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기행] 논개의 사당 의기사(義妓祠)와 의암(義巖), 그리고 의암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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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기행] 논개의 사당 의기사(義妓祠)와 의암(義巖), 그리고 의암사적비..

by 정산 돌구름 2018. 4. 22.

논개의 사당 의기사(義妓祠)와 의암(義巖), 그리고 의암사적비..

 

2018년 4월 20일, 진주성 답사 현장에서..

 

<의기사(義妓祠)>

경남문화재자료 제7(1983720)인 논개의 사당 의기사(義妓祠)는 진주성 촉석루 경내 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 측면 2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로 맞배지붕이며, 안에는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린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의기 논개(論介)의 사당이다.

1721(경종 1)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崔鎭漢)이 지역민 등의 요구와 유몽인(柳夢寅)어우야담(於于野談)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고, 1740(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건의로 건립되었다.

1779(정조 3)에 경상우병사 홍화보(洪和輔)가 낡고 부서진 곳을 수리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고, 사위인 다산(茶山) 정약용

(丁若鏞)에게의기사기(義妓祠記)’ 지어 걸도록 하였다.

또한 1823(순조 23) 진주목사 홍백순(洪百淳)과 경상관찰사 이지연(李止淵)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춘추(春秋)로 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지연(李止淵)의 글씨로 ‘의기사(義妓祠)’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1868(고종 5년)에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이 의기사를 보수하고,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의암별제를 지내도록 한 이래

현재까지 여성들이 제관이 되어 논개의 의로움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이후 6·25전쟁으로 의기사는 완전 소실되었다가 1960년 사단법인 진주고적보존회가 재건하여 현재의 건물로 유지되고 있다.

1962년에 사당 보호를 위해 모의당(募義堂)을 세웠다.

의기사의 정면 좌측에는 을사5으로 악명 높은 친일파 이지용에게 기생 줄 돈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고 꾸짖었던 의기 산홍(山紅)의 시가 걸려 있다.

 또 정면 우측에는 다산 정약용의 ‘의기사기’와 시 1수가 판각되어 걸려 있다.

<의암(義巖)>

의암(義巖)은 임진왜란 때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순국한 바위로 경남도기념물 제235(2001927)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최경회(崔慶會)의 후처인 논개(論介)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바위이다.

면적은 약 400에 이른다. 1593 2차 진주성 싸움으로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이에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촉석루에서 벌어진 연회에 참석하였으며, 열 손가락 모두에 가락지를 낀 채 남강의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진주 지방의 양반들과 백성이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하였다.

1629(인조 7) 정대륭(鄭大隆)이 바위벽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새겼고 의암의 강 쪽 절벽에는 ‘일대장강 천추의열

(一帶長江 千秋義烈)’이라고 새겨 충의를 기리고자 하였다.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는 경남도유형문화재 제353(2000131)로 논개의 공적비이다.

1593(선조 26) 임진왜란 제2차 진주싸움 때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여 명의 민··군이 순절한 뒤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論介)의 공적비이다.

의암에서 촉석루로 올라가는 길목 암반 위의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논개에 관한 이야기는 임진왜란 후 진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1620(광해군 12)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譚)에 실려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 진주지역 사민들은 진주성이 함락된 날에 남강변에 제단을 마련하여 논개의 혼을 달래는 한편, 논개의 의로운 사적을

인정해 줄 것을 조정에 요구하였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논개의 사적을 잊지 않기 위하여 1722(경종 2) 진주의 선비 명암(明庵) 정식(鄭軾, 16831746)

어우야담의 기록을 바탕으로 지은 비문을 내용으로 담아 이 사적비를 세웠다.

이후 비석을 다듬어 놓은 해로부터 18년 뒤인 1740(영조 16) 가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왕의 명을 받고

이듬해인 1741(영조 17년) 봄에 비각을 세우고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비각은 정면 1, 측면 1칸의 기와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며 양쪽에 풍판을 달았다.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금석자료로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상황과 논개의 순국사실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비석의 높이는 145이며, 너비는 60, 두께는 15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獨峭其巖 特立其女 女非斯巖 焉得死所 巖非斯女 焉得義聲 一江高巖 萬古芳貞

홀로 가파르게 우뚝 선 바위에 그녀가 서 있구나.

그녀가 이 바위 아니었다면 어찌 죽을 곳을 얻고, 이 바위 그녀가 아니었다면 어찌 의로움을 들었겠는가.

남강에 높은 바위 만고에 꽃다운 정절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