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금강산 금강골의 해촌서원(海村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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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금강산 금강골의 해촌서원(海村書院)..

by 정산 돌구름 2017. 9. 20.

해남 금강산 금강골의 해촌서원(海村書院)..

 

2017년 9월 16일, 해남 금강산 산행을 마치고 둘러본 금강골의 해촌서원..

 

해촌서원은 최부, 임억령, 류희춘, 윤구, 윤선도, 박백웅 6현(賢)을 배향하고 있다.

당초에는 해남읍 구교리에 있는 석천사(石川祠)1652(효종 3) 임억령의 단독 사우로 건립하였다.

그 후 1689(숙종 15) 해남 유림의 발원으로 금남(錦南) 최부(崔溥), 미암(眉庵) 류희춘(柳希春)을 추배하여 삼현사라

하다가 1721(경종 1) 귤정(橘亭) 윤구(尹衢)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를 추배하여 오현사가 되었다.

1868년 조정의 영으로 미사액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었다가 1901(광무1) 사우 대신 단을 쌓아 제향을 이어갔다.

그 후 1922년에 취죽헌(翠竹軒) 박백응(朴伯凝)을 추배하고 사우를 신축하여 유지해 오다가 1991년 구교리에 있던 것을

해리 금강골 저수지 옆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삼문과 담장 안에 있는 사우는 정면 3,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사우 좌측에 고직사 1동이 있다.

서원에 모셔진 해남 출신의 유현들은 대부분 동시대의 인물이며 윤선도가 그 이후 인물이다.

임억령(林億齡)은 선산(善山)인으로 자는 대수(大樹), 호는 석천(石川)이다.

1516년 진사가 되었고, 152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부교리·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간·전한·세자시강원설서 등 여러 직위에 임명되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동생 임백령(林百齡)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그 뒤 임백령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분격하여 이를 불태우고 해남에 은거하였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1552년 동부승지·병조참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가 되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을 좋아하여 사장(詞章)에 탁월하였으므로 당시의 현인들이 존경하였으나

이직(吏職)에는 적당하지 않았던 것으로 사신(史臣)들이 평하였다.

화순 동복의 도원서원, 해남의 해촌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석천집>이 있다.

최부(崔溥 1454~1504)는 탐진(耽津)인으로 호는 금남(錦南), 자는 연연(淵淵)이다.

조선 중기 유학자 김종직의 학통을 추종하는 문인으로 1477(성종 8) 진사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482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홍문관 부교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전적(典籍)으로 있을 때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148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응시하여 아원(亞元)으로 급제, 사헌부감찰(監察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수찬으로

승진하고 1487년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1492년 사헌부 지평(持平)에 올랐다 사간(司諫)으로 전임, 1497년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무오사화 때 단천(端川)에 유배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 참형(斬刑)당하였다.

1506년 중종 즉위와 동시에 신원(伸寃)되어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가 추증되었다. 표해록과 금남집을 남겼다.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선산(善山)인으로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1513(중종 8) 해남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살았던 집 뒤의 바위가 눈썹의 모양이라고 해서 호를 미암(眉巖)이라고 지었다.

그의 고조는 감모만호를 지냈는데 이때 영남에서 순천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해남에서 살게 되었다.

여류문인 송덕봉(宋德峯)이 유희춘의 처이다.

20세 때 최산두(崔山斗)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대둔사, 도갑사에 머물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38(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다음 수찬·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1547년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가 윤임, 유관, 유인숙의 죄를 물어 숙청하라는 밀지를 내리자 이에 부당함을 논하다가 벽서

(壁書)의 옥()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1558년 그의 모친이 사망하였지만 그는 귀양지에 머물러야 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성균관 직강(直講) 겸 지제교(知製敎)에 재등용 되었다.

이어 대사성 ·부제학 ·전라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75(선조 8)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1576년 선조에게 사직을

청하기 위해 한양에 올라와 머물다가 사망하였다.

윤구(尹衢 1495~?)는 해남(海南)인으로 자는 형중(亨仲), 호는 귤정(橘亭), 아버지는 생원 윤효정(尹孝貞)이다.

1513(중종 8)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다음해 주서에 이어 홍문관의 수찬·지제교(知製敎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삭직되었다. 주서로 있을 때 왕에게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드러나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538년에 복직되었으며, 남해향사(南海鄕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귤정유고>가 있다.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해남(海南)인으로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612년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경상도 기장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42세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보도(輔導)했다. 16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서 은거하였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하여 1638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나 해남으로 돌아갔다.

1652년 왕명으로 복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남인(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 당했다. 16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송시열이 영수로 있는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하여 1660년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복서(卜筮음양·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박백응(朴伯凝 1525~?)은 무안(務安)인으로 호는 취죽헌(翠竹軒)이다. 내구 엄석천의 문하에서 수업, 사마시에 합격한 후 진취의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마침내 대성하였다. 남태현감과 진원현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