 위에 정좌한 모습이다.
때로는 독성 외에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동자와 문신(文臣)이 양쪽 협시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나타난다.
인격신으로서의 산신은 나이 든 도사의 모습이고, 호랑이는 대부분 산에 위치한 사찰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각 앞 뜰에는 전체 높이 141cm의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놓여 있다.
본래 칠성각 내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10여년 전 현재의 위치인 영산전 앞뜰로 옮겨졌고 근래에 조그만 각을 지었다.
광배가 없이 불신만이 있는 이 석불은 하대인 복연석이 없고 중석도 탑신으로 보여 원래 불상대좌인 중석인지 의문이다..
석불의 모습은 소발의 머리에 육계는 떨어져 나가고 시멘트로 보수하여 머리 위에 얹어 놓았다.
상호는 원만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백호가 없고 예리한 눈썹이 인상적이다.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코는 역시 시멘트로 보수하였으며 귀는 길게 늘어뜨려 어께위에서 알맞게 멎었고
삼도 부분은 두상이 떨어져 나간 것을 시멘트로 접착하였기 때문에 표현유무를 알 수 없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였으나 왼쪽 손목이 어색하게 구부러져 있다.
가부좌한 다리는 왼 발이 속으로 들어가고 오른 발이 위로 올라오는 길상좌를 취하였는데,
무릎을 덮은 옷 주름이 평행단상으로 형식화되었다.
대좌는 하대석과 복연석이 없고 맨 땅위에 중석과 앙연석이 각각 1석으로 되어 있으며,
중석은 방형으로 각 면에 우주를 모각하였는데 마치 탑신으로 보인다.
조성연대는 11~12세기경으로 추정되며, 전체 높이 141cm, 대좌고 53cm, 대좌폭(앙연) 85cm, 대좌 중석폭 39cm,
좌상고 88cm, 두고 29cm, 안고 18cm, 안폭 16.5cm, 어께폭 47cm, 무릎폭 65cm, 무릎고 21cm이다..
해탈(解脫)의 기쁨을 주는 죽림사 보리수 이야기..
마음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찾아가 희망의 말을 새겨 놓을 수 있는 보리수!
열매로 염주를 만들어 깊은 명상으로 해탈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보리수!
그런 행복한 나무가 죽림사에서 세상의 온갖 고뇌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고 있습니다.
죽림사 보리수는 여생을 평안하게 보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지혜의 나무입니다.
죽림사 보리수에서 세상사를 내려놓고 정성스럽게 합장(合掌)해 보십시오.
살아있는 순간이 얼마나 고귀하고,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커다란 맷돌..
극락보전 옆의 염화실(拈花室)..
염화미소(拈花微笑)에서 온 말로 염화미소는 불교의 대표적인 화두 가운데 하나이고 삼처전심(三處傳心)의 하나이다.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라고도 한다.
염화실이란 절에서 참선을 지도하시는 조실스님이나 방장스님이 거처하시는 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염화미소는 이 참선의 기원이 되는 고사이기 때문에 그 방을 염화실로 부르는 것이다.
선종에서 선(禪)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전하는 이야기로서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기록되어 있다.
영산(靈山)에서 범왕(梵王)이 석가에게 설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으나, 가섭(迦葉)만은 참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이에 석가는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한 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 번뇌와 미망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 생멸계를 떠난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를 깨닫는 마음) 등의
불교 진리를 전해 주었다.
즉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선 수행의 근거와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화두이다..
대웅전 맞은 편의 왕생루에는 이 죽림사의 보물인 괘불탱(掛佛幀)을 축소 복사한 탱화가 걸려 있었다..
왕생루 맞은편에 아미타불을 모신 이 절의 중심인 극락보전이 높다랗게 서있고, 왼쪽엔 약간 낮은 곳에 염화실(拈花室)이 있다.
오른쪽엔 약간 높은 곳에 영산전(靈山殿)이 있고, 오른쪽으로 나란하지만 꺾어 앉힌 삼성전(三聖殿)이 있다.
영산전과 삼성전 앞마당 잔디밭에는 석불좌상이 있다.
죽림사 가는 길에 만난 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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