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기행]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쌍충사적비(雙忠事跡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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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기행]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쌍충사적비(雙忠事跡碑)

by 정산 돌구름 2018. 4. 22.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쌍충사적비(雙忠事跡碑)...

 

2018년 4월 20일, 진주성 여행길에 만난 썽충사적비..

 

쌍출사적비는 진주성 촉석루 서쪽 의기사 옆에 있는 비로 경남도유형문화재 제3(1972212)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목숨을 바친 제말(諸沫제홍록(諸弘祿) 두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두 제씨의

충절을 기린다는 의미로 제씨쌍충비(諸氏雙忠碑)’라고도 한다.

쌍충사적비는 왕명에 의해 1792(정조 16) 촉석루 옆에 쌍충각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북쪽으로 출입구가 있으며, 비각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비두는 용 2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엉켜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며, 아랫부분에 4개의 국화무늬를 새겨 넣었다.

귀부(龜趺)는 아무런 표식이 없는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두 눈을 돌출시켜 강조했다.

1792년 세워질 때는 촉석루 서쪽 옆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비각이 헐리고 비는 문산 도로 변에 방치되었다.

1961년 지금의 위치에 비각을 새로 지어 비를 옮겼다.

진주성 내에 있어서 외부는 잘 단장되어 있으나 비석의 일부 글자가 훼손되어 있으며 귀부 역시 마모가 심한 편이다.

비두와 비신이 접해지는 부분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다.

제말(諸沫 ?~1592)은 경상남도 고성 출신의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웅천·김해·정암 등지에서 큰 공을 세워

성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정조 때 병조판서에 추대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제홍록(諸弘祿 1558~1597)은 제말의 조카로서, 1581년 무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숙부인 제말 장군과 함께

큰 공을 세웠고, 이순신 장군의 막하(幕下)가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진주성을 지원하기 위해 출전하던 중 전사했다. 정조 때 병조참판에 추증(追贈)되었다.

비의 제목은 諸氏雙忠事蹟碑銘(제씨쌍충사적비명)’이다.

비문의 내용은 임진왜란 때 전공을 크게 세운 성주목사 제말과 이순신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제홍록의 충의를 기리고 있다.

今上十六年 下敎若曰 諸沫與郭再佑 同時討倭 竟以身殉 再佑旣蒙褒賞 而諸沫未之及 且固城之役星州之捷 豈讓李忠武露梁哉

可贈正卿賜諡 其侄宣功臣弘祿一體 訑贈立石於戰地 以旌其烈曰諸氏雙忠之址然 國人曉然悟曰 憶 信有是人也..”

...금상십육년 하교약왈 제말흥곽재우 동시토왜 경이신순 재우기몽폄상 이제말미지급 차고성지역성주지첩 기양이충무로양재

가증정경사호 기질선공신홍록일체 챠증입석어전지 이기기열왈제씨상충지지연 국인효연오왈 억 신유시인야:

지금의 임금이 정사를 맡은 지 16년에 교지를 내려, ‘제말과 곽재우는 같은 시기에 왜적을 쳐서 무찌르다가 끝내 순절하였는데,

곽재우는 이미 그 공로를 칭찬하고 기리어 상을 받았으나, 제말에게는 아직 미치지 못하였다.

고성 싸움이나 성주에서의 승리가 어찌 이충무공의 노량해전의 승리에 뒤질 수가 있겠는가! 높은 벼슬과 시호를 내릴 만하다.

그의 조카 선무공신 홍록도 죽은 뒤 그 공로에 따라 벼슬을 높여 주고 싸움터에 비석을 세워서 그 열렬함을 세상에 널리 알려,

제씨 두 사람의 충성의 터라고 하라고 하였다.

그 뒤 나라 사람들이 깨달아 말하기를, ‘! 진실로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