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기행] 구산선문종찰(九山禪門宗刹), 가지산 보림사(寶林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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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기행] 구산선문종찰(九山禪門宗刹), 가지산 보림사(寶林寺)

by 정산 돌구름 2017. 6. 22.

구산선문종찰(九山禪門宗刹), 장흥 가지산 보림사(寶林寺)

 

 

물과 숲, 그리고 휴식의 고장인 장흥(長興)은 전라남도 중부권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 나주와 화순, 서쪽으로는 영암과 강진, 남쪽으로는 완도, 동쪽으로는 보성·고흥과 경계를 이룬다.

읍이 3(장흥·관산·대덕)이나 되고, 용산·안양·장동·장평·유치·부산·회진 등 7개면에 294개 마을이 둥지를 틀고 있다.

장흥군은 1966년에 144,000여 명의 많은 인구가 살기도 하였지만지금은 약 42,000여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장흥(長興)의 지명은 고려 인종이 이곳 출신 공예태후를 맞아 의종·명종·신종을 낳은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길이 번창하라

임금의 바람이 담아 내려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장흥은 강진·영암·완도 등 이웃 고을을 호령하던 곳으로 일제 때는 헌병대가 있었고, 검찰과 법원이 일찌감치 자리잡았다.

장흥은 물과 숲의 고장답게 가는 곳마다 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계곡엔 맑은 물이 넘쳐난다.

도립공원인 천관산을 비롯해 억불산·제암산·사자산·수인산·부용산 자락이 길손을 포근하게 반겨준다.

전라남도 3대강인 탐진강은 56물줄기를 이루며 장흥읍을 가로 질러가 농산물과 축산물을 명품으로 만든다.

 

2017년 6월 21일, 출장길에 찾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번지에 위치한 가지산(迦智山) 보림사..보림사(寶林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원표(元表)가 세운 암자에다 860년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가지산파의 법맥을 이어받은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창건하여 선종(禪宗)의 도입과 동시에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곳이기도 하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도량이었으며,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동양 3대 보림이라 일컬어진다.

그 뒤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한국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

그러나 공비들이 소굴로 이용하였던 이 절에다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고,

단지 천왕문(天王門)과 사천왕(四天王외호문(外護門)만 남았다.

불타버린 대웅전은 서쪽을 향하여 세운 정면 5, 측면 4, 중층팔작(重層八作)지붕의 큰 건물이었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2층까지 통해서 한 방으로 만들고, 중앙 단상에는 금동석가여래상과 양협시불을 안치하였는데,

구조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한 수법이다.

이후 주민들은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대웅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적광전과 천왕문·영각(影閣요사채 등이 있다.

사천왕문 안에 봉안된 사천왕상은 1780(정조 4)에 조성된 국내 목각상의 대표적인 것으로 최근 중수하여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였으나 복장 속의 비장품은 도굴꾼들에 의하여 망가진 상태로 방치되었다.

현재 사천왕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림사의 국가지정 문화재는 국보 제44호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제117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 좌상,

보물 제155호 보림사 동승탑, 보물 제156호 보림사 서승탑(2), 보물 제157호 보림사 보조선사탑, 보물 제158호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보물 제745-9호 사천왕상복장 월인석보 권제25, 보물 제772-3호 사천왕상복장 금강경삼가해 권제1,

보물 제1252호 사천왕상복장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제9 및 권제10, 보물 제1254호 목조사천왕상 4상 등이 있다.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로는 유형문화제 제191호 장흥 전 의상암지 석불입상, 194호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계초심학인문,

195호 사천왕상복장 고봉화상 선요, 196호 사천왕상복장 금강반야론, 197호 사천왕상복장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198호 사천왕상복장 대전화상 주심경, 199호 사천왕상복장 몽산화상 육도보설(2), 200호 사천왕상복장 불설

사십이장경, 201호 사천왕상복장 육경합부(6), 202호 사천왕상복장 언해판화 관계불서(16), 203호 사천왕상복장

진언의식 관계불서(84), 204호 사천왕상복장 선종불서(47), 205호 사천왕상복장 경전불서(40) 등이 있다.

 

 

9산선문의 종찰로 꼽히는 가지산보림사 일주문..

선종구산문(禪宗九山門)은 선종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후 신라 말 고려 초에 형성된 9개의 산문(山門)이다.

도의(道義)의 가지산문(迦知山門), 홍척(洪陟)의 실상산문(實相山門), 혜철(惠哲)의 동리산문(桐裏山門),

도윤(道允)의 사자산문(獅子山門), 낭혜(朗慧)의 성주산문(聖住山門), 범일(梵日)의 사굴산문(闍崛山門),

지증(智證)의 희양산문(曦陽山門), 현욱(玄昱)의 봉림산문(鳳林山門), 이엄(利嚴)의 수미산문(須彌山門)을 말한다..

 

 

사지산 보림사 현판이 걸려있는 외호문..

 

선종대가람이라는 현판도 있다..

 

외호문을 들어서면 사천문..

 

사천문은 자연석을 한단 올려 쌓은 기단 위에 운두가 비교적 높직한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치목한 원형기둥을 세웠고, 창방을 끼운 뒤 익공을 짰다.

어칸 주간에는 화반을 각각 2구씩 받쳤으며, 좌우 협칸에는 동자주 모양의 부재를 2구씩 받쳤다.

익공은 2익공으로 외부는 연꽃과 봉오리를 새겼으며 보 머리는 봉황을 새겼다.

내부에는 사천왕상 외에 소형의 금강역사상 2구가 있다.

 

보림사 목조 사천왕상(四天王像)

보물 제1254호(1997년6월12일)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293 cm , 금강역사상 높이 250 cm이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사천문(四天門)에 걸려있던 1780년에 지어진 “보림사천왕금강중신공덕기(寶林寺天王金剛重新功德記)”의 내용에 따르면

이 네분의 사천왕상은 정덕 을해년(正德 乙亥年, 중종 10, 1515)에 계문(戒門)스님의 주도 하에 조성되었으므로

국내에 현존하는 사천왕상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전의 사천왕상으로는 유일하게 병화를 입지 않아 소실되지 않은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1995년도에 퇴색되고 부식된 사천왕상들을 보수, 보존처리를 하기 위하여 정밀지표조사를 하던 중에

사천왕상의 팔과 다리부분의 안쪽 공간에서 총349책의 고전적류가 발견되었다.

그 많은 전적류 중에서 ‘월인석보 권제25’, ‘금강경 삼가해권제1’, ‘상교정본 자비도량참법 권제9,권제10’은 국가지정 보물로

되었고, 201책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조성된 불상 등을 포함한 일체 불교조각상 중에서 이렇게 몸통의 복장구(腹藏口)이외의 팔과 다리부분에서

복장물이 발견된 경우는 보림사 사천왕상이 최초이자 유일한 예이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가치가 있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위치하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얼굴은 분노한 표정을 하였으며, 복장은 갑옷과 천의를 입고 있다.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으로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에서 부드러운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비파를 들고 있으며, 발 아래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다리를 받쳐 들고 있다.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은 굳게 다문 입과 함께 근엄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고 있다.

왼손은 무엇인가 쥐고있는 듯한 자세만을 취하고 있다. 당당해 보이는 신체는 수호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소리지르는 듯한 위엄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에는 깃발을 잡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들고 있었던 모습인데 보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내에 들어서면.. 

 

보림사 대정광전과 삼층석탑 및 석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국보 제44(19621220)로 지정된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三層石塔, 石燈)..

남탑 높이 5.4m, 북탑 높이 5.9m, 석등 높이 3.12m이다.

남북으로 대립한 같은 규모와 구조의 석탑으로 그 사이에는 석등이 1() 있다.

2중 기단(基壇)의 구성은 모두 통식(通式)을 따랐으나 갑석(甲石)이 얇아 평판적(平板的)인 느낌을 준다.

상하 기단 탱주(撑柱)의 수도 하층 기단에 2(), 상층기단에 1주를 두어 간략화된 수법을 보인다.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을 각각 1()으로 하고 옥신에는 우주(隅柱)를 표시하였다..

 

1933년 도굴배가 사리장치를 훔칠 목적으로 탑을 파괴하였으나 미수에 그쳤고,

다음해 가을 이를 복원하다가 초층 탑신에서 사리와 함께 탑지(塔誌)를 발견하였다.

탑속에서 발견된 명문(銘文)으로 보아 두 탑의 건립이 870(경문왕 10)의 일임을 알 수 있다.

각 부분의 비례가 알맞아 훌륭한 조화를 보이고, 조형 역시 화사하다. 석등의 제작연대도 두 탑과 같은 것으로 추정되나

강건한 기백이 줄고 장식성이 가미되는 등 연대가 조금 뒤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탑의 건립은 경문왕이 선왕인 한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것이라 하며, 진성여왕 4년(891년)에는 사리 7과를 봉안하고

조선 성종 9년(1478년)과 중종 30년(1535년), 숙종 10년(1648년)에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탑지와 청동합 등 사리구는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석등은 석탑과 같은 기간 즉, 함통(咸通) 9년(868년)에서 함통 11년(87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석등 가운데 가장 완전하게 보전된 신라석등이며, 그 가운데도 장식이 가장 많은 것으로 꼽힌다..

 

국보 제117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진 대적광전(大寂光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1996년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하였다.

반듯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해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붉은 기운이 강한 널찍한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민흘림으로 치목한 원형기둥을 세웠고 기둥머리는 창방과 평방을 끼운 뒤 다포계 공포를 짜올렸다..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

국보 제117(1963221)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좌상 높이 2.51m, 무릎 너비 l.97m이다.

보림사의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모셔진 철제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철제 불상이 유행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대작으로 당시 조법이 잘 나타나 있는 대표작이다.

각 부분을 따로 주조한 뒤에 접합하여 만든 것으로 나발에 육계는 크고, 얼굴은 갸름한 편이나 볼은 살이 올라 통통하다.

눈은 치켜 올라갔으며 다소 긴 코는 각이 져 우뚝하고, 두툼한 입과 커다란 귀 등에서 위엄이 느껴지나 전체적으로 다소

경직되어 보인다. 전체 체구에 비해서 손은 지나치게 작은 반면 가부좌한 다리는 커서 균형을 잃은 모습이다..

 

통견의 법의는 V자형으로 앞가슴을 덮었으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반복적인 평행으로 비교적 유연하게 흐르고, 수인은 오른손으로 검지를 감싼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철을 이용해 불상을 만든 까닭은 9세기 중엽 통일신라의 중앙집권력이 약화되면서 불상의 제작 또한 각 지방의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지방의 호족들은 귀한 금을 이용하기보다는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철을 불상 제작에 이용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철제 불상이 등장하여 이전보다 양감이 떨어지는 불상이 제작되었다..

 

왼팔 후면에 양각된 명문(銘文)으로 보아 858(헌안왕 2)에 무주장사(武州長沙 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

(金遂宗)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수 있을 뿐아니라 9세기 후반기 철불 유형을 이루는 새로운 양식의 선구적인 걸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보림사 삼성각..

 

 

 

 

 

 

보림사 미타전, 안에는 전의상암지석불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장흥 전의상암지석불입상(傳義湘庵址石佛立像)..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91(199825)로 지정된 이 석불은 원래 장흥읍 제암산 중턱 의상암 절터에 있던 것이다.

1975년 장흥읍 원도리에 있는 장흥교도소 정문 앞에 있었다가 1994년 다시 보림사로 옮겨 지금은 미타전에 보존되고 있다..

 

몸 뒤의 광배(光背)와 목 부분에 약간의 파손이 있어 보수하였을 뿐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상호는 계란형으로 원만한 모습이며 머리는 소발(素髮)로 상호에 비해 육계가 높은 편이며 보주는 없다.

이마 위 중앙에 백호가 양각되었으며 눈은 반쯤 떴는데 눈꼬리가 약간 치솟았다.

작은 입에 입술이 두꺼운 편이며 귀는 어깨 위까지 길게 늘어졌으며 측면까지 세밀하게 조각되었다.

법의는 통견의이며 가슴 위까지 U자형을 이루면서 왼쪽 어깨로 2조선이 겹쳐서 넘어가고 있다.

양쪽 팔목에 표현된 법의 자락은 무릎 아래까지 길게 늘어졌으며 옷주름은 파상무늬로 표현하였다.

왼손이 파손되어 수인은 정확치 않으나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정인으로 추측된다.

수인이 아미타정인이라면 이 석불은 아미타불일 것이며 봉안된 건물은 극락전이었을 것이다.

맨 하단의 옷주름 밑으로는 두발이 표현되었다.

원만한 상호와 높은 육계, 상체의 옷무늬, 당당한 어깨선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뒤편에 자리잡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조사전(祖師殿)..

자연석 기단에 원형초석을 놓고 민흘림으로 치목한 원형 기둥을 세워 기둥머리는 초익공을 결구하고, 주간에는 소로로 받쳤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만들고 정면 3칸은 모두 띠살로 짠 분합문을 달았다..

 

안에는 전면에 보조선사와 도의선사, 염거선사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좌측벽에는 보우화상의 진영이 있다..

 

좌측에는 가지산문 보림사의 개산조(開山祖)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중앙에는 원표 대덕에 이은 가지산문 초조(初祖) 도의선사(道義禪師) 원적(元寂)의 진영..

 

우측에 가지산문()의 제2대 교조 염거선사(廉居禪師) 진영과 그 옆에 태고화상(太古和尙) 보우(愚)의 진영이 있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普照禪師彰聖塔)...

 

보물 제157(1963121)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묘탑이다.

보림사는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신라 헌안왕의 명으로 860년경에 건립된 대가람이다.

6·25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아직도 동서 양 3층석탑·석등·석불 등의 많은 유물이 남아 있고,

보조선사의 유적도 이 묘탑 이외에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가 남아 있다.

이 탑은 보조선사 체징의 사리탑으로, 보조선사는 헌강왕이 내린 시호이며, 창성은 탑호이다..

 

일제강점기에 사리구(舍利具)를 절취당하면서 도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8각 원당형(圓堂形)을 따른 이 탑은 8각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여 있고, 지대석 윗면에는 얕은 1단의 굄이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 뒤에 팔각 석재가 2중으로 놓였는데 손상이 심하다. 탑신(塔身)8각이며 너비는 상대석(上臺石)과 거의 같다.

상륜(相輪)으로는 보륜(寶輪보주(寶珠) 등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조루(彫鏤)가 섬려(纖麗)하고 그 형태도 정돈된 편이다.

조성은 보조선사가 입적(入寂)880년의 4년 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림사 석조비로자나불입상..

보조선사탑 옆에 조각난 석불입상으로 근자에 장흥공설운동장에서 옮겨온 것이다.

1970년 보호전각을 철거하면서 얼굴과 어깨 부분이 결실되었는데 잔편들은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화강암으로 된 이 불상은 높이 150cm, 너비 130cm, 두께 45cm로 광배와 불신이 한 돌로 짜여있다.

어깨 부분이 결실되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신체는 당당하며, 법의는 두 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중앙을 기준으로 대칭이다.

수인은 가슴중앙에서 양손을 상하로 잇대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지인권의 변형으로 여겨진다.

광배는 몸 전체를 두르는 거신광으로 가장자리에 화염문을 조각하였고 발아래는 원래 대좌가 아닌 비신받침 석재를 받쳤다.

단조로운 옷주름이나 변형된 지인권의 수인 등으로 볼때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

 

보물 제158(1963121)로 지정되었으며, 전체 높이 3.46m, 비신 높이 2.64m, 너비 1.37m이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화강석,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김영(金穎)의 찬문(撰文)에 김원(金薳) ·김언경(金彦卿)의 서자(書字), 자경(字徑)2.4cm이다..

 

첫행부터 제7행의 자까지는 김원이 해서(楷書)로 썼으며, 그 이하는 김언경이 행서(行書)로 썼다.

내용은 보조선사에 관해서 전하며, 보조의 휘()는 체징(體澄), 속성은 김, 804(애장왕 5년) 웅진(熊津)에서 출생하였다.

조형은 신라 전성기의 것이지만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하였고 목은 직립하여 생경한 인상을 준다.

이수(螭首)도 정연하게 규격을 갖추었으나 세선각문(細線刻文) 등에서 형식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각부는 완존(完存)해 있으며, 다른 비에 비하여 전체적으로 매우 높고 큰 당대 비석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보림사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염라대왕 등 10왕을 모신 전각인데 주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다.

이 세상이 아닌 어두운 세계인 명부세계(冥府世界)의 왕인 염라대왕(閻羅大王)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이라 하며,

또한 지옥에 있어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유명계(幽冥界)의 심판관인 열 분의 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명부전은 사찰 내의 불전들 중에서 그 격이 한 단계 떨어지므로 건물의 크기나 양식도 주불전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 보통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로부터 사바세계에 미륵불이 출세할 때까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여 그들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토록 하는 부촉(付囑)을 받았다. 지장보살의 하화중생(下化衆生)에 대한 서원(誓願)은 지옥문에까지 이르러 명부시왕의

무서운 심판에서 인간울 구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지장보살의 모습은 일반 불상과는 달리 머리에 두건을 쓰거나 삭발한 승려형의 2가지이며, 한 손에는 석장(錫杖)을 짚고 있다..

 

시왕중 제1진광대왕, 2초강대왕, 3송제대왕, 4오관대왕, 5염라대왕, 6변성대왕, 7태산대왕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날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각 7대왕이 심판을 맡는다..

 

그 뒤 백일에는 제8평등대왕, 소상 때는 제9도시대왕, 대상 때는 제10 오도전륜대왕이 차례로 생전에 지은 선업과 악업 등

잘잘못을 심판한다고 한다.

 

명부전에서는 중앙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왼쪽에 도명존자(道明尊者), 오른쪽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봉안하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 동자상, 판관(判官) 2, 녹사(錄事) 2, 장군 2인을 자형으로 배치하게 된다.

 

 

 

보림사 대웅보전은 해방 이후 국보 제240호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중에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82년 철안스님이 보림사에 부임하면서 복원하였다.

서쪽을 향하여 세운 정면 5, 측면 4, 중층팔작(重層八作)지붕의 큰 건물이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2층까지 통해서 한 방으로 만들고, 중앙 단상에는 금동석가여래상과 양협시불을 안치하였는데,

구조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한 수법이다.

130cm의 석축 기단위에 자연석을 주초로 사용하였고 다포양식으로 각 주간에 1개의 공간포가 있다.

기둥은 엔타시스형식이며 창벙, 평방의 기법도 나타나며 네 귀퉁이는 활주(活柱)로 받쳤다.

장대석 기다 위에 널찍한 자연석 초석을 놓고 민흘림으로 치목한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는 창방과 평방을 결구한 뒤 다포계 공포를 짜 올렸다.

포는 외2출목, 2출목으로 출목수는 같다. 주간포는 상하 모두 1구씩 배치하였다.

내부는 상하가 트인 통층인데 천장은 상층부에 우물반자를 가설한 우물천장으로 장엄하였다.

처마는 상하 모두 겹처마로 구성하고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지붕을 만들었다.

용마루 와적층 아랫단은 미출(眉出)로 장식하였으며, 마루 끝은 망와를 세웠다.

기와골 끝은 상하층을 달리하여 상층은 막새를 끼웠지만 하층은 와구토로 마감하였다.

전면은 띠살로 짠 모두 4분합문을 달았으며 측면에 출입문을 설치하였다.

상층은 채광용 고창을 달았다. 주련은 하층 전면 기둥에만 걸었다.

외부 벽면에는 심우도(尋牛圖)를 그려 넣었다..

 

내부 중앙에는 근래에 조성한 삼세불좌상과 4대 협시보살 입상을 모셨으며,

후벽에는 3폭으로 구성된 영산회상탱을 봉안하였다..

 

불상은 화려하게 조각한 불단 위에 모셨고 머리 위에는 아자형 닫집을 걸었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시고, 다시 각각 좌우에 보살을 모시고 있다.

삼세불(三世佛)은 과거불인 연등불(練燈佛), 현세불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을 뜻한다.

연등불은 정광불(錠光佛)이라고도 하며, 석가가 보살로 있을 때 이 부처에게서 '미래세에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

석가모니불은 역사적 실존 인물로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으며 현재는 보살로 있으며 도솔천에서 설법하고 있다.

석가모니불 입멸 후 567천만년 뒤에 사바세계에 내려올 미래불로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의 법회를 열어 아직 제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교화한다고 한다.

현재 받고 있는 고락은 과거의 업에 대한 결과이고, 현재에 쌓은 업은 다시 미래에 이어진다는 것이다.

삼세불을 한자리에 모실 때는 석가모니불이 가운데 위치하고, 그 왼쪽에 미륵불, 오른쪽에 연등불이 위치한다..

 

4대보살은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을 말한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버드나무가지 또는 연꽃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단독 형상으로 조성되기도 하지만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나타나기도 하며 지장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있기도 한다.

수월관음보살(水月觀音菩薩), 백의관음보살(白衣觀音菩薩),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 천수관음보살(千手觀音菩薩)

등의 형태로 조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측에 문수보살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고, 대적광전(大寂光殿)에도 비로자나불

좌측에 문수보살을 봉안하며, 특별히 문수신앙이 강한 사찰에는 문수보살상만을 모신 문수전(文殊殿)을 따로 두기도 한다..

 

보현보살(普賢菩薩)은 부처님의 행원(行願)을 대변하는 보살로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모니불을 협시하는 보살로 유명하다.

문수보살이 여래의 왼편에서 여러 부처님의 지덕(智德)과 체덕(體德)을 맡음에 대하여,

보현보살은 오른쪽에서 이덕(理德)과 정덕(定德)과 행덕(行德)을 맡는다.

형상은 흰 코끼리에 탄 형상으로 많이 표현되었고, 연화대에 앉은 모습은 주로 진언밀교(眞言密敎)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지장보살은 석가의 위촉을 받아 그가 죽은 뒤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일체 중생을 구제하도록 의뢰 받은 보살이다.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지옥에 몸소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교화, 구제하는 지옥세계의 부처신앙이다.

관세음보살과 함께 가장 많이 신앙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에게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성불(成佛)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중생이 모두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리라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모신 전각을 지장전·명부전 혹은 시왕전이라 한다.

형상은 본래는 보살형으로 보관과 영락으로 장엄한 모습이었지만 차츰 삭발을 한 사문(沙門)의 모습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사문형의 지장보살은 천의 대신 가사를 입고 있으며, 지옥문을 깨뜨린다는 석장인 육환장과 어둠을 밝히는 보석구슬인

장상명주를 들고 있다. 육환장의 6고리는 육바라밀을 상징하며, 윗부분에는 화불을 모시기도 한다..

 

 

 

대웅보전의 범종..

 

대웅보전 앞에는 괘불지주가 남아있다.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었으며, 위 아래 두 구멍이 뚫려 있는데 구멍 아래부터 땅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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