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향연, 벚꽃이 만개한 지리산둘레길 2구간(운봉~인월)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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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지리산둘레길

봄의 향연, 벚꽃이 만개한 지리산둘레길 2구간(운봉~인월)을 걷다..

by 정산 돌구름 2016. 4. 13.
봄의 향연, 벚꽃이 만개한 지리산둘레길 2구간을 걷다..

 

○ 산행일자 : 2016년 4월 13일 (수)

○ 기상상황 : 흐리고 비 후 개임(아침에는 비가 내렸으나 차차 개여 낮부터 개임 11~17℃)

○ 산행코스 : 지리산둘레길 2코스(운봉~인월)

○ 거리 및 소요시간 : 10.16km / 3시간35분 소요

  운봉초교(10:45)~2코스 시작지점(10:50~55)~서림공원(10:57)~협동교(11:05)~신기교(11:15)~사반교(11:25)~

  비전마을(11:50~25)~군화동(12:40)~다이어트 하우스(12:50)~옥계호 둑(13:05)~방문자센터 갈림길(13:30~35)~

  흥부골자연휴양림(13:40)~월평(14:07)~구인월교(14:20)

○ 교통상황 : 광주 문흥(09:20)~88고속~인월IC~37번~구인월교(10:20), 인월터미널(10:35)~버스~운봉초교(10:45)

 

 

○ 지리산 둘레길 소개

  제2코스는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10km의 지리산길이다.

  이 구간은 오른쪽은 바래봉~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은 고남산~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로 옛 통영별로 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운봉~인월구간은 너른 운봉들녘을 따라 지리산 서북능선과 백두대간을 조망하며 호쾌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10km 전 구간이 제방길과 임도로 되어 길 폭이 충분히 넓어 여럿이 함께 걷기에 좋은 평지길이고, 황산대첩비, 국악의성지,

  송흥록 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즐기면서 걷기에 좋은 곳이다.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둘레의 전북․전남․경남 등 3개도, 남원․구례․하동․산청․함양 등 5개시․군의 21개읍․면 117개 마을을

  잇는 21개구간 274km로 지리산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형으로 연결하고 있으며,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잇고 보듬는 사람과 생명, 성찰과 순례의 길이기도 하다.

  전북 남원 46km, 경남 함양 23km, 산청 60km, 하동 68km, 전남 구례 77km 등 274km를 숲길(43.8%), 농로(20.8%),

  마을길(19.9%) 등으로 이어져 있다.

○ Prologue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일, 아침부터 빗줄기가 세차게 내린다.

 오전까지만 비가 내린다고 하여 빗줄기가 약해진 시간에 88고속도로를 타고 남원 인월면으로 향한다.

 구인월교옆 공터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운봉전통시장을 보고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운봉으로 가는 버스(10:35)가 있다.

 버스로 10여분을 달려 운봉초교 앞에서 내려 둘레길을 시작한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불고 안개가 낀 날씨, 둘레길 2구간 시점에서 서림공원에 이르니 람천을 따라 벚꽃이 만개하였다.

 벚꽃길을 따라 이어지는 2구간의 둑방길, 옥계천을 지나 숲길 임도로 들어서는데 안개가 자욱하다.

 봄 향기가 가득한 길을 따라 2코스를 마무리한다..

 

 

 

구인월교가 있는 람천가에 주차를 하고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한다..

 

장날인 인월전통시장..

인월전통시장은 조선 말기부터 농축산물 판매는 물론 생활필수품 물물교환이 행해졌던 5일장이다.

예로부터 지리산에서 채취한 산채·약초·한봉(토종)·한지·죽제품과 지리산 토종 흑돼지가 유명하여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19653월 장옥을 건립하면서 정식 시장으로 개장하였으며, 3일과 8일에 장이 열린다.

인월·운봉·아영·산내·마천을 비롯하여 장수군 번암면, 함양군 함양읍의 주민들도 이용한다..

 

인월버스터미널에서 망원해 버스를 타고 운봉초등학교 앞에서 하차한다..

 

1907년 8월 23일을 설립된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학교이다..

 

운봉읍 시가지..

1995년 3월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동쪽은 동면·산내면, 서쪽은 산동면·이백면, 남쪽은 주천면, 북쪽은 아영면·장수군

번암면과 접한다. 동쪽에 덕두산(1,150m)·바래봉(1,165m)·세걸산(1,207m) 등 1,000m 이상의 지리산 자락이 서북능선,

서쪽에 고남산(846m)·여원치 등이 솟아 있다.

지형적 영향으로 고랭지 기후를 나타내어 눈도 많이 내리고 여름철도 서늘하여 25℃ 이상의 기온이 드물다.

운봉이라는 지명은 백두대간 동쪽 사면에 위치한 이곳에서 구름에 가려진 지리산의 많은 봉우리를 보게 된 데서 생긴 것이다.

또, 고을의 지형이 중국 송나라의 ‘운봉’이라는 고을과 비슷하여 그곳의 지명, 하천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고 한다.

옛날 삼국시대는 신라의 국경요새지였고, 운봉이 행정상 군(郡)이었던 1913년까지만 해도 서천리는 군청소재지였던 곳이다..

 

활짝 핀 꽃무리..

 

철쭉도 봉우리를 맺혀있다..

 

 

24번 국도를 건너면 2구간의 시작점..

 

지리산둘레길 제2구간은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10.3km구간으로 오른쪽은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로

옛 통영별로 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너른 운봉 들녘을 따라 지리산 서북능선과 백두대간을 조망하며 호쾌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2구간 시작점에서 서림공원을 향해 출발한다..

 

람천을 따라 이어지는 벚꽃길..

 

‘악한 기운을 막는다’는 뜻의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라는 글을 새겨 놓았는데, 남·여 모두 수염이 달린 것이 특이하다.

마을 수호의 신앙적 의미 외에도 서민들의 소박한 표정이 사실적이어서 연구자료로 가치가 있다..

악한 기운을 막는다는 석장승인 진서대장군..

높이 207cm, 둘레 141cm, 너비 53cm로 수염과 귀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쪽 방위를 어루만지고 눌러서 편안하게 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머리에는 머리 크기보다 다소 작은 벙거지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둥근 눈에 속눈썹이 깊게 새겨져 있고, 주먹코에 귀가 달려 있는 모습이다.

길게난 수염은 오른쪽으로 휘어지게 표현하였는데, 가슴 부근까지 드리워져 있다.

전체적인 인상은 화가 나 있지만 그 안에는 어리숙함과 익살스러움이 담겨져 있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신앙적 의미 뿐만 아니라 사람의 표정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70년 중요민속자료 제20호로 지정되었다돌장승이 만들어진 연대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조선시대로 추측된다..

 

길 건너편 북쪽에 마주하고 있는 방어대장군은 남신상이며,

높이 220cm, 둘레 126cm, 너비 45cm이고 귀가 없으며 수염이 한 가닥 있다..

 

서천리당산이 있는 서림공원..

예전에는 마을사람들이 장승앞에서 제를 지냈는데 1977년 당산나무를 심은 이후로 그 앞에서 먼저 지내고 나서 돌장승에게도 간단하게 올린다. 당산나무는 귀목나무이며, 그 둘레가 126cm이다.

보통 음력 정월 초하룻날 제를 지냈는데 당산나무를 심고부터는 음력 2월 초하루에 지내면서 마을총회를 겸하고 있다.

제물은 마을회관과 창고 임대료, 행사 등으로 얻은 수익으로 마련한다고 한다.

남원시에서 20km 지점에 위치한 운봉읍은 옛날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국경 요새지였다..

 

서천이 흐르는 서림숲은 마을 휴식처로 이용되었으며,

마을을 수호하는 석장승과 비석군도 있어 서천리의 역사와 전통을 말해 준다..

 

서림교 옆 둑방길을 따라 벚꽃이 만개하였다..

 

 

 

서림공원에서 둑방길을 따라 이어간다..

 

벚꽃과 함께..

 

람천을 따라 이어가는 길..

 

서림공원에서 비전마을로 이어지는 5km의 제방길은 너른 운봉 들녘을 적시는 젖줄인 람천을 따라 걷는 길로

천연기념물인 수달과 원앙 외에 여러 종류의 동식물을 볼 수 있다..

 

협동교를 지나고..

 

람천을 가로지르는 신기교를 건넌다..

 

 

길가의 조그만 동산.. 작은 동산이 제법 거창한 이름과 유래를 가지고 있다..

원래 거북바위가 있어 귀암(龜巖)이라 불렀는데 풍수지리상 이 마을이 와우혈이라 소가 먹는 풀(밥구시)을 의미하는 초봉으로 바꾸었다 한다.

초봉(草峯)이라는 표석이 각인되어 있다..

 

신기마을로 들어서는 사반교..

 

신기마을..

 

유유히 흐르는 람천.. 남원 운봉읍·인월면·산내면 일대를 지나 경남 함양 마천면에서 임천에 합류되는 2급 하천이다.

지리산 북서 사면에서 발원되는 주촌천, 운봉천, 준향천 등의 소하천이 합쳐져 람천이 형성된다..

 

비전마을 입구의 동편제 쉼터..

 

다리를 건너면 황산대첩비지가 바라보인다.

사적 제104호로 지정된 황산대첩비지는 고려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한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서 있던 곳이다.

황산은 운봉면소재지로부터 동쪽으로 약 8떨어진 높이 695m의 바위산인데, 이 산의 협곡에서 1380(우왕 6)

삼도순찰사의 임무를 띠고 온 이성계는 배극렴·이두란 등 휘하의 여덟 원수를 거느리고 함양으로부터 공격해오는 왜구들과

일대격전을 벌여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어휘각(御諱閣)은 운봉읍 화수리 석벽에 도원수가 본인과 8원수 4종사의 명단을 새기게 하여 황산대첩이 자신만의 공로가

아니라 여러 충신들의 공로임을 알리는 내용의 어휘(御諱)를 새겨 만든 비전(碑殿)이다.

1945117일 일제가 비전을 폭파하고 어휘(御諱) 새긴 내용을 철정(鐵釘)으로 쪼아버려 그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1973년 다시 어휘각을 건립하여 비록 훼손되었지만 글씨가 새겨진 돌을 보존하고 있다.

어휘각은 정면 4, 측면 1칸 맛배지붕 형태에 두리기둥이다.

특이한 것은 절벽에 새긴 글씨를 보존해야 하였기 때문에 어휘각은 정면 앞 기둥 네 개는 길고 뒷면 기둥 네 개는 짧다..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는 1380년(우왕6년) 이성계, 이두란장군이 황산에서 왜적 아지발도(阿只拔都)군을 물리친 황산대첩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1577년(선조10년)에 세운 승전비로 높이 4.25m이다.

김귀영(金貴榮)이 비문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을 쓰고, 남응운(南應雲)이 글을 새겼으며, 박광옥(朴光玉)이 세웠다.

비각은 1667년(현종 8년)에 현감 허제(許濟)가 건립하였으나 비는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파편만 남아있었다.

1957년에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그대로 이용하여 본래의 좌대를 세우고, 1973년 보호각을 세웠다.

중건된 비는 쌍귀(雙龜)를 떠서 새겨진 듯하며, 본래 모양의 높이·너비·두께 등은 정확히 고찰할 수 없다.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옛날 태조가 승전한 황산이 시대가 흐르고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청에 따라 왕명으로 건립하였음을 비롯, 이성계가 10배의 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는 명문 등이 실려 있다.

글씨는 오로지 조맹부(趙孟頫)의 글씨체를 닮은 것으로 결구에 허한 곳이 많고 필력도 주경하지 못하다.

<동국금석평 東國金石評>에 그의 글씨를 비(肥)와 속(俗)으로 평하였는데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황산대첩사적비는 청일전쟁(淸日戰爭) 때 파손·도괴되었다가 1957년 재건하였으나 비신은 여러 조각으로 깨어지고

비문 또한 거의 마멸되었으므로 오석(烏石)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비를 문화재로 지정하였던 것을 해제하고 대신 1963년 사적 제104호로 비지를 지정한 것이다..

 

파비각(破碑閣)은 1977년 건립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고려 말 이성계가 남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를 황산에서

격퇴한 전공을 기록한 황산대첩비를 파괴하였는데 파비각에는 그때 파괴된 황산대첩비의 일부 파편들이 보관되어 있다.

194311월 조선총독부는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라는 공문을 각 도의 일본인 경찰부장들에게 발송해

조선의 일본관련 비석들을 찾아내 없애라고 지시했다. 그때 일본경찰들은 황산대첩비를 비롯한 전국의 일본 관련 전승비와

대첩비 20여 기를 깨부수고, 비석의 비문을 정으로 쪼아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비전마을 정자에서 잠시 쉬어간다..

황산대첩비가 세워지고 이 비각을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이 비() 앞에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비전(碑前)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마을 5리 전에 하마정이 있어 말을 탄 관리가

황산대첩비를 지날 때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 이 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와 비 앞에서 절을 하였다..

 

송흥록과 박초월 생가터..

 

잠시 안으로 들어선다..

 

이곳에는 구한 말까지 2층 정자가 있어 주변의 주막과 기녀(기생)와 소리꾼, 가마꾼(轎軍)이 상주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전을 역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송흥록(宋興祿) 생가터..

남원시 운봉 출생인 송흥록은 8명창의 한 사람으로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았다.

판소리의 중시조(中始祖)로서 모든 가조(歌調)를 집대성하는 한편, 매부인 김성옥이 시작한 진양조를 자신의 노래에 도입,

완성하였다. 그의 창법은 발성초(發聲初)가 극히 신중하였고, 웅건·청담한 창법을 가진 동편제(東便制)를 이룩하였다.

특히 춘향가 중의 옥중가(獄中歌)와 변강쇠타령, 적벽가(赤壁歌) 등을 잘 불렀다.

기량이 출중하고 판소리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기에 독보건곤(獨步乾坤)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신재효도 그를 시중천자로 꼽히는 이태백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모든 판소리에 뛰어났으나 그중 변강쇠타령·춘향가·적벽가를 잘하였는데 특히, 춘향가 옥중가는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또한 동편제 판소리를 확립하여 동편제 소리의 시조로도 꼽히며, 그의 소리는 동생 광록과 수제자 박만순에게 전승되었다..

 

박초월 생가..

본명은 삼순(三順), 아호는 미산(眉山), 순천 주암면 봉암리에서 태어나 남원시 운봉면 갈계리에서 성장하였다.

김정문·송만갑에게서 판소리를 배웠고, 임방울(林芳蔚정광수(丁珖秀)에게서도 배웠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은 목소리에 성량도 풍부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다.

1930년 전주의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 뒤 여러 음반회사와 계약을 맺고 흥보가·심청가·춘향가 등을 취입하였다.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 참가하여 여러 선배명창들과 창극운동에 참여하였다. 광복 후 여성국극동지사를 창단하였고,

1955년에는 현재의 서울국악예술학교 모체인 한국민속예술학원을 박귀희와 함께 설립하고 교사로서 많은 신인을 양성하였다.

1966년부터는 집에 당대의 명창 156위의 신주를 모셔놓고 매년 제사를 지내는 정성을 보였다.

196410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보유자로 지정을 받았고, 197311월에 수궁가의 보유자로도 지정을 받았다.

현대 여류 판소리 명창으로서, 김소희, 박록주와 함께 1930년대부터 우리나라 여류 판소리를 대표해 온 인물이다..

 

 

생가터를 나와 다시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람천을 따라 이어지는 길에는 벚꽃 터널이다..

 

 

 

 

 

 

 

 

비전마을 느티나무 앞을 지난다..

 

다시 이어지는 둑방길..

 

만개한 벚꽃, 푸르름을 더해가는 들판, 어느덧 봄은 우리 곁에 찾아와 있음을 실감케 한다..

 

운무에 잠긴 황산(荒山)과 군화마을..

해발 698.4m의 황산은 동부의 인월 및 아영분지와 서부의 운봉분지를 연결하는 길목의 산정부로 전망과 목이 좋은 전략적

위치에 있다. 덕두산과의 구조선이 동서로 통과하면서 운봉의 물줄기인 남천이 빠져나가는 목이다.

1961년 대홍수 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들의 가옥을 군인들이 주둔하며서 13가구를 건립하였는데,

이주 후 마을 이름을 ‘군인들이 지은 화수 마을’이란 뜻으로 군화동(軍花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군화마을 입구의 느티나무 쉼터..

 

길가에 나무대각세존 석가모니불이 있다..

 

24번 국도를 건넌다..

 

24번 국도에서 바라본 다이어드하우스..

 

인월전통시장 방향을 따라 이어간다..

 

활짝 핀 개나리..

 

다이어트하우스를 지나 옥계호 방향으로 오른다..

 

옥계호의 수로..

 

노란색의 염주괴불주머니..

 

길가의 반사경..

 

운무에 잠긴 옥계호..

옥계저수지는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축조한 저수지로 1991년 착공하여 1997년 준공되었다..

 

숲속으로 나 있는 임도, 포장마차는 굳게 문이 닫혀있다..

 

 

자욱한 안개..

 

 

 

숲속의 조그만 둠벙..

 

능선 마루 쉼터에서 잠시 쉬어간다..

 

자연휴양림에 내려서면 박을 타는 흥부가족...

 

흥부골 자연휴양림 안내도..

 

 

 

흥부골 자연휴양림은 1997년 조성되기 시작하여 약 1㎢에 2002년 개장하였다.

단체수련동(2동)·숲속의집(7동)·방갈로(3동)·취사장·공동샤워장·급수대, 향토민속놀이마당·교육자료관 등 총17동이 있다.

덕두산(德頭山, 1,150m) 정상까지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휴양림에서 덕두산 정상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산자락에 수령 약 55년의 잣나무 군락이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 좋고, 경관 또한 뛰어나다..

 

 

길가의 달오름길 민박집 안내..

 

진달래가 만발한 오솔길, 

 

월평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고사리밭을 지나 내려서면 월평마을로 들어선다..

 

금낭화..

 

아름다운 갤러리카페..

 

월평마을..

운봉에서 박씨가 처음 입주하고 새마을 신촌으로 불리다가 후에 마을 형국이 반월형이라 월평(月坪)이라 불렀다.

또는 마을 터가 동쪽 팔랑치를 마주하고 있어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는다하여 월평이라고 하였다..

 

 

월평(月坪)이란 마을 이름이 말하여 주듯이 ‘달이 뜨면 바로 보이는 언덕’이란 뜻으로 월평이라 하였다..

 

1800년대 후반 천석꾼이 운봉 박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사람을 모아 살기 시작하였다..

 

 

 

 

 

 

월평마을을 지나 2코스의 종점이자 3코스 시작점인 구인월교에 이른다..

 

인월면은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서울, 남원, 함양 등지에서 접근이 쉽다.

인월에서 비전마을로 가는 길은 조선시대의 7대 대로중 하나인 통영별로의 일부로 이 길은 비전에서는 여원재를 거쳐

남원, 오수, 전주를 거쳐 서울로 이어지고, 인월에서는 팔랑치, 함양을 거쳐 진주로 이어지던 옛길이다.

 

 

 

 

 

월평마을 람천변에 자리잡고 있는 영월정(迎月亭)..

이 정자를 짓게 된 유래는 1380(우왕 6년)에 당시 3도 도원수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섬멸할 때,

어느 날 밤 너무 어두워 적을 탐지하기 어렵자 하늘을 우러러 달뜨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밝은 달이 떠올라 적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이를 기리기 위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상량문에 의하면 단기 1960년 정월에 중건하였다. 팔작지붕으로 겹처마 양식의 동향이며, 규모는 정면 3, 측면 2칸이다..

 

인월을 가로지르는 람천에 영월대(迎月臺)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있다고 전해오는데

이를 인월8경이라고 한다.

인월8경은 황강폭포(荒崗瀑浦), 고역연람(古驛煙嵐), 층층괴석(層層怪石), 뇌뢰반암(磊磊盤岩), 풍천어적(楓川漁笛),

월평농가(月坪農歌), 삼봉낙조(三峰落照), 백장효종(百丈曉鐘)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