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기행] 천년사찰 구산선문 동리산파의 중심사찰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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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기행] 천년사찰 구산선문 동리산파의 중심사찰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by 정산 돌구름 2015. 5. 26.
천년사찰 구산선문 동리산파의 중심사찰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 탐방일 : 2015년 5월 25일 (월)

○ 소재지 :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 태안사(泰安寺) 소개

  태안사(泰安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며, 대안사(大安寺)라고도 한다.

  742년(신라 경덕왕 1년)에 3명의 신승(神僧)이 창건하였고, 고려 태조 때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가 중창하여 선문구산

  (禪門九山)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사찰로 삼았다.

  동리산파의 개산조인 혜철국사(慧徹國師)가 머물렀던 이 절에 윤다가 132칸의 당우를 짓고 대사찰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풍수지리설의 원조인 도선국사도 이곳 태안사에서 20세때부터 23세까지 혜철에게 가르침을 받고 크게 깨쳤다.

  고려 초에는 송광사·화엄사 등 전남도내 대부분 사찰이 이 절의 말사였으나, 고려 중기에 송광사가 수선(修禪)의 본사로 독립됨에

  따라 사세가 축소되었다.

  1223년에는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왕지를 받들어 중건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효령대군의 원당(願堂)이 되어 조정의 지원을 받았다.

  1683년(숙종 9년) 정심(定心)이 중창하였고 숙종 10년(1684년)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1737년(영조 13년)에 능파각(凌波閣)을 지었는데 능파각은 그 뒤에도 1776년·1809년·1861년·1923년에 각각 중수한 바 있다.

  6·25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15채의 건물이 불타버렸으며, 근래에 들어와 중창불사가 있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불보전·만세루(萬歲樓)·해회당(海會堂)·선원(禪院)·능파각(凌波閣)·일주문 등이 있다.

  이 중 해회당은 네모꼴로 이어진 큰 건물이고, 선원 역시 전국 굴지의 규모이며, 대웅전은 6·25전쟁 때 불탄 것을 곡성군의 보조로

  1969년에 재건하였다.

  또, 능파각은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어 있고, 일주문은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혜철의 부도인 보물 제273호의 적인선사 조륜청정탑, 윤다의 부도인 보물 제274호의 광자대사탑, 보물 제275호인

  광자대사비, 보물 제956호인 대바라,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24호인 천순명동종 등이 있다.

  이 중 바라는 승무를 출 때 사용한 것으로 태종 때 효령대군이 발원하여 만들었으며, 둘레 3m로서 우리나라 최대의 것이다.

  천순명동종은 1465년(세조 11년)에서 1475년(성종 6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공예수법이 뛰어나다.

  이 절은 1925년 최남선(崔南善)이 찾아와 “신라 이래의 이름 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서 선종(禪宗)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 같다.”고 극찬한 곳이다.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170호인 태안사 삼층석탑(三層石塔).. 

 

광자대사 부도 옆에 있었던 것을 일주문 왼쪽에 넓게 연못을 만들고 그 중앙에 옮겨 새롭게 조성한 고려시대 석탑이다..

 

이 탑은 기단과 옥개석의 양식으로 보아 신라양식을 계승한 고려초의 탑으로 추정되는데, 전체적으로 안정된 체감을 갖고 있다.

 

원래는 기단의 한쪽 면과 탑신의 1층 옥개석과 2, 3층의 탑신 부위가 없어진 상태였다고 하는데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이 복원하여

만들었다 한다.

현재 부도밭에 석탑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개석을 하나 볼 수 있는데 이 부재가 석탑에 사용되었던 부재가 아닌가 추정된다.

 

기단 아래에는 원래 탑에 사용되지 않았던 방형의 지대석을 3단 놓아 원래 탑에 비해 높이가 높아졌다.

기단은 가구식 기단을 사용하고, 탑신도 역시 네면 각 모서리에 기둥형태를 조각해 두었다.

 

2층 옥개석은 많은 부분이 깨져 있으며 각층의 탑신석도 많은 부분이 깨져있다.

3층 옥개석과 상륜 부위는 신재로 교체해 복원한 듯 돌의 재질이 달랐다.

다만 상륜부 중 노반은 원래 탑의 부재로 생각된다..

 

태안사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사찰과 속세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는 문으로 이곳을 통과하면 공식적인 사찰의 영역이 된다.

따라서 일주문은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깨끗이 하고 천상의 세계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암시하고 있다.

능파각을 지나 좁고 운치 있는 길을 따라 산을 얼마쯤 오르면 태안사 일주문에 도착하게 된다..

 

이 건물은 937년 광자대사가 창건하였으나 그 후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숙종 9년(1683)에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1917년에 영월(映月)선사가 중수하였고, 1980년에 또 다시 보수하였다.

기단은 외벌대를 사용했고, 초석은 막돌초석을 사용했다. 기둥은 하부가 두껍고 상부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만든 민흘림기둥이 아닌 원목을 약간만 가공해서 사용했다는 말이 적절할 듯하다.

굵은 기둥 2개 외에 4개의 기둥이 더 사용되었는데 매우 세장하기 때문에 이것을 구조적인 기둥이라 하기는 무리가 있다.

기둥상부에는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그 위에 다포의 공포를 짜 올렸다.

공포는 외4출목을 사용했고 쇠서의 모양은 4제공까지 앙서를 사용했고, 독특하게 5제공은 앙서와 수서를 한 부재에 장식했다.

지붕은 맞배지붕을 사용했고 측면은 풍판으로 가렸다. 전체적으로 하부 가구에 비해 상부 공포가 매우 비대한 가분수형의 건축물이다.

 

건물의 전면에는 “동리산태안사(桐裏山泰安寺)”라는 커다란 현판을 걸었다.

 

배면에는 “봉황문(鳳凰門)”이라고 작게 현판을 걸었다..

 

태안사 부도전..

 

보물 제274호 광자대사탑(廣慈大師塔)..

태안사 일주문 오른편 부도밭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시대 초기 광자대사의 부도탑이다.

광자대사는 태안사의 2대 조사(祖師)로, 경문왕 4년(864)에 출생하여 혜종 2년(945) 82세로 입적하였다.

자는 법신(法身)이고 법명은 윤다(允多)이다. 이 부도는 광자대사가 입적한 지 5년이 지난 고려 초기 광종 원년(950년)에 세워졌다.

 

이 부도는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대석 및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을 두고, 그 위에 탑신과 옥개석 및 상륜을 올린 구조이다.

전체적으로 팔각형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지대석의 가장 아래 단을 상부와 틀어지게 구성하였음이 특징이다.

신라 말 고려 초에 유행하였던 부도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예에 속한다.

지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상부에 세 단의 쇠시리를 두어 기단받침으로 삼고 있다.

하대석은 상대석과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상중하 세 단으로 구성했다.

하단(下段)에는 물결무늬와 더불어 날아가고 있는 용을 매우 화려하게 조각했고 그 아래 2단의 쇠시리를 두어 지대석 상면의 쇠시리와

연속되는 기단받침을 이루도록 하였다. 구름과 용은 그 위가 구름 위의 세계, 즉 천상세계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새겨진 것이다.

중단(中段)은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지는 기단의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각 면에는 안상 2개씩을 새겼다.

상단(上段)은 각 면과 모서리에 하나씩 16엽의 연꽃을 복련(伏蓮)으로 새겨 상대석의 앙련과 대칭을 이루도록 하였다.

복련 위는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3단의 쇠시리를 두어 중대석 받침을 이루고 있다.

중대석은 그 높이가 비교적 낮은 편으로 각 면에 상하는 직선, 양쪽은 반원을 이루는 윤곽을 만든 속에 안상을 새겼다.

중대석의 높이가 낮아 각 면은 옆으로 긴 형상을 지니므로 안상은 그에 맞추어 중앙과 좌우가 분리된 듯한 변형된 모습을 이루고 있다.

안상 속에는 다시 꽃을 새겼다.

상대석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형태상 상하 두 단으로 나누어진다.

아래는 앙련을 새긴 부분으로 아래에 3단의 쇠시리를 두어 받침으로 삼았으며, 하대석의 복련과 대칭을 이룬다.

연꽃은 각 면과 모서리에 하나씩 모두 16엽으로 연잎 속에 다시 꽃을 새겼다.

앙련 상부에는 연잎 사이마다 하나씩의 간엽(間葉)을 새겼다.

지대석 부분은 2단의 쇠시리로 구성하였고, 면석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각 면을 2간으로 나누어 윤곽을 새긴 속에 안상을 새겨 넣었다.

갑석은 면석에 비해 돌출시켰고 그 위에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탑신받침으로 삼았다.

기단부는 이 시기에 조영된 다른 부도에 비해 장식적인 내용이 많이 약화되었다.

또한 중대석 부분은 다른 부도에 비해 매우 낮게 만들어진 반면 복잡한 형태의 안상을 새기고 있다.

탑신은 팔각형 평면의 목조건축을 표현하고 있으나 조각 수법이 경직되고 건축적 표현도 형식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모서리에는 기둥을 새겼고, 각 면의 상하에는 기둥 상하를 수평으로 연결하는 창방과 하인방을 표현하였다.

정면과 후면에는 문하방과 상방, 문설주를 세 겹으로 새겨 문틀을 표현하고 그 중앙에 자물쇠를 조각했다.

그런데 문은 그 아래가 하인방에서 떨어져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건축적인 사실성이 결여되고 있다.

문 양 옆에는 사천왕상을 새겼는데, 저부조로 조각수법은 같은 태안사에 있는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의 사천왕상과 유사하다.

나머지 두 면에는 사천왕상의 조각과 같은 수법으로 탁자에 놓여 있는 향로를 조각했다.

옥개석은 다른 모든 부도들이 그러한 것처럼 모임지붕을 표현해 놓았다.

옥개석 하부에는 각 모서리에 추녀와 사래를, 각 면에 서까래와 부연을 조각했다.

서까래 아래쪽으로는 탑신과 만나는 부분에 만들어진 옥개받침까지 평탄하게 만들어진 부분이 있다.

출목이 있는 공포대와 서까래와 부연, 추녀와 사래로 만들어지는 처마부를 표현하고 있으나 그 조각 내용은 매우 형식적이다.

상륜부는 복발(覆鉢), 2개의 보륜(寶輪), 보개(寶蓋), 보주(寶珠)로 구성되어 있고, 조륜청정탑에 비해 과장된 크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부도는 같은 태안사에 있는 적인선사조륜청정탑과는 시기적으로 100년의 차이가 있다.

조륜청정탑이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를 바탕으로 소박한 조각표현을 하고 있는 반면에 광자대사탑은 전체적인 비례보다 그 장식적

표현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도 적인선사탑은 목조건축의 내용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번안하고 있는 반면,

광자대사탑은 목조건축의 표현이 형식적인 것으로 변하면서 사실성이 결여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보물 제275호인 광자대사비(廣慈大師碑).

광자대사의 일대기를 적은 광자대사비는 광자대사탑 바로 옆에 건립되어 있다.

비신(碑身)은 도괴되어 옆에 별도로 세워놓았는데, 훼손이 심하여 비문의 내용을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금석문 관련 문헌에서 비문에 대해 기록해 놓고 잇어서 비문의 내용은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41년 펴낸 사적기에서 의하면 “1928년 중건 당시 광자대사비의 이수를 옮겨와 적인 선사비의 이수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인선사탑비의 이수와 광자대사탑비의 이수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귀부는 각각 세부에 수많은 조각 장식을 하고, 머리의 표현에 있어서 매우 사실적이며, 목에 그려진 주름 무늬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또한 비를 받치는 받침 부분에는 구름무늬를 빼곡히 조각해 두었다.

등에는 아직도 거북의 무늬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고, 꼬리는 하늘로 말려 있도록 조각되었다.

이수의 한 중앙에는 가릉빈가를 표시한 듯한 새 몸통이 조각되어 있으나, 얼굴부분은 사라져서 현재는 없다.

새 모양 조각 하부에는 이 탑비의 주인공 이름이 적혀있었을 것이나, 많이 파괴되어 있어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

또 사방 모서리 부분에는 각각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고, 이수의 정상에는 중앙과 좌우로 3개의 보주를 올려놓았다.

배면에는 구름 무늬로 조각을 했으며, 곳곳에 용의 몸통을 조각해 놓아 각 모서리에 조각된 용과 조화를 꾀하였다..

 

 

 

 

태안사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5간, 측면 3간의 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기단은 말끔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층으로 쌓아올렸고 중앙에 기단을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을 설치했다.

다듬은 초석을 사용했는데 원형 평면에 쇠시리를 조각하였고 초석 상부의 기둥은 모두 배흘림기둥을 사용했다.

중앙에 위치한 4개의 기둥 상부에 용머리를 조각해 외부로 돌출시켰고, 기둥과 기둥은 창방을 이용해 결구하고 있다.

그 상부에 평방을 얹어 다포공포를 짜 올릴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을 이루고 있는 다포를 사용했다.

천장은 우물천장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반자틀에는 연꽃무늬를 단청했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중앙어간에는 4짝 여닫이문을 매달아 놓았고, 그 외 4간은 2짝 여닫이문을 사용했으며, 창호는 소슬빗꽃살을 사용해 조성했다..

 

대웅전 편액..

 

 

대웅전 아미타 삼존불(阿彌陀 三尊佛)...

대웅전의 본존불로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모셨다.

또한, 좌우협시보살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불은 무한한 광명과 수명을 지닌 부처라는 뜻으로 무량수불, 미타불로 불리는 부처로 서방의 극락을 관장한다고 한다.

후불벽 또한 본존불과 어울리게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극락회상도를 그려 놓았다.

왼쪽 벽면에는 지장탱화를 제작해 걸어놓았고, 오른쪽 벽면에는 신중탱화가 걸려있는데, 모두 화기가 확인되지 않는다..

 

 

 

 

대웅전에 그려진 벽화는 내부의 경우, 고주 뒤편 배면 벽면에는 태안사의 조사인 혜철국사와 광자대사의 영정을 모셨고,

그 외 좌우 벽면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의 영정을 그려 놓았다.

태안사지 편사에 의하면 광자대사 당시 태안사의 중심 건물은 금당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금당의 당주 또한 약사여래철조좌상(藥師如來鐵造坐像)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태안사의 중심 건물은 대웅전이라 현판을 걸었고,

그 예불 대상 또한 석가모니불로 바뀌어 있다.

원래 이곳에 있던 대웅전은 6.25전쟁때 화재로 사라졌으며, 지금의 건물은 다시 복원한 건물이다...

 

대웅전의 측면과 배면 외벽에는 석가모니의 본생도를 그려 장엄하다..

 

보물 제1349호 태안사 동종(泰安寺 銅鍾)..

대웅전에 있는 동종은 조선 전기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많은 탄압을 받던 시기에 왕실의 도움 없이 사찰 불사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전체높이 96.5㎝, 종신 76.8㎝, 입지름 65.7㎝, 입두께 5.5㎝, 무게 240kg이다. 

 

몸체의 명문(銘文)에 의하면, 세조 3년(1457년)에 이 종을 처음 주조했으나 파손되어 선조 14년(1581년)에 다시 만들어졌다.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부드럽게 한다는 음통(音筒)과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을 새긴 용뉴(龍鈕)가 있다.

이 용의 이름은 고래를 보면 놀래서 소리를 잘 지른다는 용왕의 셋째 아들 포뢰(蒲牢)다.

 

동종의 몸체는 곡선을 이루면서 구연부가 안으로 오므라드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한마리 용으로 만들어진 종뉴와 음통이 있고 천판에는 입상화문대를 갖추었으며, 몸체 표면에는 상대와 하대, 연곽 등이 표현되었다.

어깨에는 1단의 연꽃무늬가 돌려 있고, 그 밑에 넓은 띠에는 방형 속에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작은 원 속에 범자(梵字)를 새겨 넣었다.

제일 밑 부분에도 어깨띠와 비슷한 넓은 띠가 있는데 연꽃무늬와 당초문을 새겨 넣었다.

넓은 몸체에는 네 군데에 사각형의 유곽이 있는데, 그 주위는 당초문(唐草紋)으로 장식을 하고 9개의 유두(乳頭)를 연꽃 속에 넣었다.

그 아래에는 화문(花紋)장식을 한 원통(圓筒)의 당좌(撞座)를 전후좌우 4곳에 두었다.

제작과 관련된 해서체로 된 명문(銘文)이 뚜렷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주조기술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명문의 내용은 天順元年六月日大鐘鑄爲破 又萬曆九年四月日大鐘改鑄次金四百餘斤入鑄(천순 원년 3월에 큰 종을 만들었으나

망가졌고, 또 만력 9년 4월에 큰 종을 다시 주조하니 금 400여근이 주조하는데 들어갔다)라 기록되어 있다.

아래 명문은 공양주(供養主), 화주(化主)와 시주자(施主者)의 명단이다.

신라에서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한국종의 독창적인 조형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이 종은 조선전기 동종양식의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전통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접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태안사 삼성각..

산신()·칠성()·독성()을 함께 봉안하고 있다.

삼성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전통신앙인 삼신신앙()과의 습합현상을 살필 수 있게 된다.

때로는 삼성각에 고려말의 삼대성승()인 지공()·나옹()·무학()의 삼성()과 칠성·독성 등을 봉안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별나라의 주군()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나반존자()로 불리는 독성은 12인연()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서 성인의 위치에 올라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

또, 사찰에 따라서는 독성과 산신과 용왕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모두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들로 하근기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채택되어 전(殿)이라 하지 않고 각()으로 일컬은 것이다.

 

칠성은 수명장수신()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본래 중국의 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생긴 신앙이다.

대개는 손에 금륜을 든 치성광여래()를 주존으로 하여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에 협시로 둔다..

 

산신()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나타난다.

산신은 나이 든 도사의 모습이고, 호랑이는 대부분 산에 위치한 사찰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독성은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독수성()이라 불린 나반존자()를 일컫는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수독성탱()·나반존자도()라는 독성탱화()를 모신다.

그림은 천태산과 소나무·구름 등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 위에 정좌한 모습이다.

때로는 독성 외에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동자와 문신()이 양쪽 협시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태안사 범종각..

 

 

 

태안사 약사전(藥師殿)..

 

대웅전 오른편에 따로 높은 2단의 축대를 만들어 조성한 대지에 위치한 건물로 근래에 새로 지은 건축물이다.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3간인데 어간이 협간에 비해 매우 크게 간이 설정되어 정면 비례에 있어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측면의 경우 3간으로 간을 설정한 관계로 기둥배치가 너무 촘촘한 느낌을 준다.

기단은 낮게 구성했는데 막돌초석을 사용해 마감했고, 초석은 다듬은돌을 사용했는데, 초석에 연꽃무늬를 조각해서 매우 화려하다.

 

기둥은 흘림을 주지 않은 원통형을 사용했고, 어간의 양쪽 기둥상부에는 용을 조각해 끼워 넣었다.

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으로 구성되어 초제공, 2제공의 쇠서는 앙서형으로 마무리함과 더불어 끝에 연꽃을 같이 조각했다.

4제공의 위치에는 주간포의 경우 봉두의 형태의 운공을 사용했고, 주심포에서는 삼분두형의 보머리를 외부에 돌출시켰다.

가구는 무고주 5량을 사용하였으며, 내부는 우물천장을 사용했고, 종보 하부 높이에 이를 가설해 놓았다.

팔작지붕을 만들기 위해 내부에는 충량이 사용되었는데 좌우측에 각 2개씩 사용했고, 끝머리에는 용머리를 조각해 끼워 넣었다.. 

 

내부에 불단은 조성되어 있으나, 따로 닫집은 만들어져 있지 않다..

 

불단위에는 한 폭의 유화가 모셔져 있는데, 임창수(林昶壽) 화백의 그림으로 약사여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전통 안료를 사용하지 않고 현대에 걸맞게 탱화를 번안해 그려 봉안한 예이다..

 

태안사 염화실(拈花室)..

 

염화실은 조실스님이나 방장스님이 거처하는 방으로 염화미소(拈花微笑)에서 온 말이며,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라고도 한다.

염화미소(拈花微笑)는 불교의 대표적인 화두 가운데 하나이고 삼처전심(三處傳心)의 하나이다..

 

태안사 선원(禪院)

정면 6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ㄱ자 건물이다.

선원은 화두를 참구하는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塔)으로 들어가는 배알문()..

 

조선 후기 호남의 명필로 알려졌던 창암() 이삼만의 글씨로 된 현판이 걸려 있는데

통나무를 아치형으로 배치한 운치 있는 문으로 유물을 향해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보물 제273호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

이 탑은 태안사의 개산조사라 할 수 있는 혜철(慧徹)대사의 부도이다.

적인선사 혜철은 신라 원성왕 1년(785년)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년)에 입적하였다.

따라서 이 부도는 적인선사가 입적한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신라말기에 건립되기 시작한 부도의 초기 작품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그 형태에 있어서도 너무 화려하거나

너무 거대한 것과는 다르게,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조형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조각에 있어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있어,

수수하면서도 당당한 초기 한국 부도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

 

부도는 현 태안사의 가장 높은 곳에 마련한 대지에 있으며, 부도 옆에 탑비가 부도를 바라보면서 위치하고 있다.

또한 부도 앞에는 계단을 마련하고 배알문(拜謁門)이라는 현판을 단 문을 두어 부도가 놓인 대지의 격을 높이고 있다.

부도는 지면에 바로 놓인 것이 아니라 기단을 마련한 위에 모셔졌다.

기단은 원래 가구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우주가 제 위치에 있지 않는 등, 많은 부분이 교란되어 있다.

또한 기단 주변으로 초석들이 위치하고 있어, 부도를 중심으로 한 부도전이 꾸며졌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기단 정면에 위치한 갑석의 형태가 특이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계단을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는 지대석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을 만들고, 위에 탑신과 옥개석, 상륜부를 두어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팔각형평면을 기본으로 구성한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부도 형식을 지니고 있다...

부도를 바라보며 옆에 세워진 비석은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로써 그의 일대기와 사상을 담은 탑비이다.

이를 통해 그 당시의 역사와 시대 상황 및 선사의 일대기를 알 수 있다. 탑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로 구성되는데 적인선사탑비는 비신이

결실되어 없어졌으며, 현재 사내에 전해 내려오는 비문을 가지고 다시 복원해 놓았다..

 

적인선사탑비는 적인선사조륜청정탑 옆에 부도를 바라보며 세워진 비석이다.

훌륭한 선사의 부도에는 그의 일대기와 사상을 담은 탑비를 옆에 같이 세워두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를 통해 그 당시의 역사와 시대 상황 및 선사의 일대기를 알 수 있다.

탑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로 구성되는데 비신이 결실되어 없어졌으며, 현재 사내에 전해 내려오는 비문을 가지고 다시 복원해 놓았다..

 

배알문에서 바라본 경내..

 

보제루(普濟樓).. 안에는 만세루(樓) 현판이 걸려있다..

절에 따라 만세루()·구광루()라고도 하나, 두루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보제루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사찰 중심 불전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대체로 모든 법요식()은 이곳에서 행하고 있다..

 

 

 

 

 

전남 유형문화재 제82호, 태안사 능파각(凌波閣)..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가 처음 지었고, 고려 태조 24년(941년) 광자대사가 수리했다고 한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영조 43년(1767년)에 다시 지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능파각은 정면 3간, 측면 1간의 방형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계곡의 양쪽에 석축을 쌓아 이 위에 굵은 보를 가로질러 걸치고 직각방향으로 또 다른 보를 가로질러 건물의 바닥 기본틀을 형성하였다.

상부에 굵은 목재를 다시 건너질러 이를 상부 기둥의 기초로 사용하고, 이 위에 기둥을 올렸고 상부는 창방으로 결구했다.

공포는 기둥상부에만 사용한 주심포식을 사용했고, 공포의 출목은 외1출목이며 내부는 출목 없이 보아지로 마감했다.

태안사 사찰 영역을 진입하기 이전의 다리 역할을 하는 하나의 누각식 교량, 능파각이라는 이름은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해 지었다고 한다..

 

송광사, 선암사, 흥국사를 비롯해 많은 사찰들이 주영역에 진입하기 전에 개울을 건너는 방식으로 사찰의 진입을 유도하고 있다.

이는 사찰의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에 관한 모든 일들을 물에 씻으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일종의 관정의식이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돌로 홍예를 쌓지 않고 나무만으로 지은 다리로는 매우 드문 예에 속한다.

또한 일주문과 더불어 6.25전쟁 중에도 소실되지 않고 남아있는 태안사의 오래된 목조건축물 중 하나이다..

 

일간에는 남자 성기를 닮았다하여 성인 성(聖)에 그릇 기(器)를 써 성기암이라고도 하고,

또, 성품 성(性)에 기운 기(氣)를 써 성스런 기운의 암자라 해 성기암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기암은 대대로 비구니 스님만 계시는 곳이다.

 

성기암 성공전(聖供殿)은 기도처로 유명한 곳이며, 고려 태조 왕건의 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성공전의 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