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의 아름다운 풍경, 목포 유달산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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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산행2015

석양의 아름다운 풍경, 목포 유달산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야경..

by 정산 돌구름 2015. 6. 11.
석양의 아름다운 풍경, 목포 유달산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야경..

 

○ 산행일자 : 2015년 6월 10일(수)

○ 기상상황 : 구름 조금 맑음(26~30℃)

○ 산행코스 : 유달산주차장~노적봉~마당바위~일등바위~이등바위~달성휴게소~주차장(전남 목포)

○ 거리 및 소요시간 : 3.26km(GPS), 1시간40분소요

  유달산주차장(19:00)~노적봉(19:05)~종각(19:07)~대학루(19:05)~달선각(19:20)~유선각(19:25)~애기바위(19:30)~

  마당바위(19:35)~일등바위(19:45~20:00)~보리마당(20:05)~소요정(20:05)~이등바위(20:10~20)~달성휴게소(20:30)~

  유달산주차장(20:40)

 

 

○ 유달산 소개

  삼학도, 갓바위와 함께 전남 목포의 3대 관광 명소인 유달산(儒達山, 228m)은 기암절벽이 첩첩하여 "호남의 개골" 이라고도 하며,

  목포 8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정상에 서면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으며, 예부터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靈達山)이라 불렸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봉우리가 마치 쇠가 녹아내리는 듯한 색으로 변한다 하여 유달산(鍮達山)이라 하였다.

  이후 구한말 대학자인 무정 정만조가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유달산에서 시회를 열자 자극을 받은 지방 선비들이 유달정

  (儒達亭) 건립을 논의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산 이름도 유달산(儒達山)이 되었다.

  노적봉을 비롯하여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하여 이름 붙여진 해발 228m의 일등바위(율동바위)와 심판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하여

  이름 지어진 이등바위(이동바위)로 나눠진 유달산은 갖가지 기암괴석과 병풍처럼 솟아오른 기암절벽이 첩첩하며, 그 옛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봉수를 올렸던 봉수대와 달성사, 반야사 등의 전통사찰을 볼 수 있다.

  유달산(儒達山)은 온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바위산이다.

  날카로운 암봉들이 많은 유달산은 악하고 모난 기운을 없애려고 많은 나무를 식재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바위와 수목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산마루마다 칼날 같은 암봉들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어 목포 사람들의 단단한 기개를 보여주는 듯하다.

  자연의 기묘한 조화로 만들어진 유달산의 수많은 기암괴석들은 오랜 세월동안 전설과 사연을 간직하면서 오늘도 목포를 굽어보고 있다.

○ Prologue

  수요일 퇴근 후, 석양을 볼 겸 유달산에 오르기로 마을먹고, 해질녘 잠깐 시간을 내어 유달산에 오른다.

  유달주차장에서 노적봉을 거쳐 주능선을 따라 일등바위에 오르니 해는 석양에 기울어져 금방 넘어걸듯 아름다움을 뽐낸다.

  구름이 조금 낀 날씨였지만 서쪽 하늘에는 구름이 걷혀 일몰의 장관을 연출한다.

  목포대교와 다도해의 섬들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의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본다.

  어둠이 내리고 목포대교의 조명이 서서히 밝히기 시작하여 이등바위에 오른다.

  이등바위에서 바라보는 목포대교의 야경 또한 아름답다. 어둠 속에 가로등 불빛을 따라 난공원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한다.

  오는 길목에 영산로와 영산로59번길에 설치된 조명을 잠시 담아본다..

 

 

해질녘의 유달산 주차장은 한가하기만하다..

유달산 정상인 일등바위와 멀리 이등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차장 옆 커피가 맛있는 집..

 

커피숍의 벤치쉼터..

 

노적봉과 이순신장군 동상..

 

유달산 등구인 노적봉 앞에 이른다..

해발 60m의 바위산 노적봉은 원래 유달산의 한 봉우리였다고 하는데 일정감정시기에 일본인 거주지와 구 시가지를 연결하기 위한

길을 만드는 과정에서 노적봉은 유달산 능선에서 섬처럼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유달산 등구..

 

목포의 명물인 노적봉 다산목(多産木)..

이 나무는 이곳에 무성히 자라 있는 풀을 깎던 중에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여자의 하체를 영락없이 닮았다.

1900년대 유달산 아래 목포시 죽교동의 한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이 나무의 사연이 구전되어 오고 있다.

원래 이 나무는 맨 처음 발견된 어미목을 일컫는 말로 여한목(女恨木, 한스러운 여인나무)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1910년 여한목에서 뻗어 나온 새끼목을 다산목(多産木)이라고 하였다.

2000년부터 목포시가 이 기괴환 모습을 한 새끼목을 여인나무라 부르다가 전해오는 설화에 따라 다시 2007년 공식적인 나무명으로

다산목(多産木)이라고 정하여 현재 목포의 관광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다산목(多産木)의 전설..

새우젓의 60%를 전국에 공급해 오던 전남 신안군 임자도 전장포의 한 어부 가족이 있었다.

어부의 아내는 18세에 시집온 후 무려 16명의 자식을 두었다.

식솔이 너무 많아 먹고 살기 힘들자 남편과 사위 한명이 돈을 잘 벌 수 있는 홍어 잡이를 위해 흑산도로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홍어를 만선하여 돌아오는 도중 거센 풍랑에 배가 침몰하여 둘다 죽고 말았다.

비보를 접한 어부의 아내와 죽은 사위의 배필인 딸은 각각 남편들이 반드시 살아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처음엔 딸의 한쪽 다리가 성치 못해 어머니 혼자 인적이 드물고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유달산 노적봉 옆 언덕에서 어선들이

돌아오는 고하도 쪽 길목을 지켜보았다. 남편이 올까 사위가 올까 몇날 몇일을 기다리다 지친 그녀는 결국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고

얼마 후 기괴한 여인의 모습을 한 여인나무(어미목)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남편을 기다리던 딸은 어머니마저 돌아오지 않자 아픈 다리를 붙들고 길을 나섰다.

결국 어미목이 있는 곳에 이르러 어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딸은 그 자리에서 한스러운 세상과 여인의 모든

수치심을 버린채 생을 포기하고 현재의 기괴한 모습으로 죽고 말았다.

딸은 어미목에서 뻗어 올라 자라온 새끼목이 되었는데, 이 나무를 오늘날 다산목(多産木)이라 부른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사위를 죽어서까지 지금도 두 모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신비로운 모습의 다산목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두 여인의 진정한 사랑의 마음, 가정의 편안을 기원하는 애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다산목을 지나 시민의 종각으로 향한다..

 

시민의 종은 새로운 21세기를 기념하기 위해서 목포시의 새 천년 출발 기념 사업으로 98년부터 기획·추진하였고,

2000년 10월 1일, 3년 만에 제작을 완료하고 유달산 노적봉 옆에 종각의 건립과 함께 설치되게 되었다..

 

사실 제작 논의가 있던 당시에는 예산낭비라는 이유로 반발도 심했으나,

목포시에서는 21세기 국가와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남북 통일과 동서화합을 기원하고,

또한 목포가 한반도의 동맥인 국도 1·2호선의 시발점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아서 후손에게 물려줄 훌륭한 유산으로 남기고자

1999년 행정인센티브 평가결과 최우수 시로 선정되어 수상한 사업비중 6억원으로 제작하였다..

 

전체 중량은 21톤, 직경 2m 29cm, 길이 3m 90cm 이며 서울대학교 정밀기계설계 공동연구소에서 제작 설계를 하였고,

종의 몸통부분은 서예가로 명성이 높은 여초 김응현 선생의 글씨를 새겼다.

전통적인 종의 역할은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人定, 밤 10시)에 일월성신을 상징하는 의미로 동서남북 각 7번씩 28번의 종을 쳤고,

그 반대로 아침이 밝았음을 나타내는 파루(罷漏, 새벽 4시경)에는 일월성신을 상징하는 28번에 음양오행을 추가하여 33번을 쳤다.

보신각의 경우도 조선시대부터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제야의 종을 33번을 치고 있으며,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지도자 33인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목포 시민의 종은 21세기의 희망을 상징하는 의미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21번 타종하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다..

 

종각의 현판은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썼다..

 

시민의 종각에서 바라본 노적봉과 유달산..

 

구 중앙시장에 새롭게 들어선 31층의 주상복합 LH트인스타..

 

노적봉을 한바퀴 돌아 유달산 등구로 올라선다..

 

입구의 유달산공원안내도..

 

목포개항 110주년기념으로 세운 유달산정기 표지석..

 

계단위에서 바라본 노적봉..

전해오는 말로는 일본인들이 유달산에서 내리 뻗은 노적봉의 맥을 끊기 위해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은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덮어 군량미로 가장한 후 석회가루를 바다에 뿌려 뿌연 쌀뜨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적을 속이고,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허수아비를 곳곳에 세워놓아 전의를 상실한 왜군이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로 노적을 쌓았다고 하여 노적봉이라 불렸다고 한다..

 

노적봉 정상 큰바위얼굴..

큰바위얼굴은 사진으로 찍어 90도를 회전할 경우 사람의 얼굴 윤곽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순신장군이 호령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큰바위 얼굴은 맞은편 이순신 장군 동상과 함께 서남해안의 관문인 목포를 수호하고 있다.

노적봉의 기를 받으면 건강에도 좋다고하여 다산목과 함께 소원을 빌기 위해 찾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

 

쥐바위, 탕건바위로 불리는 복바위..

마치 쥐 한 마리가 바위를 타고 있는 듯한 모습이 아주 사실적으로 펼쳐진다.

이 바위를 사람들은 쥐바위라고 부르는데 노적거리 앞에는 쥐가 살아야 한다고하는 풍수설의 설명과 맞아떨어지는 바위인 것이다.

반면 옆에서 볼 때는 노적봉을 향해 두 손을 내려놓고 기도하는 복을 비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어 ‘복바위’라 부르기도 하고,

옛날 어른들의 탕건과 같다하여 ‘탕건바위’로도 불린다..

 

유달산공원 중앙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이 목포를 수호하듯 서있다.

충무공 정신 구현을 위해 1974년5월20일 총 209명으로 된 이충무공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1974년8월15일 세워졌다.

비명은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를, 탁련하(卓鍊河)선생의 조각을, 이은상·최순우·최영희 선생의 사료에 의한 고증 및 심의를 거쳐,

1974년 문화공보부 등록 제1호가 되었다고 한다..

 

유달산의 루각중 가장 먼저 맞이하는 대학루(待鶴樓).. 바로 옆에는 오포가 있다..

 

오포는 1909년 4월, 목포시민에게 정오를 알리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최초의 포는 조선식 선입포로 1671년(현종10년) 제작되었으며, 높이 5자, 구경3치5푼, 중량 733근으로 1회 발사하는데

화약 30량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에서 옮겨와 천기산에서 시험발포 했는데 발포 때마다 뒤로 밀려나가는 구식이었다.

1913년 가격 160원에 일본식 야포로 대치되었고 이전의 조선식 대포는 일제의 송도신사(목포시 동명동소재)에 보관하던 중 일제말에

태평양전쟁을 위해 일본정부가 공출해 가져가 버렸다.

예전에 이 오포는 포탄없이 화약만 넣어 포를 쏘아 시민에게 정오를 알리는 기능을 하였는데 전쟁도구를 생활도구로 이용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며 지금도 목포토박이들은 이 오포소리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1986년 지방문화재자료 제13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의 이 오포는 같은 해 현충사 박물관에 전시된 천자총통을 복제한 모형이다..

 

대학루에서 바라본 목포항과 삼학도..

 

온금동 아리랑고개로 이어지는 영산기맥의 끝자락..

 

목포시가지..

 

어린이헌장탑을 지나 오르면 암반 위에 목포가 낳은 국민가수 이난영(본명 이옥례)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다.

노래비에는 사시사철 이난영의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녹음 장치를 해 놓았다.

<울밑에 선 봉선화>는 가곡으로 당시 우리나라를 상징하였고, <목포의 눈물>은 유행가로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는 노랫말이 되었다.

유달산 기슭에 세워진 이 비는 1969년6월10일 목포악기점을 하는 박오주(朴午周)씨가 기증하여 세워졌는데

이 노래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로서 더욱 의미가 있다.

1934년 조선일보에서 전국 6대 도시를 대상으로 한 향토노래 공모를 했다.

이때 목포에서 응모한 문일석(본명 윤재희)의 <목포의 노래>라는 작품이 전국 신민요가사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선정되자,

당대의 유명한 손목인 씨의 작곡을 거쳐 <목포의 눈물> 이라는 노래로 탄생한 것이다.

이 노래는 1935년에 발표되어 일제 수탈의 서러움으로 응어리진 2천만 온 겨레의 심금을 울림으로써

가수 이난영을 전 국민적인 불멸의 가수로 기억되게 하였다..

 

잠시 오르면 달선각(達仙閣)..

1959년8월15일 시민의 휴식처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입구에서 유선각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중간에 루각을 세울 것을 결의하였고,

준공일이 8월15일 즈음이라 해방14주년(광복절) 행사와 함께 기념식을 가졌으며, 면적 42㎡, 육각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목포시가지 풍경과 멀리 압해대교..

 

달선각을 지나면 목포천자총통 유달산 체험장이 나타난다.

이 체험장은 시민과 관광객이 천자통통을 발포하고 의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장소이다.

천자총통 체험은 「목포 유달산 체험 프로그램」 또는 목포시청 사이트에서 신청 가능하며,

목포 유달산 체험 프로그램 사이트에는 천자총통에 관련된 다양한 자료와 채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가정을묘명천자총통은 이름 그대로 중국 가정(嘉靖) 년간 을묘년(1555)에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는 천자총통을 말한다.

조선시대 중기에는 물건을 세거나 순서를 말할 때, 천자문(千字文)의 순서에 따라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그 순서를 표기한 방법에

따라 이 총통이 조선시대 가장 큰 총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천자총통은 최무선(崔茂宣)이 고려말에 이미 제작하였던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발전시킨 것이다.

장군화통(將軍火筒)도 이 천자총통의 전신(前身)이다. 천자총통의 제원에 관한 문헌기록은 <융원필비>와 <화포식언해>에 남아있다.

발포체험은 주말 및 공휴일, 축제기간 등 오전 11시~오후 1시(발사는 12시)에 행해지는데 참가비는 1팀(3,4명) 2만원이다..

 

잠시 올라서면 유선각(儒仙閣)..

유달산에 세워진 대학루·달선각·유선각·관운각·소요정·팔각정 등 6개의 정자 중 하나로 유달산 중턱에 있다.

목포의 최고 전망대로 알려진 정자로, 이곳에 서면 목포항과 목포시가지, 삼학도, 영산호, 다도해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932년 목포 개항 35주년을 기념하여 세웠다가 태풍으로 인해 무너져 중건하였고,

중건한 건물도 퇴락하자 1973년8월1일 옛 모습 그대로 개축하였는데 원래는 목조건물이었으나 현 건물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전통적 건축양식을 갖춘 누각(樓閣)이다.

한말의 유학자로 시문에 능했던 무정 정만조(鄭萬朝)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유달산에서 시회(詩會)를 열고 시를 읊었던 곳이라 하여

유선각(儒仙閣)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누각 전면에 걸린 현판의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해공 신익희(申翼熙)가 유달산에 들렀다가 기념으로 남긴 것이다.

유선각 앞쪽 암반에는 1973년 개축 때 세운 유선각 표비가 있다..

 

유선각을 지나면 바람골쉼터.. 좌측은 아리랑고개, 우측은 달성사로 내려서는 갈림길이다..

 

우측 아래로는 목포시의 대표 사찰, 달성사(達聖寺)..

달성사는 목포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유달산 동남쪽 중턱에 위치하며, 대한불교조계종 대둔사의 말사로 전통사찰 제69호이다.

문화재(전남 유형문화재 제228호, 제229호)를 보유하고 있는 목포에서 유일한 사찰이다.

대웅전 옆에는 달성사 창건주인 노대련선사를 기리기 위한 창건주노대련선사창공비(創建主盧大蓮禪師彰功碑)가 세워져있다..

 

오르는 길목에 바라본 유달산 정상과 이등바위..

 

당겨본 목포 삽진산단과 압해대교..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 전망데크..

 

전망데크에서 바라본 달성사, 목포 8경에 속하는 풍경이 달사모종(達寺暮鐘)..

지옥까지 소리 들려 해가 저물 즈음에 들리는 종소리다.

오전 28회, 저녁 33회의 소리가 달성사 마당부터 은은하게 퍼진다.

28회 종소리는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을 합한 것으로 종소리가 세상에 울려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한다는 뜻을 담고있다.

33회의 종소리는 지옥까지 소리가 퍼진다는 의미가 있다..

 

능선상의 애기바위.. 관운각 맞은편에 있는 바위로 ‘애기바위’, ‘큰 엄씨·작은 엄씨바위“라고도 한다.

높이 솟아있는 두 개의 바위 주변에는 여러 개의 바위들이 널려 있으며, 조금 아래의 남쪽에는 몇 개의 벤치가 있다.

큰 엄씨가 애기를 업고 작은 엄씨에게 등을 돌리고, 작은 엄씨도 애기를 업었는데 큰 엄씨를 보려고 하는 형상이다.

이곳은 마당바위로 오르는 능선이 남동쪽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어 두 엄씨는 거센해풍을 등지고 애처롭게 서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조대바위는 애처롭게 서 있는 애기바위 뒤편 아래쪽에 있다.

고하도 앞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팔짱을 끼고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낚시꾼을 보는 듯하다.

등뒤의 큰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모양인데 네 개의 바위가 합쳐져 이러한 모양을 만들어 냈다.

이곳에서는 다도해의 잔잔한 바다와 길게 늘어진 고하도, 옹기종기 모여있는 온금동 마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으며,

안개자욱한 날에 바라보면 더 이채롭다고 한다..

 

조대바위에서 바라본 목포항 국제여객선터미널..

 

영산기맥의 끝자락과 신안비치호텔, 그너머로 고하도와 허사도, 영암 삼호중공업, 그 뒤로 화원반도..

 

손가락바위와 목포대교..

 

 

당겨본 목포대교..

 

이등바위, 목포 구도심과 압해대교..

 

관운각에서 바당바위로 오르는 길에 있는 바위로 크고 작은 장방형의 네모 반듯한 두 개의 바위가 입석바위이다.

일등바위의 능선에 걸쳐있는 이 바위는 바위능선의 지질변화 과정 중 수직으로 절리되어 기둥처럼 우뚝 서 있게 된 것이다.

정면에서는 사각기둥 모양의 평범한 입석으로 보이지만 옆면이 길에 뻗어있어 상당한 규모임을 자랑하고 있다..

 

관운각..

 

마당바위에 올라서면 기괴한 손가락바위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목포의 어느지역에서나 보이는 것으로 유달산의 상징적인 바위라 할 수 있는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차이가 난다.

약속하자는듯 새끼손가락을 내세우는 것도 하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유달산 바위중 내가 최고라고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늘을 향해 치켜세운 이 손가락 바위가 워낙 반듯하여 아무리 암벽을 잘 타는 전문가라도 장비 없이는 오를 수가 없다..

 

목포대교와 고하도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마당바위..

어른 10명이 앉아서 쉴 정도의 마당같이 넓은 바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당바위로 오르는 길은 계단을 만들기 힘들어 바위의 능선을 계단모양으로 깎아 내고 시멘트를 발라 만들었다..

 

내려서는 길목의 인동초..

 

다시 가파르게 올라 일등바위 앞에 이른다..

 

해발 228m의 유달산 정상 일등바위...

오랜 옛날 사람이 죽으면 이 일등바위(율동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이등바위(이동바위)로 옮겨져 대기하고 있다가,

극락세계로 가는 영혼은 3마리의 학(삼학도)이나 고하도 용머리의 용을 타고가고, 용궁으로 가는 영혼은 영달산(유달산)에서

조금 떨어진 거북섬(목포와 압해도 사이에 있는 섬)에 있는 거북이 등에 실려 용궁으로 간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어느덧 해가 서해바다로 가라앉고 있다..

 

아름다운 낙조를 한없이 바라본다..

 

시간을 맞추어 정상에 올라선 탓에 바로 낙조를 볼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유달산은 영산기맥의 큰 줄기가 무안반도 남단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유달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영산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끝인 산이다..

 

 

 

 

 

 

 

 

 

일등바위에서 내려서 이등바위를 향해 가다보면 흔들바위가 보인다.

급하게 경사진 암반 끝에 있어 실바람만 닿아도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흔들바위는 장정 대여섯명이 올라갈 수 있는 평평한 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 올라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재미도 뛰어나다..

흔들바위에서 바라본 목포대교..

 

흔들바위를 지나 내려서면 바위를 돌아서 지나는데 돌아가기 전이나 돌아간 후에 바위를 올려다보면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바위의 끄트머리가 갑자기 튀어나와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포효하는 남자의 얼굴로 보인다..

 

얼굴바위를 지나면 너른 공터의 보리를 털어 말리던 곳, 보리마당..

오래전 목포 인근의 섬사람들은 보리나 벼 등을 수확한 뒤 목선에 바리바리 실어 목포까지 날라야 했다.

섬엔 변변한 도정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보리는 정미소 가기 전, 그리고 도정을 마친 뒤 각각 볕에 말려야 한다..

섬 주민들이 정미소가 있던 도심 외곽에 며칠씩 머물다 보니 자연스레 이들을 상대로 국밥집과 여관, 시장 등도 생겨났다..

지금은 명맥만 남은 백반거리, 팥죽거리 등도 따지고 보면 이때부터 조성됐던 셈이다.

흔히 다순구미와 보리마당이 같은 지역인 것처럼 표현되곤 하지만, 사실 별개의 마을이다.

아리랑고개(옛 말태기재)를 경계로 윗자락은 다순구미, 아래쪽은 보리마당이다..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사이에 있는 소요정(逍遙亭)...

1966년에 세워진 소요정은 평지처럼 산책하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등산객들에게는 다도해 전망대라고 불린다.

맑고 잔잔한 바닷물과 점점이 흩어진 푸른 섬들로 유명한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이곳에서 목포해양대 쪽을 바라다보면 고하도와 압해도를 위시한 조그마한 섬들이 펼쳐져 있다.

다도해 멀리 저녁해가 유달산너머로 빠져들 때면 저녁 노을은 갖가지 아름다움을 연출해 낸다.

그리고 난 공원이 있는 우측으로 목포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이등바위가 있는 쪽으로는 목포의 북항이 바라보인다.

날씨가 좋으면 멀리 무안의 망운과 지도가 바라보인다고 한다..

 

이등바위에 오르면서 바라본 목포대교, 서서히 조명을 밝히고 있다..

 

다가오는 이등바위..

 

전망바위에서 바라보면 목포해양대학교와 고하도의 끝자락 용머리, 그리고 목포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당겨본 목포대교..

 

아름다운 야경이다..

 

 

이등바위의 수도바위..

동그란 바위가 하나 얹혀 있는데 수도정진하는 수도자의 머리모습을 닮았다하여 ‘수도바위’라고 부르며, 애칭으로 ‘똥바위’라고도 한다.

수행정진하고 있는 수도자의 모습은 마당바위에서 봐야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꼭 똥덩어리처럼 보인다..

 

이등바위에서 바라본 목포대교 야경..

 

 

 

이등바위 너머로 일등바위..

 

 

 

이등바위에서 내려와 특정자생식물원을 지나고..

 

바로 아래의 달성난전시관..

 

도로에 내려서 바라본 목포 구도심 야경..

 

다시 돌아온 주차장 옆 카페..

 

대학루의 불빛을 바라보며 산행을 마무리한다..

 

집으로 향하는 길목의 목포 빛의거리 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