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쌍충사적비(雙忠事跡碑)...
2018년 4월 20일, 진주성 여행길에 만난 썽충사적비..
쌍출사적비는 진주성 촉석루 서쪽 의기사 옆에 있는 비로 경남도유형문화재 제3호(1972년2월12일)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목숨을 바친 제말(諸沫)·제홍록(諸弘祿) 두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두 제씨의
충절을 기린다는 의미로 ‘제씨쌍충비(諸氏雙忠碑)’라고도 한다.
쌍충사적비는 왕명에 의해 1792년(정조 16년) 촉석루 옆에 쌍충각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북쪽으로 출입구가 있으며, 비각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비두는 용 2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엉켜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며, 아랫부분에 4개의 국화무늬를 새겨 넣었다.
귀부(龜趺)는 아무런 표식이 없는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두 눈을 돌출시켜 강조했다.
1792년 세워질 때는 촉석루 서쪽 옆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비각이 헐리고 비는 문산 도로 변에 방치되었다.
1961년 지금의 위치에 비각을 새로 지어 비를 옮겼다.
진주성 내에 있어서 외부는 잘 단장되어 있으나 비석의 일부 글자가 훼손되어 있으며 귀부 역시 마모가 심한 편이다.
비두와 비신이 접해지는 부분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다.
제말(諸沫 ?~1592)은 경상남도 고성 출신의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웅천·김해·정암 등지에서 큰 공을 세워
성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정조 때 병조판서에 추대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제홍록(諸弘祿 1558~1597)은 제말의 조카로서, 1581년 무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숙부인 제말 장군과 함께
큰 공을 세웠고, 이순신 장군의 막하(幕下)가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진주성을 지원하기 위해 출전하던 중 전사했다. 정조 때 병조참판에 추증(追贈)되었다.
비의 제목은 ‘諸氏雙忠事蹟碑銘(제씨쌍충사적비명)’이다.
비문의 내용은 임진왜란 때 전공을 크게 세운 성주목사 제말과 이순신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제홍록의 충의를 기리고 있다.
“…今上十六年 下敎若曰 諸沫與郭再佑 同時討倭 竟以身殉 再佑旣蒙褒賞 而諸沫未之及 且固城之役星州之捷 豈讓李忠武露梁哉
可贈正卿賜諡 其侄宣功臣弘祿一體 訑贈立石於戰地 以旌其烈曰諸氏雙忠之址然 國人曉然悟曰 憶 信有是人也..”
...금상십육년 하교약왈 제말흥곽재우 동시토왜 경이신순 재우기몽폄상 이제말미지급 차고성지역성주지첩 기양이충무로양재
가증정경사호 기질선공신홍록일체 챠증입석어전지 이기기열왈제씨상충지지연 국인효연오왈 억 신유시인야:
지금의 임금이 정사를 맡은 지 16년에 교지를 내려, ‘제말과 곽재우는 같은 시기에 왜적을 쳐서 무찌르다가 끝내 순절하였는데,
곽재우는 이미 그 공로를 칭찬하고 기리어 상을 받았으나, 제말에게는 아직 미치지 못하였다.
고성 싸움이나 성주에서의 승리가 어찌 이충무공의 노량해전의 승리에 뒤질 수가 있겠는가! 높은 벼슬과 시호를 내릴 만하다.
그의 조카 선무공신 홍록도 죽은 뒤 그 공로에 따라 벼슬을 높여 주고 싸움터에 비석을 세워서 그 열렬함을 세상에 널리 알려,
제씨 두 사람의 충성의 터라고 하라’고 하였다.
그 뒤 나라 사람들이 깨달아 말하기를, ‘아! 진실로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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