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 여행] 영산강 제2경 몽탄노적(夢灘蘆笛), 그리고 무안 식영정(息營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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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 여행] 영산강 제2경 몽탄노적(夢灘蘆笛), 그리고 무안 식영정(息營亭)..

by 정산 돌구름 2016. 7. 8.

[무안여행] 영산강 제2경 몽탄노적(夢灘蘆笛), 그리고 무안 식영정...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 그리고 꿈여울 몽탄나루, 그 구비구비 감도는 곳에 늘어지가 있다.

식영정이 있는 언덕을 내려오면 몽산나루터, 이곳이 영산강 8경 중 2'몽탄노적(夢灘蘆笛), '이다.

몽탄노적은 꿈여울에 들리는 갈대 피리소리라는 뜻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강건너 나주에 진을 치고 후백제 견훤과 싸우다 퇴각하던 중 물이 범람한 영산강에 길이 막혀 위기에 처했다.

왕건이 잠깐 눈을 붙인 사이 꿈 속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하여 따라가보니 물이 빠지고 있었다.

황급히 영산강을 건넌 왕건은 강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뒤늦게 쫓아온 견훤군을 대파하였다고 한다.

그 강이 몽탄강(夢灘江)이고, 그 개울이 파군천(破軍川)이라고 한다.

그 기적의 기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영산강은 식영정 아래 유유히 흘러 서남해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37호로 지정된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배뫼 마을에 있는 식영정(息營亭)..

1630년 병자호란에서 돌아온 한호(閑好) 임연(林煉)이 여생을 보내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정자 옆에는 500년이 넘은 팽나무, 푸조나무 8그루와 그 아래로 몽탄강 푸른 물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임연이 벼슬을 마치고 여생을 보내며 후학을 양성했다는 점도 정자의 가치를 더해주고 건물도 수려하다.

담양의 용추계곡 용소에서 발원한 영산강이 광주, 나주를 거쳐 이곳으로 흐르는 몽탄강은 영산강의 마지막 여울이다.

식영정이 앞을 지나는 이 일대는 몽탄강이라고도 하고, S자로 굽이쳐 흐른다고 곡강(曲江)이라고도 한다.

정자에서 바라보면 왼쪽으로는 늘어지 마을이, 오른쪽으로 상몽탄, 장사리가 펼쳐지는데 강줄기는 식영정을 중심으로 길게

활처럼 휘어져 느릿느릿 흘러내린다.

몽탄강 건너 편에 들판은 안동 하회마을과 닮은 나주시 동강면 복룡봉추마을 들녘이다.

이 수려하고 장엄한 경관 때문에 식영정은 교촌리 유산정, 청계면 화설당과 함께 무안의 3대 정자로 꼽히기도 한다.

한호(閑好) 임연(林煉)은 이곳에 정자를 짓고 여유를 즐기며 시와 학문을 닦고 한가로움을 좋아하였다.

승문원 우승지, 영암군수와 진주목사, 남원 부사를 지낸 임연은 벼슬에 물러난 뒤 남은 생을 보낼 이곳을 찾아내고

"영산강 연안을 따라 살만한 곳을 찾아 상하를 두루 살펴보다 드디어 사포와 몽탄 사이에 한 오묘한 곳을 얻었으니 자리는

그윽해 기운이 머물렀고 물맛이 좋으며 땅은 비옥해 가히 선비가 살만하다"'복거록(卜居錄)'에 썼다.

식영정은 정면과 측면 각 3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정자 중앙에 방을 두고 삼면을 마루로 둔 구조다.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어 그 원형을 알 수 없는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통형의 둥근 기둥을 세웠다.

가구는 2고주5량 구조이며, 종도리와 주심도리는 굴도리로, 중도리는 납도리로, 마루는 판대공이다.

중앙의 마루방 3면에는 사분합문을 들쇠에 매어달게 돼 있으며, 후면 벽에는 다락이 가설되어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천장은 연등천장, 지붕의 네 귀는 활주로 받쳐져 있다.

특이하게도 식영정 현판 앞에 '연비어약(鳶飛魚躍)'라는 현판을 하나 더 달아두었다.

하늘에 솔개가 날고 물 속에 고기가 뛰어노는 것이 자연스럽고 조화로운데,

이는 '솔개와 물고기가 저마다 나름대로의 타고난 길을 가기 때문이다'라는 뜻이다.

만물이 저마다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전체적으로 천지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 자연의 오묘한 도(道)임을 말한다.

시경(經)에 대아한록(麓)에 (연비려천 어약우연)이 나온다.

즉,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고기는 뛰어 연못에 놀도다.'라는 뜻이다.

'식영(息影)'은 본래 '세상을 멀리한 음지에서 행적을 지우고 심신을 수양하면서 인간 본성을 지킨다'는 뜻이다.

담양 식영정과 달리 무안 식영정은 그림자 '()' 대신 경영할 '()'을 썼다.

 

 

 

 

 

 

 

 

 

 

 

 

 

 

 

 

 

 

 

 

 

 

 

 

 

 

 

 

식영정을 지나 늘어지마을로 발길을 옮기면 늘어지마을 표지석 앞에 최부의 묘와 사당이 있다.

늘어지 마을은 튀어나온 지형에 막혀 영산강 강물의 유속이 느려져 '늘어지'라고 했다고 한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꼭 한반도의 지형을 닮았다고 한다.

늘어지 마을 입구에 표지석과 정자가 있고, 정자 길건너 맞은편에 '표해록'의 저자 최부의 사당과 묘가 있다.

탐진최씨 최부의 묘는 언덕빼기에 있는데 멀리 몽탄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경관이 좋은 곳이다.

조선 시대의 문신이었던 금남(錦南) 최부(崔溥)는 1487년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갔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풍랑으로 중국 저장성 닝보부에 표류했다가 반년 만에 한양에 돌아와 왕명을 받고 <표해록()>을 썼다.

그는 수차()의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와 후일 충청지방의 가뭄 때 큰 도움을 주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참형을 당했다.

표해록(漂海錄)은 최부가 제주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14일간 표류하다 중국 절강에 도착한 뒤 항주, 소주, 양주, 산동,

북경을 거쳐 효종 황제를 알현하고 한양에 도착하기까지 6개월간의 기록을 담은 것이다.

또한, <표해록>은 9세기 중반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1298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과 함께 세계 3대 중국기행문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