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기행] 웅장한 규모의 객사, 금성관(錦城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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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기행] 웅장한 규모의 객사, 금성관(錦城館)

by 정산 돌구름 2016. 7. 19.

웅장한 규모의 객사, 나주 금성관(錦城館)

 

○ 탐방일 : 2016년 7월 17일(일)

○ 소재지 : 전남 나주시 과원동 109-5

○ 금성관 소개

  전남유형문화재 제2(1972129)로 지정된 정면 5, 측면 4칸의 익공집식 겹처마 팔작지붕의 조선시대 관아이다.

  1373(공민왕 22) 목사 이유인(李有仁)의 발안으로 금성군의 정청(政廳)으로서 건립되었다고 전하여 온다.

  1603(선조 36)에 크게 중수했고 1884(고종 21)에 목사 박규동(朴圭東)이 삼창(三創)을 했다.

  1910년 이후 민족항일기에는 건물의 일부를 개조하여 군청 청사로 사용하다가 그 뒤 19639월에 보수하였으며,

  1976년에 완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18()의 외진주(外陣柱)8본의 내진주를 배열하고 배흘림이 없는 곧고 훤칠한 원주(圓柱)를 세우고

  외일출목의 주심포양식을 이루고 있는데, 정면 중앙 3칸은 네짝의 빗살문을, 양쪽 협간에는 두짝의 빗살문을 달았다.

  측면 또한 빗살창문으로 중앙 2칸은 네짝문이고, 양쪽 1칸에는 두짝을 달았다.

  본래 이 금성관에는 정문이 있었으나, 1966년 나주공원에 위치한 정렬사(旌烈祠)의 정문으로 이축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성관의 정문인 2층짜리 망화루도 함께 만들었으나 지금은 망화루의 현판과 내삼문만을

  남산시민공원으로 옮겼다.

  금성읍지에 객사 목사 이유인 구후 목사 박규동 중수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망궐례를 지내던 객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이 건물은 나주목의 객사 건물로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국왕에 대한 예(망궐례)

  올리기도 하였고, 외국 사신이나 정부 고관의 행차가 있을 때 연회를 열었던 곳이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임진왜란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다.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서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하였다.

  나주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웅장하다.

  곁에는 삼층석탑(보물50), 사마교비, 금성토평비, 목사선정비 등의 문화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