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기행] 아홉 마리 용의 전설이 숨어있는 치악산 구룡사(龜龍寺)
2018년 8월 8일, 6시가 되지 않은 이른 아침 치악산 오토캠핑장에서 구룡사를 둘러본다.
치악산 구룡사(龜龍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8년(668년)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다.
원래 지금의 절 터 일대는 깊은 소(沼)로서 거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의상은 치악산을 향해 가던 중 사방을 살펴보니 동쪽으로는 주봉인 비로봉이 솟아있고, 다시 천지봉 낙맥이 앞을 가로지른 데다
계곡의 경치 또한 아름다워 이곳은 절을 세울만한 곳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고 용들과 도술시합을 했다.
용들이 먼저 솟구쳐 오르자 뇌성벽력이 치고 산들이 모두 물에 잠겨버렸다.
용들이 흐뭇해하며 주변을 살피니, 의상은 비로봉과 천지봉에 줄을 걸어 배를 매놓고 그 안에서 자고 있었다.
의상이 부적을 한 장 그려 연못에 넣자 연못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용들이 뜨거워 날뛰었다.
그때 놀란 용 여덟마리가 절 앞산을 여덟 조각내면서 동해로 도망치고, 한마리는 눈이 멀어 함께 도망가지 못하고 못에 머물렀다.
의상은 절을 창건한 뒤 이러한 연유로서 절 이름을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도선(道詵)·무학(無學)·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세월이 흘러 절이 퇴락하게 되었고,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울어지자 어느 날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대로 했더니 절이 더 힘들어졌고 폐사가 되려 했다.
이번에는 한 도승이 나타나 거북의 혈맥을 끊어서 절이 쇠락해졌으니 다시 그 혈맥을 이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 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1706년(숙종 32년) 중수되었고, 근래에서는 1966년 종영(宗泳)이 보광루를 해체 복원하였다.
1968년에는 심검당과 요사를, 1971년에는 삼성각을, 1975년에는 대웅전을 보수 단청하였다.
이 절의 당우로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광루(普光樓)·삼성각(三聖閣)·심검당(尋劍堂)·
설선당(說禪堂)·적묵당(寂默堂)·천왕문(天王門)·종루(鍾樓)·일주문(一柱門)·국사단(局司壇) 등이 있다.
이 중 동향한 대웅전은 조선 초기 개축된 건물로서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예스런 무게가 다소 감소되었으나, 내부의 닫집은 당시의
조각술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귀한 것이며,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은 건물이기 때문에 비록 낡았지만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보광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이층 누각이며, 이층 마루에 깔린 멍석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것이라고 전한다.
현재 입구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황장금표(黃膓禁標)가 있는데, 이것은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무단벌채를 금하는 방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표지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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