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와 촉석정 충단비(矗石旌忠檀碑)
2018년 4월 20일, 진주성에서..
<김시민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김시민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1972년2월12일)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619년(광해군 11년) 7월에 세웠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석비의 형태로 현재 진주성 내에 단층 맞배지붕의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다.
받침대 위에 비신을 세웠고, 전체 높이는 277㎝, 너비는 99㎝이다.
당시 김시민은 진주목사로서 판관(判官) 성수경(成守慶),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등과 함께 주도면밀한 작전을 펼쳐 왜적을
격퇴하였다. 비문에는 1,000명도 되지 않은 병력으로 10만 군대를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 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적은 군사를 이끌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死守)함으로써
왜적의 호남 진출을 봉쇄하여 우리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 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성균관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성여신(成汝信)의 문집인 『부사집(浮査集)』에는 ‘진주목사김공전성각적비명(晋州牧使金公全城却敵碑銘)’으로 되어 있어서
‘진주전성각적비(晋州全城却敵碑)’라고도 불린다.
비의 제목은 “故牧使金侯時敏全城却敵碑銘(고목사김후시민전성각적비명)”이며, 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嗚呼 急病攘夷 忠所激也 死守不去 義所決也 出奇却敵 勇所奮也 能是三者 而轟轟烈烈 至今耀人耳目者 故牧使金侯是也…
(오호 급병양이 충소격야 사수불거 의소결야 출기각적 용소분야 능시삼자 이첩첩렬렬 지금휘인이목자 고목사김후시야)
아! 위급한 병중에서도 오랑캐를 물리치신 것은 충성심이 솟구쳤던 때문이요,
죽음으로써 지키며 떠나지 않았던 것은 의로움에 의해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며,
기묘한 계책을 내어 적을 물리친 것은 용맹을 드날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를 능히 하시니 소리 드높고 성대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귀와 눈을 번쩍 뜨이게 한 이는 돌아가신 목사 김후이시다.”
1987년에는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비의 뒤편에 ‘계사순의단(癸巳殉義檀)’을 건립해 놓았다.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
경남도유형문화재 제2호(1972년2월12일)로 지정된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 순국한 인물들의 충정과 전공을 기리기 위해 1686년(숙종 12년)에 세워졌다.
비신의 높이는 1.43m이며 너비는 0.92m, 두께는 0.21m이다. 비신은 수성암(水成岩)을 사용하였다.
비문의 하단부는 마멸된 상태이며, 귀부(龜趺)는 비신과 같은 수성암으로 높이 35㎝이며 한 돌로 조각되어 있다.
이수는 쌍용(雙龍)을 조각하고 있는데 높이는 92.5㎝이며, 쌍용이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고 있는 모습이다.
그 아래 부분에는 화문(花紋)을 조각하고 있어서 이채롭다.
다른 비석과 다르게 이수부분이 커서 윗부분이 넓고 하부가 좁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으며, 아래쪽이 판독되지 않을 뿐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비문은 정헌대부 이민서(李敏徐)가 지었고, 성균관사 신익상(申翼相)이 비문을 적었다.
홍문관제학 지연경사 김만중(金萬重)이 두전(頭篆)을 썼다.
비문에 따르면 2만여 명의 왜군이 패배하였던 진주성의 치욕을 씻고자 왜적이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년)에 제2차의
진주성 공략을 하게 된다. 왜군은 12만 1천 6백여 명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세 겹으로 에워싸며 공격하자 중과부적으로
6월 29일 성이 무너졌다고 전해주고 있다.
이와 함께 비문에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인물에 대하여 기술하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인 고종후(高從厚 1554~1593)는 임진왜란 당시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싸우다가 진주성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또한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등이 남강(南江)에 투신하였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 한 명은 황진(黃進 ?~1593)으로 황희(黃喜)의 5대손이다.
그는 1591년 통신사와 함께 일본을 다녀와서 그들의 침입을 예언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용인(龍仁)에서 왜군과
교전하다 패전하자 진안(鎭安)에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하는 전공을 올렸으며 진주성에서 마지막까지 성을
고수하다 전사한 인물이다. 이 외에도 장윤(張潤) 등 진주성에서 순국한 인물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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