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백마강과 낙화암, 그리고 고란사..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발길 머무는 곳에

백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백마강과 낙화암, 그리고 고란사..

by 정산 돌구름 2019. 6. 26.

백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백마강과 낙화암, 그리고 고란사..


 

2019년 6월 25일(화), 충북과 충남으로 떠난 5박6일 캠핑여행 마지막날..

먼저 연꽃으로 유명한 부여 궁남지를 한바퀴 돌아나와 구드래나루로 향한다.

구드래나루에서 부소산성 사자루에 올랐다가 낙화암으로 내려선다.

낙화암과 낙화정을 보고 고란사 경내로 들어선다.

고란사 약수 한모금을 마시고 고란사 황포돛배 선착장에 도착하지만 아직은 상당한 시간이 남아있다.

11시30분, 황포돛배를 타고 구드레나루로 돌아와 여행을 마무리한다.

5박6일의 짧지 않은 여행길, 그러나 여행은 항상 여운을 남기고 또 다른 여행을 기다린다.

 

사적 제5호인 부소산성(扶蘇山城)..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 도읍지였다.

당시에는 사비성(沘城)이라 불렀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년)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년)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년)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성은 금강 남안에 있는 부소산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성내에는 사비루()·영일루()·반월루()·고란사()·낙화암()과 사방의 문지(), 그리고 군창지

() 등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1978년 금강상수도사업공사로 인하여 성벽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성벽 내부는 잡석으로 적심석()을 넣었음이 확인되었고,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목책지()와 수혈식()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을 위한 기초조사에서 4층의 토층단면이 확인되었다.

1982년부터 부소산성 일대를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라는 명문이 출토되었다.

 

사자후(泗泚樓)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1824년(순조24년)에 세운 임천면()의 관아 정문이던 것을 1919년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월대

()에 옮겨짓고 이름을 개산루()에서 사자루로 바꾸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문루 건물로 2층에는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정면에 한말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泗泚樓)’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백마강쪽으로 해강 김규진()이

쓴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 금동석가여래입상(보물 제196호)이 발견되었다.

 

낙화암(落花岩)은 백마강변의 부소산에 있는 바위로 충남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자 궁녀 3,000명이 백마강 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고 한다.

바위 위에는 백화정()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후궁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후궁이 궁녀로 와전되었고 이후 궁녀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이 바위와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용담()이 많은 영주()였는데 여러 차례 신라의 여러 고을을 쳐서 천하에 그 성세()를

높인 뒤로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성 남쪽의 망해정()에서 궁녀들을 데리고 가무주연()의 향락을 일삼았다.

좌평 성충()은 이를 근심하고 극력 간()하였으나, 왕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 그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마음이 아파서 죽고 말았다.

이러할 때 일찍이 백제의 침략을 받아온 신라는 무열왕 및 김유신() 등의 영주와 명신()이 나타나서 나라의 힘을 크게

길러 복수를 하고자 당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은 4천의 적은 군사로써 황산()벌에서 신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왕성()에 육박해오자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해질 때를 기다려 왕자 효()를 데리고 웅진성()으로 달아나서 싸웠으나 성문은 부서져 열리고 말았다.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죽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대왕포()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고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년(현종 19년)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년)과 1797년(정조 21년) 각각 중수하였다.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다.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사비성() 등이 있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