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기행] 황진이가 사랑한 선비, 소세양(蘇世讓) 신도비(神道碑)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익산기행] 황진이가 사랑한 선비, 소세양(蘇世讓) 신도비(神道碑)

by 정산 돌구름 2015. 5. 3.
황진이가 사랑한 선비, 소세양(蘇世讓) 신도비(神道碑)..

 

○ 탐방일 : 2015년 5월 2일

○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산33

○ 소세양 신도비 소개

 1564년(명종 19년)에 건립된 소세양의 신도비로써 1998년1월9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비신(碑身)은 높이 218㎝, 너비 103㎝, 두께 25㎝의 대리석으로 화강암으로 된 직사각형의 대석 위에 세우고 옥개석을 얹었다.

 대석은 가로 196㎝, 세로 112㎝, 높이 90㎝의 크기로 전면과 후면은 3개의 정사각형 안에 국화문을, 양측면에는 2개의 정사각형

 안에 국화문을 조각하였다. 현재의 옥개석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이수가 파괴되어 도괴의 위험이 따르므로 교체한 것이다.

 비의 전액(篆額)은 글씨 크기가 약 12㎝이며, 심전(沈銓)이 전서(篆書)하였다.

 비문의 서체는 해서(楷書)로 홍섬(洪暹:1504~85)이 썼고, 비명은 크기가 약 2㎝로 소세양의 아들 수(遂)가 썼다.

 소세양(蘇世讓)은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504년(연산군 10년) 진사에 이어 1509년(중종 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다.

 정언(正言)을 거쳐 수찬(修撰) 때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 현릉(顯陵)에 이장하게 했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 후에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다.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 뒤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었으며,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때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형조·호조·병조·이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1538년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실록(實錄)을 등사, 봉안했다.

 1545년(인종 1년)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

 을 지내다가 사직, 익산(益山)에 은퇴했다.

 문명이 높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양곡문집(陽谷文集)>, 글씨에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楊州) <소세량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