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기행] 백제의 숨결을 간직한 익산 미륵사지(益山 彌勒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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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기행] 백제의 숨결을 간직한 익산 미륵사지(益山 彌勒寺址)

by 정산 돌구름 2015. 5. 3.
백제의 숨결을 간직한 사적 제150호 익산 미륵사지(益山 彌勒寺址)

 

○ 탐방일 : 2015년 5월2일

○ 소재지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 미륵사지 소개

사적 제150호(1966년6월22일)로 마한의 옛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하는 금며면 용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한국 최대의 사찰지이다.

601년(백제 무왕 2년)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동양 최대석탑인 미륵사지 서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8월 원광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되었다. 건물지(建物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되어 있다.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언제 없어지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권2 무왕조(武王條))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왕(600년~641년)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향하고 있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연못을 메우고 탑과 법상, 미륵삼회전, 낭무(廊廡)의

건물을 건립하고 미륵사라 이름 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922년에 혜거국사가 미륵사탑을 개탑 했다는 기록이 혜거국사 비문에 나타나있고, 출토된 기와의 명문에는 980년, 1267년,

1317년, 1330년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조선시대인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양곡집에 미륵사지석탑이 나타나고 있는데, 석탑의 규모가 '동방최대'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세기 이전에 미륵사지석탑이 벼락을 맞고 무너졌다는 기록이 와유록에 있다.

그러나 해체하여 구조를 살펴본 결과 1층부분에서 발생한 구조의 변화로 상층부가 붕괴되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현재는 반쯤 파손되어 있는 서탑과 당간지주 등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1910년대 일본 학자가 조사한 가람(伽藍)배치에 의하면 미륵사지는 탑과 금당(金堂)이 마련된 일탑식(一塔式) 가람이 ‘品’자 모양으로

3개가 합쳐져 만들어진 사찰로 추정되어 왔다.

그 뒤 1974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원광대학교가 동탑지를 조사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인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미흡하였다.

이에 정부에서 중서부고도문화권개발사업의 하나로 미륵사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사찰의 정확한 규모, 가람배치의 성격과 구조를

밝혀내고, 발굴 결과 얻어진 자료를 통하여 유적을 정비·보존할 목적으로 1980년~1995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이전까지 알려졌던 ‘品’자모양의 가람배치설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과 동시에 사지의 전체적인 규모도

밝혀지고 2만여 점의 유물도 수습되었다.

한편, 미륵사지석탑은 2001년 10월부터 해체·보수작업에 들어가 보수중에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9년1월14일, 이탑의 탑신 1층 심주(중앙기둥)를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미륵사지의 창건년대와 창건주를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 유물 500여 점을 발굴했다.

이를 통해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인 서기 639년에 백제인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금판 앞뒷면에 194자로 된 사리 봉안 기록판에는 시주자의 신분이 무왕의 왕후로 좌평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다.

이는 백제 서동 왕자(무왕)가 향가 ‘서동요’를 신라에 퍼뜨려 신라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와 결혼했으며, 그 뒤 선화 공주가 미륵사를

건립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다른 것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탑1기와 금당이 짝을 이뤄 3개의 원(院)으로 구성된 배치이면서 중앙에는 목탑, 좌우 양쪽에는 석탑으로 주성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국보 제11호(1962년12월20일)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彌勒寺址石塔)

높이 14.24m의 사각형의 다층석탑(多層石塔)이었으나, 서남 부분은 무너지고 북동쪽 6층까지만 남아 있다.

초층 탑신은 사면이 3칸씩이며, 그 중앙칸은 내부와 통하도록 사방에 문이 있고, 탑안 중앙에는 네모난 커다란 찰주(擦柱)가 놓여있다.

각 면에는 엔타시스수법을 쓴 모난 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평방(平枋)·창방(昌枋)을 짰으며, 다시 두공양식(枓栱樣式)을 모방한 3단의

받침으로 옥개(屋蓋)를 받쳤다. 2층부터 탑신이 얕아지고 옥개석은 초층과 같은 수법으로 표현하였다.

이 석탑은 각 부분이 작은 석재로 구성되었으며, 그 가구 수법도 목조건물을 모방하기 위해 석탑 이전에 목탑(木塔)을 먼저 세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보기이며, 한국 석탑양식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건립연대가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원래 7층석탑으로 추정한다면 20m 안팎의 거대한 탑이었을 것이다.

건립연대는 백제 말기의 무왕 때인 600∼640년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며, 2009년 1월 해체수리 중 발견된 기해(己亥)년명

탑지를 통한 건립연대는 639년(무왕 39)이다. 일제강점기 때, 붕괴가 우려된다고 콘크리트를 발라놓아 훼손이 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