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5년 5월 2일
○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
○ 가람 이병기생가 소개
전북기념물 제6호(1973년6월23일)로 한국 현대 시조의 중흥을 이룩한 시조 시인이며 국문학자였던 이병기가 태어난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 정자 등 여러 채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는 승운정(勝雲亭)이라는 1칸 규모의 모정(茅亭)이 있고, 그 옆으로 사랑채를 길게 배치한 후 앞에 작은 연못을 파 놓았다.
사랑채는 一자집이다.
전후 퇴집의 구조로서 전면은 툇마루를 구성하고, 안마당에 면한 툇간은 골방과 창고, 다락 등 수장 공간으로 사용한다.
칸살은 동쪽부터 방ㆍ부엌ㆍ방ㆍ방ㆍ대문간 및 헛간 순으로 이루어졌다.
진수당(鎭壽堂)이란 편액이 붙은 끝 방은 가람이 책방으로 사용했으며, 평소 기거하던 곳은 한 칸 건너 수우재(守愚齋)라는 편액이
붙은 방이다. 수우재와 책방사이는 칸 전체를 다락으로 만들었다.
밑은 양측 두 방 모두 구들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 공간을 이용하여 다락을 만든 것이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좁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마주하게 된다.
안채는 호남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ㄱ자 집으로서 잡석 축대 위에 높은 자연석 초석을 사용해 비교적 높게 지었다.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마주하며, 안방 전면으로 부엌이 돌출한 형태다.
건넌방은 전면과 측면에 툇마루를 시설했는데 전면 툇마루는 대청마루 보다 높게 구성해 마루 밑에 아궁이를 만들며 입면(立面)에
변화를 준다. 또한 윗방 한쪽은 칸을 막아 찬방을 두었으며, 아랫방 뒤쪽에는 쪽마루를 달아 고방채와 장독대가 있는 뒷마당에서의
출입을 배려하였다. 3칸의 고방채는 광ㆍ헛간ㆍ안변소로 이루어졌다. 고졸하고 소박한 초가의 모습에서 담백한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이곳에서 가람은 한국 문학사에 뛰어난 족적을 남기고 말년을 맞이하였다.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는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로 전북 익산 출신이며,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가람(嘉藍)이다.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당대 중국의 사상가 량치챠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 · 전주제2 · 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이때부터 수집한 서책은 뒷날 방대한 장서를 이루었는데, 말년에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여 중앙도서관에 '가람문고'가 설치되었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 · 임경제(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 ·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고,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歌謠研究會)'로 개칭하여 조직을 확장하면서 시조 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연희전문·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때 귀향하였다가 광복이 되자 상경하여 군정청 편수관을 지냈으며, 1946년부터 서울대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6·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 퇴임하였다. 1957년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학술원임명회원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술복·문복·제자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1920년9월 <공제(共濟)> 1호에 발표한 <수레 뒤에서>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산문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는데,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다분히 의고조(擬古調)를 띠고 있었으며 그가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 11. 24~12. 13.), <율격(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 11. 28~12. 1.), <시조원류론
(詩調源流論)>(新生, 1929.1~5.), <시조는 창(唱)이냐 작(作)이냐>(新民, 1930.1.), <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23
~2. 4.), <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 11.) 등 20여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한 바, 그 중에서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이 무렵 <동아일보>의 시조 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에 조남령(曺南嶺)·
오신혜(吳信惠)·김상옥(金相沃)·장응두(張應斗)·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 등을 주장하여 시조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문장사)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관조와 <젖>에 나타난 인정물 등 순수서정 일변도였다.
그 뒤 옥중작인 <홍원저조(洪原低調)> 등에서 사회성이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기작은 6·25사변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다.
<탱자울>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비리의 고발, 권력의 횡포에 대한 저항이 후기의 특징으로 꼽히는데, 이것은 현대시조의 새로운
일면을 개척한 것이었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있던 고전작품들, 〈한중록〉 · 〈인현왕후전〉 ·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 〈춘향가〉 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그는 이 밖에 많은 수필을 썼고, 특히 평생동안 극명하게 쓴 일기는 놀랄 만하다.
주요저서로는 <가람시조집>을 비롯하여 <국문학개론>·<국문학전사>·<가람문선> 등이 있다.
전라북도 예총장(藝總葬)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1960년 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62년 문화포장을 받았다.
전라북도 전주시 다가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이병기 생가의 탱자나무는 2001년12월27일 전북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탱자나무는 중국이 원산이며 우리나라에는 경기도 이남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호남과 영남지방에서는 대부분 생울타리로 활용되고 있으며, 열매는 약용으로, 유목(幼木)은 귤나무의 대목(代木)으로 사용된다.
이 탱자나무의 수령은 이병기의 고조부가 익산에 정착한 시기를 기준으로 해서 2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높이 5.2m,
둘레는 60㎝이다. 나무줄기가 지상 1.6m 높이에서 여섯 개로 갈라져서 동서 방향으로 6m, 남북으로 4.5m가량 원추형으로
수관을 형성하고 있는 매우 아름답고 독특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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