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0일 일요일,
지리산 노고단을 보고 내려서는 길에 남방제일선찰로 불리는 천은사를 찾았다.
한여름의 천은사는 절 앞의 커다란 저수지 천은제를 품고, 계곡을 감싸고 있어 시원한 느낌이 든다.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로 이름이 난 천은사(泉隱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지리산의 높고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절 옆으로 펼쳐지고 우람한 봉우리가 가람을 포근히 둘러싸고 있다.
산문과 일주문을 지나 독특하고 운치있는 수홍문을 건너 절을 찾는 즐거움은 아주 특별하다.
지리산의 빼어난 산수와 풍광, 그리고 그 속에서 불법의 진리를 만나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3년(828년)에 인도의 덕운(德雲)스님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지리산에 천은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은사 중건 당시 지어진 극락보전 상량문에 의하면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 희종 건부2년(875년)에 연기(緣起 도선국사)가 가람을 창건하였고 후에 덕운이 증수하였다."
<唐 僖宗 乾符二載 緣起相形而建設 德雲因勢而增修.....>"
그런데 일제시대에 간행된 구례읍지에는 이 기록에서 창건주 연기는 도선국사의 별호인데 이것을 유래로 잘못 해석하여 도선국사 이후의 스님인
덕운을 창건주로 왜곡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들이 도선국사가 창건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 유학시 일행선사로부터 3천8백 비보사찰을 중건 혹은
창건토록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신라 조정에 긴밀히 모의하여 신라 국토 곳곳에 사찰과 탑을 건립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천은사도
바로 이러한 경우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렇게 볼때 인근 화엄사의 창건연대(544년)와 비교해 볼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기 보다는
중창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창건주에 대한 기록은 밝혀진 바 없어 그 시기와 유래를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절은 더욱 번성하여 충렬왕 때에는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지정되었다.
그후 계속해서 많은 수도자가 진리의 광명을 터득하는 수행처로서의 역할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절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고,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는 등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이후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610년(광해군 2년)의 일이다.
당시 절의 주지 혜정선사(惠淨禪師)가 소실된 가람을 중창하고 선찰로서의 명맥을 이끌어 나갔다.
뒤이어 1679년(숙종5년)에도 단유선사(袒裕禪師)가 절을 크게 중수했는데, 이로부터 절이름을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바꾸었다.
1715(숙종41년)에는 팔상전에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고, 1749년(영조25년)에는 칠성탱화를 조성하였다.
1774년(영조50년) 5월에는 혜암선사(惠庵禪師)가 그 전 해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전각을 중수하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하였다.
혜암선사는 수도암(修道庵)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남원부사 이경륜(李敬倫)에게 도움을 구하고 산내의 여러 사찰과 힘을 합쳐
2년간에 걸친 중창불사를 원만히 이루어냈다.
지금의 가람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모습이니 혜암선사의 중창은 절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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