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기행] 이(理)야기(氣)가 살아 숨쉬는 월봉서원(月峯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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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기행] 이(理)야기(氣)가 살아 숨쉬는 월봉서원(月峯書院)

by 정산 돌구름 2015. 5. 16.
이(理)야기(氣)가 살아 숨쉬는 월봉서원(月峯書院)

 

○ 탐방일 : 2015년 5월 16일

○ 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452 (광곡길 133)

○ 월봉서원(月峯書院) 소개

  기대승(奇大升)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조선 중기의 서원이다.

  1578년(선조 11년)에 김계휘(金繼輝)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기대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에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46년(인조 24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654년(효종 5년)에 ‘월봉(月峯)’이라고 사액되었다.

  1671년에 송시열(宋時烈) 등의 건의로 인근의 덕산사(德山祠)에 모셔져 있던 박상(朴祥)과 박순(朴淳)을 이향(移享)하였으며,

  1673년에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을 추가배향하였다.

  당시 경내건물은 사우(祠宇)를 비롯, 충신당(忠信堂)·존성재(存省齋)·명성재(明誠齋)·유영루(遊泳樓)·내삼문(內三門)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그 뒤 전라남도 유림에 의하여 1938년 5칸의 빙월당(氷月堂)이 건립되었으며, 1972년에 4칸의 고직사(庫直舍), 1978년에 외삼문

  (外三門)과 3칸의 장판각(藏板閣), 1980년에 사우(祠宇), 1981년에 내삼문이 건립되었다.

  빙월당(氷月堂)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 9호로 월봉서원의 주강당이다.

  빙월은 '밝은 달과 투명한 얼음과 같은 청렴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서원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각각 동쪽의 기숙사, 서쪽의 기숙사를 말한다.

  동재는 명성재(明誠齋)라는 이름으로, '배움에 있어서 밝은 덕을 밝히는데 성의를 다하라는 의미이다.

  동재의 바로 건너편에 있는 서재는 '존성재(存省齋)'라고 하는데, '자기를 성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숭덕사(崇德祠)는 고봉 기대승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매년 음력 3월과 9월인 초정일에만 큰 제사인 춘.추향사제를 모시고 있다.

  장판각(藏板閣)은 책을 만들 수 있는 목판들을 보관해둔 곳으로 오늘날에 출판소와 도서관이라 할 수 있다.

  장판각에는 고봉 기대승의 책을 만들었던 474개 목판 <고봉집(高峰集)>, <논사록(論思錄)> 등이 보관되어 있다.

  망천문(望川門)은 월봉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묘정비(廟庭碑)는 월봉서원과 고봉 기대승의 연혁이나 관련 인물 등에 대한 내력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정안문(靜安門)은 월봉서원의 내삼문으로 사당인 숭덕사 앞쪽에 세워져 있다.

  사당을 들어가기전 '조용하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기대승(奇大升)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존재(存齋)이다.

  전남 장성 출신으로 아버지는 기진(奇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다.

  기묘년 현사 기준(奇遵)이 그의 삼촌이며, 기대항(奇大恒)이 그의 종형이다.

  명종 4년(1549년) 사마시에, 명종 9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 부정자와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승정원

  주서·홍문관 부수찬에 올랐다.

  1565년 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 지평·홍문관 교리·의정부 검상(檢詳)·사헌부 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568년 우부승지로 시독관을 겸직하였고, 1570년 이후 성균관 대사성·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관직을 그만 두고

  귀향하던 도중 운명하였다.

  김인후·이항·노수신 등을 만나 도학에 대해 강론하였고, 정지운의 ≪천명도 天命圖≫를 보고는 이황과 의견을 교환하였다.

  1559년부터 1566년까지 이황과 나눈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은 우리나라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분리간(分離看)에 반대하여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혼륜간(混淪看)을 말하며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하였고,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情發理動氣感)’이라는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하며,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조광조·이언적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는 등 기묘년 현사의 후예로서 경세택민(經世澤民)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였는데

  <논사록(論思錄)>의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자세를 견지한 호남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이항·김인후·노수신·이황 등과 학문을 토론하였고,

  호남의 누정에 나아가 송순·임억령·김성원 등과 어울려 교유하는 등 호남시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면앙정기> 2편 등 누정시(樓亭詩)에는 그의 자연관이 잘 나타나 있다.

  <월정만필(月汀謾筆)>에 의하면 문장을 자부하여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였고, 김시습의 시를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제자로는 정운룡·고경명·최경회·최시망 등이 있으며, 광주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