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풍경, 호남의 3대 산성 담양 금성산성 산성산 일주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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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산행2019

깊어가는 가을 풍경, 호남의 3대 산성 담양 금성산성 산성산 일주 산행..

by 정산 돌구름 2019. 10. 28.

 

깊어가는 가을 풍경, 호남의 3대 산성 담양 금성산성 산성산 일주 산행..

 


10월의 마지막 일요일, 맑은 날씨에 집을 나서 담양 금성면 담양온천 입구에 도착한다.

9시30분, 산행을 시작하여 오방길을 따라 올라 금성산성 남문인 보국문을 지나 충용문에서 성벽을 따라 노적봉에 올라선다.

다시 성벽을 따라 철마봉을 지나 서문, 북문에 올라 점심식사를 한다.

북문에서 금성산성 정상인 산성산에 올랐다가 운대봉을 거쳐 다시 시루봉에 올라선다.

시루봉에서 되돌아내려와 동자암과 보국문을 거쳐 담양온천으로 원점회귀하여 산행을 마무리한다.

가을이 물들어가는 맑은 날씨에 오랜만에 다시 찾은 금성산성, 부부가 함께 한 멋진 가을 산행길이었다. 

○ 산행일자 : 2019년 10월 27일 (일)

기상상황 : 맑음(구름 한점없이 맑은 날씨였지만 조망은 별로. 10~16℃)

○ 산행인원 : 부부

○ 산행코스 : 담양온천~남문~노적봉~철마봉~서문~북문~산성산~운대봉~동문~시루봉~남문~온천(전남 담양, 전북 순창)

○ 산행거리 및 소요시간 : 10.01Km(트랭글GPS), 5시간5분 소요

  담양온천(09:30)~오방길능선 삼거리 (09:50)~주능선(10:00~05)~보국문(10:15~20)~충용문(10:25)~노적봉(10:35~40)~철마봉

  (11:00~05)~서문(11:30)~북문(12:00~35)~구장군폭포갈림길(12:45)~산성산(12:50~55)~운대봉(13:05~10)~동문삼거리(13:20)

  ~시루봉(13:30~35)~내성동문(13:50)~동자암(13:55)~보국문(14:05)~갈림길(14:15)~임도(14:30)~담양온천(14:35)

○ 주요봉우리 : 산성산 연대봉(603m), 운대봉(593m), 시루봉(526m), 철마봉(484m)

산행지 소개

  전남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용면 산성리, 전북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경계에 있는 산성산(山城山 603m)은 깎아지른 바위벼랑이

  이어진 산세가 서남으로 뻗어 각 봉우리 마다 웅장한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은 담양호가 보인다.

  일명 금성산(金城山)이라고도 불리며, 호남정맥 용추봉에서 남쪽으로 향한 산성산 능선이 광덕산을 거쳐 오르면서 평탄면을

  이루는 산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성산에 고성(古城)이 있는데, 둘레는 1,804자이며, 안에는 시내가 1곳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명은 금성산의 다른 명칭으로 산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팔도지도』에 순창읍치의 남서쪽에 금성산성이 지명과 함께 여장이 산 능선부에 비교적 상세히 그려져 있다.

  『고려사절요』에 “1380(고려 우왕 6)에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성산성은 시루봉을 정점으로 남문~노적봉~철마봉~서문, 동문~운대봉~연대봉~북문~서문으로 이어지는 성벽이다.

  1610년 개축되고, 1622년 내성에 대장청(大將廳)을 건립케 했다.

  1653년 내성을 수축하였다. 1894년 동학군과 관군의 전투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한국전쟁 때도 격전장이 되었다.

  연대봉, 운대봉, 시루봉 등 사방 계곡 능선을 이용하여 축조된 이 산성은 포곡식산성으로 성벽에서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게다가 부근에는 이보다 높은 산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산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널찍한 분지 형태로 되어 있어 이곳에 성을 쌓아

  두면 나는 새가 아닌 이상 바깥에서는 결코 성안을 볼 수 없는 지형으로 된 천혜 요새지이다. 

  또한 성안에는 샘이 풍부하여 충분한 식량만 쌓아 놓는다면 매우 오랜 시간동안 성을 지킬 수 있는 훌륭한 조건까지 갖추었다.

  과거 조선은 지역을 지키기 위해 평지에는 읍성, 배후 산에는 산성을 동시에 축조했으며, 평시에는 읍성에서 관리와 백성들이

  생활을 하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산성으로 옮겨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단단히 지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담양에는 읍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금성산성은 평시 읍성의 역할도 상당부분 맡았으리라 짐작된다.

  현재 금성산성에는 관아와 민가터가 많이 남아있어 옛날 이곳에 많은 병사들이 주둔하여 주변을 경계했다.

  최초의 축조시기는 길게는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하지만 실제 역사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사절요이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에 왜구에 대비하며 개축했는데 '금성(金城)'이라 했다 한다.

  비록 성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보다 이전인 고려 고종 43년(1256년)에는 몽고의 차라대군이 담양에 주둔했다는 기록도 있다.

  금성산성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태종 때로 1410년 전라, 경상도의 12개 산성이 수축된 기록에 나온다고 하며,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추월산에 석벽이 사방을 둘러 둘레가 9,018척, 13천(샘)이 있고, 연동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가까워 오자 조선은 국가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입보농성의 최적지인 산성의 보수를 서두르게 된다.

  이때 금성산성 역시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했으며 계속적인 보강이 이루어져 이때부터 장성의 입암산성, 무주의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불리게 된다.

  금성산성은 그 훌륭한 지정학적 위치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전화를 겪어 왔다.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에 맞서는 항몽의 전적지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의 거점으로 노령을 넘어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정유재란 때의 전투는 피로 피를 씻는 치열한 격전으로 전투가 끝난 후 외남문인 보국문 오른편

  깊은 골짜기로 전사자를 치우고 보니 시신이 무려 2,000여구에 달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골짜기의 이름을 이천골(二千骨)이라 부른다고 한다.

  개화기에도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학군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진압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전봉준이 잡혀 죽음은 이후 이곳도

  결국 관군에게 점령되어 성내의 전각과 모든 시설들이 불에 타버리는 참화를 겪게 된다.

  금성산성은 돌로 쌓여진 석성이며, 내성과 외성의 2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길이는 7,345m로 외성이 6,486m, 내성이 859m이다.

  연면적은 1,197,478㎡(362,237평), 내성의 면적은 54,474㎡(16,478평)이다.

  성의 전체 크기를 판가름하는 외성은 연대봉과 철마봉, 시루봉 등의 바위로 된 산봉우리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데, 대부분의

  구간이 아찔한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방어력을 한껏 높이는 한국의 산성답게 가끔씩 바위 벼랑을 그대로 자연성벽으로 이용한 곳들도 있다.

  암릉으로 매우 험준한 곳이 많아 지정된 문이 아닌 곳으로는 통행이 어려우며 심지어 병사 한명 없이도 능히 지켜지는 구간이

  전체 외성의 약 30%에 이른다고 하니 방어요새로서 산성의 가치는 이루 말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특히, 산 아래 담양댐이 건설되며 서쪽 성벽의 바위벼랑 아래로는 인공 호수의 깊고 푸른 물결마저 넘실거리게 되어서 풍경의

  아스라함을 한껏 더한다.

  1991년 사적 제35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지금의 모습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