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제2구간(운봉~인월), 그리고 역사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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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제2구간(운봉~인월), 그리고 역사속으로..

by 정산 돌구름 2013. 1. 27.
지리산 둘레길 제2구간(운봉~인월), 그리고 역사속으로..

 

산행일자 : 2013년 1월 27일(일)

기상상황 : 흐리고 눈보라(강풍과 눈보라까지 몰아친 영하의 추운 날씨)

산 행 팀 : 광주알파인클럽 - 회비 27,000원

산행코스 : 지리산둘레길 제1~2구간(전북 남원)

  제1구간(주천~운봉, 15.7km) : 주천면~내송~솔정지~구룡치~회덕~노치~질매재~가장~행정~양묘장~운봉읍

  제2구간(운봉~인월, 10.3km) : 운봉읍~서림공원~북천~신기~비전~군화동~흥부골자연휴양림~월평~인월면

구간별소요시간 : 약 26.0km / 6시간30분소요

  주천면(08:45)~내송(08:57)~개미정지(09:07)~솔정지(09:23)~구룡치(09:45)~용소나무(09:57)~사무락다무락(10:08)~

  회덕마을(10:20)~노치(10:40~55)~덕산저수지(11:00)~동복오씨묘역(11:15)~가장마을(11:25)~가장교(11:38)~행정마을

  (11:50~12:15)~양묘장(12:35)~운봉초교(12:50)~2코스시작(12:55)~서림공원(12:58~13:08)~북천마을(13:25)~

  황산대첩비&비전마을(13:50~14:00)~군화동(14:10)~대덕리조트(14:20)~옥계호(14:25)~흥부골자연휴양림(14:50)~

  구인월(15:05)~월평마을(15:10)~인월면(15:15)

교통상황

  비엔날레주차장(07:00~20)~88고속~남원휴게소~남원IC~24번~19번~60번~주천면(08:30)

  구인월교(15:25)~37번~인월황토사우나(15:35~16:50)~지리산IC~88도로~비엔날레(18:00)

 

 

둘레길 소개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둘레의 전북․전남․경남 등 3개도, 남원․구례․하동․산청․함양 등 5개시․군의 21개읍․면 117개 마을을 잇는

  21개구간 274km로 지리산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각종 자원조사와 정비를 통해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環)형으로 연결한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잇고 보듬는 사람과 생명, 성찰과 순례의 길이기도 하다.

  전북 남원 46㎞, 경남 함양 23㎞, 산청 60㎞, 하동 68㎞, 전남 구례 77㎞ 등 총 274km를 숲길(43.8%), 농로(20.8%), 마을길

  (19.9%) 등으로 이어져 있다.

  2007년1월24일 사단법인 숲길을 창립하여 지리산둘레길 조사, 설계, 정비사업을 추진하였고, 2008년3 지리산둘레길안내센터

  사무동을 완공하였다.

  2008년4월27일 ‘지리산둘레길’ 시범구간인 남원 산내~함양 휴천의 개통식을 시작으로, 2008년10월16일 인월~산내 구간 개통,

  2009년5월22일 남원과 산청구간 총연장 70km를 개통하였다.

  2011년5월, 총 209.3km(남원, 함양, 산청, 구례, 하동) 개통하였고, 2012년 5월 총 274km 환형의 전체구간을 완전 개통하였다.

<제2구간>

 제2구간은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10.3km 구간으로 오른쪽은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로 옛 통영별로 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너른 운봉 들녘을 따라 지리산 서북능선과 백두대간을 조망하며 호쾌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전 구간이 제방길과 임도로 되어 있어 길 폭이 충분히 넓어 여럿이 함께 걷기에 좋은 평지길이고, 황산대첩비, 국악의성지, 송흥록

 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즐기면서 걷기에 좋은 곳이다..

 구간거리 : 운봉읍~0.4km~서림공원~0.8km~북천마을~1.1km~신기마을~1.9km~비전마을~0.9km~군화동~2.8km~흥부골

                자연휴양림~1.7km~월평마을~0.7km~인월면..

 

운봉읍을 빠져나오면 서림공원으로 이어지는 2구간..

 

서림공원으로 향한다..

 

 

뒤돌아본 운봉읍, 그리고 운무에 잠긴 바래봉 능선...

 

서천리당산이 있는 서림공원에 이른다..

‘악한 기운을 막는다’는 뜻의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라는 글을 새겨 놓았는데, 남·여 모두 수염이 달린 것이 특이하다.

마을 수호의 신앙적 의미 외에도 서민들의 소박한 표정이 사실적이어서 연구자료로 가치가 있다..

 

 

악한 기운을 막는다는 돌장승인 진서대장군...

 

 

건너편의 방어대장군이 마주하고 있다. 이 여장승은 키가 작고 귀가 없다..

 

서림정건립비... 잠시 정자에서 몸을 녹이며 따뜻한 커피 한잔을 하고 떠난다..

 

서림교를 지나고..

 

비전마을~서림공원으로 이어지는 5km의 제방길은 너른 운봉 들녘을 적시는 젖줄인 람천을 따라 걷는 길로

천연기념물인 수달과 원앙 외에 여러 종류의 동식물을 볼 수 있다..

 

하얗게 덮인 람천..

람천은 지리산 고리봉에서 발원하여 남원시 운봉읍·인월면·산내면에서 흐르다가 경남 함양군의 임천으로 이어지는 지방 2급 하천이다..

 

다시 람천을 건너 계속 이어지는 둑방길..

 

길가에는 초봉(草峯)이라는 표석..

 

가도가도 끝이없이 이어지는 둑방길...

 

 

건너편으로 황산대첩비가 바라보인다..

 

동편제 쉼터..

 

황산대첩비를 보기 위해 들어선다..

 

 

삼문을 들어서면...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1380년(우왕6년) 이성계(李成桂), 이두란(李豆蘭) 장군이 황산에서 왜적 아지발도(阿只拔都)군을 물리친 황산대첩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1577년(선조10년)에 세운 승전비로 높이 4.25m이다.

김귀영(金貴榮)이 비문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을 쓰고, 남응운(南應雲)이 글을 새겼으며, 박광옥(朴光玉)이 세웠다.

비각은 1667년(현종 8)에 현감 허제(許濟)가 건립하였으나 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파편만 남아있는 정도였다.

1957년에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그대로 이용하여 본래의 좌대를 세우고, 1973년 보호각을 세웠다.

중건된 비는 쌍귀(雙龜)를 떠서 새겨진 듯하며, 본래 모양의 높이·너비·두께 등은 정확히 고찰할 수 없다.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옛날 태조가 승전한 황산이 시대가 흐르고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청에 따라 왕명으로 건립하였음을 비롯, 이성계가 10배의 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는 명문 등이 실려 있다.

글씨는 오로지 조맹부(趙孟頫)의 글씨체를 닮은 것으로 결구에 허한 곳이 많고 필력도 주경하지 못하다.

<동국금석평 東國金石評>에 그의 글씨를 비(肥)와 속(俗)으로 평하였는데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파비각(破碑閣)..

사적 제104호로 지정된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에 있는 비각(碑閣)으로 1977년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고려말 이성계가 남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를 황산(荒山)에서 격퇴한 전공을 기록한 황산대첩비를

파괴하였는데 파비각에는 그때 파괴된 황산대첩비의 일부 파편들이 보관되어 있다.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는‘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라는 공문을 각도의 일본인 경찰부장들에게 발송해 조선의 일본관련

비석들을 찾아내 없애라고 지시했다. 그때 일본경찰들은 황산대첩비를 비롯한 전국의 일본 관련 전승비와 대첩비 20여 기를 깨부수고,

비석의 비문을 정으로 쪼아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황산대첩비지에는 파비각 외에 1957년 본래의 좌대에 복원한 황산대첩비와 1958년 건립한 황산대첩사적비,

1973년 사학자 신석호(申奭鎬)가 황산대첩의 사적을 기술하여 세운 황산대첩기념비, 어휘각을 비롯하여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들과 홍살문·담장 등의 부속건물들이 조성되어 있다..

 

 

사적비각..

 

 

황산대첩사적비...

고종19년(1882년) 운봉현감 이두현이 화수산비각비를 1958년에 중건한 비로 일제강점기 때 황산대첩비와 비각 등이 함께 파괴...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 건립취지가 기록되어 있다..

어휘각(御諱閣)..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 다음해인 1381년 본 석벽에 8원수4종사관의 명단을 새기게 하여 황산대첩의 승리가 자기 혼자만의 공이

아니라 여러사람의 공으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는 성지(聖旨)를 표현했던 유일한 유적이다...

 

 

오센 세월동안 뚜렷하게 남아있던 성적(聖蹟)이 일제강점기 문화말살정책에 따라 비전을 폭파하고 정으로 쪼아 현재 그 잔영만

남아있는 것을 1973년 어휘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황산대첩비를 떠난 비전마을로..

 

비전마을앞 소리쉼터..

 

비전마을 유래..

 

비전마을은 황산대첩비가 세워지고 이 비각을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이 비(碑) 앞에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비전(碑前)으로 불리게 되었고, 또한 마을 5리 전에 하마정이 있어 말을 탄 관리가

황산대첩비를 지날 때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 이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와 비 앞에서 절을 하였다고한다..

 

잠시 송흥록과 박초월생가터로 들어선다..

 

내부전경...

 

이곳에는 구한 말까지 2층 정자가 있어 주변의 주막과 기녀(기생)와 소리꾼, 가마꾼(轎軍)이 상주하던 곳이었다고..

그래서 비전을 역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말 동편제의 가왕(歌王)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송만갑이 태어난 곳이고 명창 박초월이 성장한 곳으로

동편제의 고향으로 국악의성지가 있는 곳이다...

 

비전 마을이 동편제의 발상지가 된 것은 이곳 하마정과 무관하지 않다..

 

국창 박초월의 생가터..

박초월(朴初月)은 현대 여류 판소리 명창으로서 김소희, 박록주와 함께 1930년대부터 우리나라 여류 판소리를 대표해 온 인물이다.

서슬과 구성이 있는 목으로 서민적 정서를 표현함으로써 김소희와는 다른 여창 판소리의 경지를 개척했다.

창극과 여성 국극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는데, 「춘향가」의 월매 역으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성준 바디 「수궁가」

중요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로 지정받았다. 현재 박초월 바디 「수궁가」「흥보가」가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박초월은 순천시(승주군) 주암면 봉암리에서 출생하여 어렸을 때 남원으로 이사하였으며, 아영면과 운봉읍에서 생활하면서

판소리를 익힌 것으로 전해진다. 12살 때부터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 15살 때부터는 송만갑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20살 무렵에는 오수암으로부터 서편제「흥보가」를 배웠고, 25살 무렵에는 정광수로부터 유성준 바디「수궁가」를 배웠다.

박초월은 임방울에게도 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 16살 때 전주에서 개최된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여 이름을 얻었다.

18살 때부터 폴리돌(Polydol)에서「육자배기」,「흥타령」,「춘향가」 등을 녹음하였다.

17살 때에는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했고, 이후 대동가극단, 동일창극단 등에서 활동했다.

동일창극단에서는 극단의 대 성공작인「일목장군」에서 여주인공인 아리주공주 역으로 크게 인기를 얻었다.

해방 후「춘향전」의 월매 역으로는 당대 제일인자라는 평을, 1976년에는 서베를린 국제현대음악제에 참가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1955년 박귀희와 함께‘대한민속예술원’을 창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후에 국악예술학교로 발전하였다. 51살 때인 1967년에는 유성준 바디「수궁가」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남해성, 최난수, 최승희, 김수연, 조통달, 박양덕, 전정민, 왕기창 등은 박초월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바로 옆 가왕 송흥록의 생가터..

 

남원 운봉 출생인 송흥록(宋興錄)동편제 판소리의 시조로 19세기 판소리 전기 8명창 중 한 사람이며 가왕()으로 일컬어졌다.

모든 가조(歌調)를 집대성하는 한편, 매부인 김성옥이 시작한 진양조를 자신의 노래에 도입, 완성하였다.

그의 창법은 발성초가 극히 신중하였고, 웅건·청담한 창법을 가진 동편제(東便制)를 이룩하였다.

산유화조는 경상도 민요의 선율형인데, 송흥록은 진양조의 완성을 통해 양반들의 음악적 요소를 판소리 속에 도입하고,

산유화조의 개발을 통해 다른 지역의 음악적 요소를 판소리 속에 도입함으로써 판소리가 계급적,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민족의 음악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선창극사>는 송흥록이 매부인 “김성옥에게 진양조를 처음 듣고 다년간 연마하여 그 완성이 극치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송흥록이 진양조를 완성한 데에는 대구감영의 명기였던 맹렬이란 기생과 관련이 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송흥록의 소리에 반해 같이 살던 맹렬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그를 떠나자 슬픈 마음을 노래로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진양조였다는 것이다.

안민영이 쓴 <금옥총부>에 송흥록의 집에 가니 맹렬이가 집에 있어서 같이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송흥록은 귀곡성을 잘했는데, 진주 촉석루에서 <춘향가> 중 ‘옥중가’를 부를 때 귀곡성을 내자 촛불이 꺼지며 공중에서

귀신 울음소리가 나는 듯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송흥록은 <변강쇠타령>, <춘향가> 중 ‘옥중가’, ‘<적벽가>’를 잘 불렀으며, 더늠으로는 <조선창극사>에 단가 한 편이 전한다
..

 

비전마을 쉼터를 지나고..

 

마을이 비(碑) 앞에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비전(碑前)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비전마을 앞을 지난다..

 

국악의 성지, 그리고 황산..

해발 698.4m의 황산은 동부의 인월 및 아영분지와 서부의 운봉분지를 연결하는 길목의 산정부로 전망과 목이 좋은 전략적 위치에 있다.

덕두산과의 구조선이 동서로 통과하면서 운봉의 물줄기인 남천이 빠져나가는 목이다..

 

둑방을 따라가면 군화마을..

1961년 대홍수 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들의 가옥을 군인들이 주둔하며서 13가구를 건립하였는데,

이주 후 마을 이름을 ‘군인들이 지은 화수 마을’이란 뜻으로 군화동(軍花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쉼터를 지나고...

 

람천 건너편으로 24번국도 너머로 대덕리조트..

 

길가에 남무대각세존 석가모니불이 있다..

 

24번 국도에서 바라본 대덕리조트..

 

대덕리조트 뒤의 옥계저수지..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축조한 저수지로, 1991년 착공하여 1997년 준공되었다..

 

총저수량 103만 3,000t, 유역면적 410만㎡, 만수면적 9만 2,000㎡, 수혜면적 117만㎡에 이른다.

댐의 길이 261m, 높이 41.8m, 체적 1만 4,802㎥이다.

 

길게 이어지는 제방..

 

제방을 지나 다시 산길로 들어선다..

 

길은 임도를 따라 오르고..

 

한없이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산허리를 감아돌면 흥부골자연휴양림이 바라보인다..

 

자연휴양림에 내려서면 박을 타는 석상...

 

고요한 흥부골 자연휴양림..

1997년 조성되기 시작하여 2002년 개장하였다. 약 1㎢에 단체수련동(2동)·숲속의집(7동)·방갈로(3동)·취사장·공동샤워장·급수대를

비롯하여 향토민속놀이마당·교육자료관 등 총 17동의 건물이 있다.

덕두산(德頭山, 1,150m) 정상까지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휴양림에서 덕두산 정상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산자락에 수령 약 55년의 잣나무 군락이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 좋고, 경관 또한 뛰어나다..

 

도로를 따라가면 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월평의 민박집들..

 

「구인월마을」유래비에 의하면 고려 제23대 우왕6년(1380년)9월 삼도순찰사 이성계장군이 이끄는 고려토벌군과 인월에 본거지를

왜장 아지발도가 황산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긴박한 전투가 진행하는 동안 날이 어두워지자 적의 행동을 탐지하기 위하여 이성계장군이

하늘을 우러러 달뜨기를 기원하니 동쪽에서 밝은 달이 떠 올라 아지발도의 목을 쏘아 대승하였다고 전한다.

이 황산대첩에서 달을 끌어 앞당겨 뜨게 하였다는 유래가 전하여져 마을 이름을 끌 인(引)자와 달 월(月)자를 써서 인월(引月)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후 인월보다 먼저 생긴 마을이라 하여 옛 구(舊)자를 써서 구인월이라 전해지고 있다..

 

월평마을..

운봉에서 박씨가 처음 입주하고 새마을 신촌으로 불리다가 후에 마을 형국이 반월형이라 월평(月坪)이라 불렀다...

또는 마을 터가 동쪽 팔랑치를 마주하고 있어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는다..

월평(月坪)이란 마을 이름이 말하여 주듯이 ‘달이 뜨면 바로 보이는 언덕’이란 뜻으로 월평이라 하였다.

1800년대 후반 천석꾼이 운봉 박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사람을 모아 살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오늘의 종점 인월면...

 

인월면은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서울, 남원, 함양 등지에서 접근이 쉽다.

인월에서 비전마을로 가는 길은 조선시대의 7대 대로중 하나인 통영별로의 일부로 이 길은 비전에서는 여원재를 거쳐

남원, 오수, 전주를 거쳐 서울로 이어지고, 인월에서는 팔랑치, 함양을 거쳐 진주로 이어지던 옛길이다...

 

산행 후 인월 황토사우나에서의 뜨끈한 온천욕... 그리고 채식뷔폐로의 뒤풀이..

멀리 덕두산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이 아름답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