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의 산실, 제천 배론성지(舟論聖地)
2018년 8월 8일, 치악산 구룡야영장에서 월악산 송계자동차 야영장으로 가면서 찾은 곳은 배론성지이다.
충북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구학리 623)에 위치한 배론성지(舟論聖地)..
충북도 기념물 제118호(2001년3월2일)로 지정되었으며, 재단법인 천주교원주교구에서 관리한다.
이곳은 한국초대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 나간 교우촌이다.
지리적으로 치악산 동남기슭에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이 둘러싼 험준한 산악지대로 외부와 차단된 산골이면서도
산길로 10리만 가면 박달재에 오르고, 이어 충주, 청주를 거쳐 전라도와 통하고, 제천에서 죽령을 넘으면 경상도와 통하며,
원주를 거쳐서 강원도와도 통할 수 있는 교통의 길목이다.
배론이란 지명은 이 마을의 산골짜기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이기 때문에 유래한 것으로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徘論)이라고도 한다.
조선후기 천주교도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이 머무르며 백서(帛書)를 썼던 토굴과 최양업(崔良業 1821∼1861) 신부의 묘가
있으며,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어 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
정약종(丁若鍾)·주문모(周文謨) 등이 처형되었다. 이때 많은 천주교도가 구학리 배론 산골에 숨어 살았다.
황사영도 배론에 숨어 있었는데, 그는 조선교회의 박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 방안을 호소하는
백서를 써서 황심(黃沁)·옥천희(玉千禧)에게 중국에 가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따라가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발각되었다. 이 배론의 토굴에서 쓴 밀서를 황사영백서라고 한다.
1856년(철종 7년)에는 프랑스 신부들이 이곳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를 세우고 성직자를 양성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신부들이 처형당하고 신학교가 폐쇄되었다.
조선 천주교사상 두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도 이곳에서 1861년 순교하였는데 뒷산에 그의 묘가 있다.
배론은 전국 각지의 성지순례 신자들이 끊임없이 찾는 한국 천주교의 성지이다.
배론은 조선시대의 행정지명으로 제천현 근우면 팔송정리 도점촌으로 옹기를 굽던 곳이다.
배론에 천주교신자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791년에(정조15년) 일어난 신해박해 이후로 추정되는데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숨어든 교우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당시 박해상황과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을 요청하는 백서를 토굴 속에 숨어 집필한 지역이며,
1855년(철종6년)에서 1866년(고종3년)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론신학교가 소재했던 지역이다.
또한, 1861년 별세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김대건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분묘가 소재한 지역인 동시에
1866년 병인박해의 순교자인 남종삼의 생가가 있는 지역(산넘어 묘재)이다.
배론성지는 1911년 경성교구에 속해 있다가 1968년 원주교구에 속하였으며 1970년대 들어 개발되어 오늘에 이른다.
'길따라 트레킹 > 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양기행] 명승 제45호, 단양팔경 석문(石門) (0) | 2018.08.14 |
---|---|
[단양기행] 강에 솟아있는 세 가지의 봉우리, 단양팔경 도담삼봉(嶋潭三峰) (0) | 2018.08.14 |
[원주기행] 아홉 마리 용의 전설이 숨어있는 치악산 구룡사(龜龍寺) (0) | 2018.08.14 |
[청양기행] 두 개의 대웅전을 가진 칠갑산 장곡사(長谷寺).. (0) | 2018.08.14 |
[진주기행] 김시민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와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 (0) | 2018.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