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기행] 김윤제가 후학을 양성하던 곳, 광주기념물 제1호, 환벽당(環碧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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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기행] 김윤제가 후학을 양성하던 곳, 광주기념물 제1호, 환벽당(環碧堂)

by 정산 돌구름 2015. 6. 8.
김윤제가 후학을 양성하던 곳, 광주기념물 제1호, 환벽당(環碧堂)

 

○ 탐방일 : 2015년 6월 7일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387(환벽당길 18-9) 일원

○ 환벽당(環碧堂) 소개

  환벽당(環碧堂)은 1972년1월29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2013년11월6일 환벽당을 비롯한 그 일원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벽간당(碧澗堂)이라고도 불렀음이 고경명의 유서석록(遺書石綠)에 기록되어 있다.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김윤제(金允悌)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育英)에 힘쓰던 곳이다.

  건물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임억령(林億齡)·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환벽(環璧)이란 뜻 그대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고, 시가문학과 관련된 국문학사적인 인문학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며, 별서원림으로서 가치가 우수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김윤제는 광주광역시 충효리 태생으로 호는 사촌(沙村)이며,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그후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鄭徹)과 김성원(金成遠)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철은 이곳에서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후에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鄭守環)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환벽당 인근에 취가정(醉歌亭), 독수정(獨守亭), 소쇄원(瀟灑園)이 있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용소는 창계천의 깊은 물웅덩이를 말하는데, 이곳은 송강 정철에 대한 전설이 얽힌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환벽당에서 사촌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환벽 당 앞 용소에서 청룡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나 이를 괴이히 여겨 하인을 시켜 살펴보라 하였는데 어린 동자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 동자가 바로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피신하는 길에 잠시 쉬고 있던 송강 정철이다.

  사촌이 송강을 불러 문답하는 중에 그 영특함에 놀라 자기 슬하에 두고 학문을 닦게 하여 송강 나이 17세에 그를 외손녀 사위로 삼고

  정철의 뒷바라지를 했다. 용소 옆에는 송강이 이곳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잡았다는 조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