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제1~2구간(주천~운봉~인월), 그리고 영하의 눈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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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제1~2구간(주천~운봉~인월), 그리고 영하의 눈보라..

by 정산 돌구름 2013. 1. 27.
지리산 둘레길 1~2코스(주천~운봉~인월), 그리고 영하의 눈보라...

 

 

산행일자 : 2013년 1월 27일(일)

기상상황 : 흐리고 눈보라(강풍과 눈보라까지 몰아친 영하의 추운 날씨)

산 행  팀 : 광주알파인클럽 - 회비 27,000원

산행코스 : 지리산둘레길 1~2코스(전북 남원)

   제1코스(주천~운봉, 14.3km) : 주천면~내송~솔정지~구룡치~회덕~노치~질매재~가장~행정~양묘장~운봉읍

   제2코스(운봉~인월, 9.4km) : 운봉읍~서림공원~북천~신기~비전~군화동~흥부골자연휴양림~월평~인월면

구간별소요시간 : 약 23.7km / 6시간30분소요

   주천면(08:45)~내송(08:57)~개미정지(09:07)~솔정지(09:23)~구룡치(09:45)~용소나무(09:57)~사무락다무락(10:08)~회덕마을(10:20)

   ~노치(10:40~55)~덕산저수지(11:00)~동복오씨묘역(11:15)~가장마을(11:25)~가장교(11:38)~행정마을(11:50~12:15)~양묘장(12:35)

   ~운봉초교(12:50)~2코스시작(12:55)~서림공원(12:58~13:08)~북천마을(13:25)~황산대첩비&비전마을(13:50~14:00)~군화동(14:10)

   ~대덕리조트(14:20)~옥계호(14:25)~흥부골자연휴양림(14:50)~구인월(15:05)~월평마을(15:10)~인월면(15:15)

교통상황

   비엔날레(07:00~20)~88고속~남원휴게소~남원IC~24번~19번~60번~주천면(08:30)

   구인월교(15:25)~37번~인월황토사우나(15:35~16:50)~지리산IC~88도로~비엔날레(18:00)

 

 

둘레길 소개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둘레의 전북․전남․경남 등 3개도, 남원․구례․하동․산청․함양 등 5개시․군의 21개읍․면 117개 마을을 잇는

   21개구간 274km로 지리산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각종 자원조사와 정비를 통해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環)형으로 연결한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잇고 보듬는 사람과 생명, 성찰과 순례의 길이기도 하다.

   전북 남원 46㎞, 경남 함양 23㎞, 산청 60㎞, 하동 68㎞, 전남 구례 77㎞ 등 총 274km를 숲길(43.8%), 농로(20.8%), 마을길

   (19.9%) 등으로 이어져 있다.

   2007년1월24일 사단법인 숲길을 창립하여 지리산둘레길 조사, 설계, 정비사업을 추진하였고, 2008년3 지리산둘레길안내센터

   사무동을 완공하였다.

   2008년4월27일 ‘지리산둘레길’ 시범구간인 남원 산내~함양 휴천의 개통식을 시작으로, 2008년10월16일 인월~산내 구간 개통,

   2009년5월22일 남원과 산청구간 총연장 70km를 개통하였다.

   2011년5월, 총 209.3km(남원, 함양, 산청, 구례, 하동) 개통하였고, 2012년 5월 총 274km 환형의 전체구간을 완전 개통하였다.

 

   <제1코스>

   제1코스는 전북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과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14.3km 구간으로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면서 해발 500m의

   운봉고원의 너른 들판, 6개의 마을을 잇는 옛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이 지금도 잘 남아있는 구간이다.

   회덕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은 남원장으로, 노치에서 운봉으로 가는 길은 운봉장을 보러 다녔던 길이다.

   특히 10km의 옛길 중 구룡치와 솔정지를 잇는 회덕~내송까지의 옛길(4.2km)은 길 폭도 넉넉하고 노면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경사도가 완만하여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솔숲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다...

 

둘레길 1코스가 시작되는 남원시 주천면(朱川面)..

주천면은 동쪽으로는 운봉읍·산내면, 서쪽은 노암동·송동면·수지면, 남쪽은 전남 구례 산동면, 북쪽은 이백면에 접한다.

지리산의 주능선 북쪽 경사면에 위치하여, 동쪽은 고리봉 등의 고산지대로서 면계를 이루고, 남쪽은 다름재·밤재 등 지리산의 북서

능선에 의해 전남과 도계가 된다. 면의 남동부는 해발 500∼1,300m의 높은 산지이며, 덕치리·고기리와 같은 해발 500∼600m의 고원과

용궁리와 같은 해발 150∼300m의 분지가 발달하였다..

 

외평마을을 지나고 본격적인 둘레길을 시작한다..

외평마을은 약 600여 년 전 10여 호의 마을을 이루었으나 농업용수가 마땅치 않았으나, 용궁마을에 장안저수지를 만들면서

식수 및 농업용수가 해결되어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때부터 숙성치를 넘어 구례군 산동면(당시는 남원부) 원달리로 통하는 길이 있었는데, 응양에서 말을 갈아타고 농협 창고 뒤편에서

쉬어가는 곳이어서 <원터거리>라 하였는데, 경치가 수려하여 감탄을 자아낸 곳이라 전한다...

 

멀리 만복대 능선은 구름에 가려있다..

 

다시 하천을 건너면..

 

비부정식당을 지나고..

 

잠시 도로를 따라간다..

 

내송마을로 들어서는 갈림길..

 

안솔치라 불리는 내송마을..

약 600여 년 전 한양 조(趙)씨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그 후로 경주 김(金)씨, 서산 류(柳)씨 등 여러 성씨들이 차례로 들어와 30여호

마을을 이루면서 주위의 비옥한 농토와 산림을 토대로 부유한 마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 출신 조경남(趙慶南)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잠시 오르면 조경남 의병장군의 전설이 서린 개미정지..

 

장꾼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가파르게 올라 '솔정자'(솔정지)에 이른다..

솔정자는 20여년 전만 해도 나무하러 지게를 지고 가다가 고개를 오르기 전에 땀을 식히고 주천 들녘과 멀리 숙성치와 밤재를

바라보던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던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정유재란 당시 숙성치를 넘어 남원성을 향하는 왜군을 향해 조경남 장군이 활시위를 당겼던 곳이라고도 한다...

 

잠시 임도를 따라간다...

 

구룡치로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

 

구룡치 능선...

구룡치는 주천면의 여러 마을과 멀리 달궁마을에서 남원 장을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

달궁마을 주민들은 거리가 멀어 남원 장에 가려면 2박3일에 걸쳐 다녀와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구룡치를 장길로 이용하는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백중(음력 7월15일)이 지나고 마을별로 구간을 나누어서 길을 보수해서 이용해 왔는데

지금도 예전의 보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용 소나무.. 

 

소나무 한그루가 용틀임 하듯이 꼬여져 다른 소나무를 휘감는 보기드문 현상을 볼 수 있다...

 

위로 올라가며 다시한번 휘감아 돈다..

 

아늑한 소나무 오솔길..

 

조그만 연못.. 목마른 산짐승들의 고마운 샘터.... 

 

사무락다무락...

 

돌들로 탑을 쌓아놓은 ‘사무락다무락’을 만난다...

 

사무락다무락은 사망(事望)다무락(담벼락의 남원말)이 운율에 맞춰 변천된 것으로 보이는데,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무사함을 빌고 액운을 막아 화를 없애고자 지날 때 마다 돌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나무사이로 회덕마을이 보인다..

 

쉼터를 지나고...

 

아름다운 징검다리...

 

지리산둘레길과 순환길의 갈림길...

 

지난해 걸었던 구룡폭포순환코스는 우측으로 꺾어 내려서고 둘레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주천면에서 6km왔다..

 

정자나무 쉼터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잠시 길에서 벗어나 있는 전북 민속자료 제35호인 덕치리 초가를 둘러본다...

 

회덕마을은 평야보다 임야가 많기 때문에 짚을 이어 만든 지붕보다 억새를 이용하여 지붕을 만들었으며..

 

현재도 두 가구가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회덕마을은 임진왜란 때 밀양 박(朴)씨가 피난하여 살게된 것이 마을을 이룬 시초라고 한다.

원래는 마을 이름을 남원장을 보러 운봉에서 오는 길과 달궁쪽에서 오는 길이 모인다고 해서 “모데기”라 불렀다.

그 뜻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을 한 곳에 모아 이 마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농로길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멀리 노치마을 뒤로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바라보인다...

 

회덕마을 바로 옆에 있는 노치마을은 백두대간 길이 통과하는 유일한 마을이다.

조선초에 경주 정(鄭)씨가 머물러 살고 이어 경주 이(李)씨가 들어와 살게 되어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노치마을은 해발 500m의 고랭지로서 서쪽에는 구룡폭포와 구룡치가 있으며 뒤에는 덕음산이 있고 지리산의 관문이라고 말하는

고리봉과 만복대를 바라보고 있으며 구룡치를 끼고 있다.

마을에서는 마을 이름을 “갈재”라고 부르는데 이는 산줄기의 높은 곳이 갈대로 덮인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노치마을은 고리봉에서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위에 있어 왼쪽은 섬진강이 되고 오른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는 마을이다.

 

 

 

노치샘...

 

샘 뒤편으로 오르면 소나무 다섯그루가 병풍처럼 서 있으며 바로 나무 밑에는 당산제전이 있다...

 

수령 500년의 소나무는 높이 17m, 흉고둘레 2.6m, 수관폭 10m, 지하고 2.5m이다.

마을 뒤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란히 서있으며 보는 사람마다 아름다움에 크게 감탄한다.

이 소나무 숲은 조선 초 경주정씨가 터를 잡고 경주이씨가 들어와 노치마을을 형성하면서 지리적 산세가 너무 좋아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기 위해 이 터에 소나무를 심어 정성 드려서 가꾸어 형성되었다...

 

당산제(堂山祭)는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 마을에서 7월 백중에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올리는 제사였다.

옛날 노치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민씨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그들 중에 짚신을 만들어 팔았던 가난한 거지가 있었다.

추운 겨울에 거지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그를 묻어 주려고 하였으나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묻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관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눈이 녹아있는 땅을 발견하고 그곳에 묻어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황룡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었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이 산에 보답하기 위해서 음력 1월1일 밤 12시에 주산제(主山祭), 곧 당산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노치마을 당산제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월1일에 지냈는데, 몇년전 자손이 없던 마을노인 두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전답을 동네

당산답으로 기증을 하여 마을에서 해마다 7월15일에 제사를 지내다가 얼마 전부터 당산제를 7월 백중으로 옮겨서 지내게 되었다.

마을 뒷산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은 소나무와 토석단이 결합된 형태이고, 할머니 당산은 큰 바위이다.

당산제를 지내기 한 달 전에 제주로 축관, 헌관, 밑주비(음식 장만하는 집)를 선정한다.

이들은 먼저 동네 우물물을 퍼낸 후 대나무와 금줄을 둘러서 외부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 당산제를 지낼 때는 오전에 금줄을 쳐놓은 우물물로 음식을 마련하여, 당일 자정에 뒷당산(할아버지 당산)에서 먼저

제를 지내고, 바로 내려와서 우물에 친 금줄을 걷어다가 마을의 조산에 쳤다. 당산제를 지내는 날은 모든 사람이 문밖출입을 삼가고,

비린 것을 먹으면 안된다. 또 상주집을 제외한 모든 집 대문에 금줄을 치며 특히 제주의 집에는 마당에서 부엌까지 황토를 깔아 놓는다.

옛날에는 정성이 부족하면 호랑이가 동네 개를 물어갔다고 한다.

당산제를 지낼 때 불을 켜놓으면 정월 대보름날까지 그대로 놓되, 한밤중에라도 꺼지면 즉시 다시 켜놓았다고 한다..

 

다시 마을로 내려와 길을 간다...

 

덕산저수지옆을 지난다.. 주천면부터 이곳까지는 20년 전까지 운봉, 산내 사람들이 남원장을 보러 다니던 옛길이다..

 

잠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거대한 동복오씨 묘역...

 

묘역 옆에 심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심수정에서 바라본 덕산저수지...

 

바로 아래의 쉼터...

 

소망탑도 있다..

 

가장마을로 내여선다..

가장마을은 풍수지리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화장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가장리(佳粧里)라 불렀다 한다.

지금은 들녘에 농사짓는 움막터를 뜻하는 농막장(庄) 자를 써 가장리(佳庄里)로 쓰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옥녀봉 아래에 옥녀가 베를 짜는 옥녀직금의 천하명당이 있다고 믿고 있다.

300여 년 전 이곳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동복 오(吳)씨와 강릉 유(劉)씨라고 하며 그 후 창녕 조씨와 김씨, 박씨 등이 입주하게 되었다.

마을이 뱀 형국으로 마을 앞에 입석을 세워 뱀의 기를 눌러 마을의 액 막음을 하고 있다...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간다...

 

눈발은 계속 이어지고..

 

억새가 무성한 하천길...

 

바로 옆 서어나무 숲이 바라보이고...

 

람천을 가로지르는 가장교를 지난다...

 

서어나무숲 마을로 불리는 행정마을...

 

행정마을에서 잠시 쉬어간다..

 

아무도 없는 마을 정자에서 점심을 간단히 헤치우고...

 

둑방을 따라 잠시 서어나무숲에 들른다..

 

행정마을에 있는 서어나무 숲은 ‘제1회 아름다운 숲’ 대상을 받은 곳으로...

 

수백년된 서어나무들이 아름드리 줄지어 서서 마을을 지켜주는 곳이다...

 

서어나무는 한국 원산으로 황해도, 강원도 이남의 산지에서 자생하는 낙엽활엽교목이다.

내조성이 강해 해안지방에서도 잘 자라고 온대림지역에서 잘 발달되어 있다.

공해에 대한 저항성이 약해 도심지 주변에서는 생육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다시 돌아와 행정교를 건넌다..

 

게이트볼장 옆으로 바래봉 둘레길 안내도가 있다..

 

둑을 지나 엄계교를 건넌다..

 

하얗게 얼어붙은 람천.. 그리고 억새...

 

양묘사업장을 지난다..

 

운봉읍이 다가선다...

운봉은 1일과 6일로 끝나는 날에 장이 서는데, 주로 운봉과 주천에서 많이 오며 각종 잡화, 곡물, 옷 등이 주로 팔리며

과거에는 목기와 곶감으로 유명하였다.

지리산북부권역장은 1,6일 운봉장, 2,7일 함양장, 3,8일 인월장, 4,9일 남원장, 5,10일 마천장이 서고,

각종 장꾼들이 이지역의 장터를 빙빙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시가지에 들어서면 예전의 영화에서나 볼법한 70년대식 건물이 늘어서 있는 운봉 읍내 거리를 만나게 된다...

 

운봉초등학교 앞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제2코스>

제2코스는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9.4km 구간으로 오른쪽은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로 옛 통영별로 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너른 운봉 들녘을 따라 지리산 서북능선과 백두대간을 조망하며 호쾌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전 구간이 제방길과 임도로 되어 있어 길 폭이 충분히 넓어 여럿이 함께 걷기에 좋은 평지길이고, 황산대첩비, 국악의성지, 송흥록 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즐기면서 걷기에 좋은 곳이다..

 

운봉읍을 빠져나오면 서림공원으로 이어지는 2코스...

 

서림공원으로 향한다..

 

뒤돌아본 운봉읍, 그리고 운무에 잠긴 바래봉능선...

 

서림공원에 이른다..

 

악한 기운을 막는다는 돌장승인 진서대장군...

 

건너편의 방어대장군이 마주하고 있다..

 

서림정건립비... 잠시 정자에서 몸을 녹이며 따뜻한 커피 한잔을 하고 떠난다..

 

운봉 읍내의 북쪽 냇가의 북천마을..

소나무가 우거진 마을이라 벽송동(碧松洞), 객사가 있는 마을이라 객사마을로도 불리었다.

석장승 2개가 늠름하게 마을을 지키고 있다..

 

비전마을~서림공원으로 이어지는 5km의 제방길은 너른 운봉 들녘을 적시는 젖줄인 람천을 따라 걷는 길로 천연기념물인 수달과 원앙

외에 여러 종류의 동식물을 볼 수 있다...

 

다시 람천을 건고..

 

계속 이어지는 둑방길..

 

길가에는 초봉이라는 표석..

 

가도가도 끝이없이 이어지는 길...

 

건너편으로 황산대첩비가 바라보인다..

 

동편제 쉼터...

 

황산대첩비를 보기 위해 들어선다..

 

삼문을 들어서고...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1380년(우왕6년) 이성계(李成桂), 이두란(李豆蘭) 장군이 황산에서 왜적 아지발도(阿只拔都)군을 물리친 황산대첩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1577년(선조10년)에 세운 승전비로 높이 4.25m이다.

김귀영(金貴榮)이 비문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을 쓰고, 남응운(南應雲)이 글을 새겼으며, 박광옥(朴光玉)이 세웠다.

비각은 1667년(현종 8)에 현감 허제(許濟)가 건립하였으나 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파편만 남아 있는 정도였다.

1957년에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그대로 이용하여 본래의 좌대를 세우고, 1973년 보호각을 세웠다.

중건된 비는 쌍귀(雙龜)를 떠서 새겨진 듯하며, 본래 모양의 높이·너비·두께 등은 정확히 고찰할 수 없다.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옛날 태조가 승전한 황산이 시대가 흐르고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청에 따라 왕명으로 건립하였음을 비롯, 이성계가 10배의 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는 명문 등이 실려 있다.

글씨는 오로지 조맹부(趙孟頫)의 글씨체를 닮은 것으로 결구에 허한 곳이 많고 필력도 주경하지 못하다.

<동국금석평 東國金石評>에 그의 글씨를 비(肥)와 속(俗)으로 평하였는데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파비각(破碑閣)..

사적 제104호로 지정된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에 있는 비각(碑閣)으로 1977년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고려말 이성계가 남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를 황산(荒山)에서 격퇴한 전공을 기록한 황산대첩비를 파괴하였는데

파비각에는 그때 파괴된 황산대첩비의 일부 파편들이 보관되어 있다.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는‘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라는 공문을 각 도의 일본인 경찰부장들에게 발송해 조선의 일본관련

비석들을 찾아내 없애라고 지시했다. 그때 일본경찰들은 황산대첩비를 비롯한 전국의 일본 관련 전승비와 대첩비 20여 기를 깨부수고,

비석의 비문을 정으로 쪼아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황산대첩비지에는 파비각 외에 1957년 본래의 좌대에 복원한 황산대첩비와 1958년 건립한 황산대첩사적비,

1973년 사학자 신석호(申奭鎬)가 황산대첩의 사적을 기술하여 세운 황산대첩기념비, 어휘각을 비롯하여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들과 홍살문·담장 등의 부속건물들이 조성되어 있다..

 

사적비각..

 

 

어휘각(御諱閣)..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 다음해인 1381년 본 석벽에 8원수4종사관의 명단을 새기게 하여 황산대첩의 승리가 자기 혼자만의 공이 아니라

여러사람의 공으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는 성지(聖旨)를 표현했던 유일한 유적이다...

 

오센 세월동안 뚜렷하게 남아있던 성적(聖蹟)이 일제강점기 문화말살정책에 따라 비전을 폭파하고 정으로 쪼아 현재 그 잔영만

남아있는 것을 1973년 어휘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황산대첩비를 떠난 비전마을로...

 

비전마을앞 소리쉼터...

 

잠시 송흥록과 박초월생가터로 들어선다..

 

내부전경...

 

박초월생가..

박초월은 전남 승주군 주암면 봉암리에서 출생하여 어렸을 때 남원으로 이사하였으며, 아영면과 운봉읍에서 생활하면서 판소리를 익힌

것으로 전해진다. 박초월은 12살 때부터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5살 때부터는 송만갑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20살 무렵에는 오수암으로부터 서편제「흥보가」를 배웠고, 25살 무렵에는 정광수로부터 유성준 바디「수궁가」를 배웠다.

박초월은 임방울에게도 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 16살 때 전주에서 개최된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여 이름을 얻었다.

18살 때부터 폴리돌(Polydol)에서「육자배기」,「흥타령」,「춘향가」 등을 녹음하였다.

17살 때에는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했고, 이후 대동가극단, 동일창극단 등에서 활동했다.

동일창극단에서는 극단의 대 성공작인「일목장군」에서 여주인공인 아리주공주 역으로 크게 인기를 얻었다.

해방 후 박초월은「춘향전」의 월매 역으로는 당대 제일인자라는 평을 들었다.

1976년에는 서베를린 국제현대음악제에 참가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박초월은 1955년 박귀희와 함께‘대한민속예술원’을 창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후에 국악예술학교로 발전하였다. 51살 때인 1967년에는 유성준 바디「수궁가」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박초월의 제자로는 남해성, 최난수, 최승희, 김수연, 조통달, 박양덕, 전정민, 왕기창 등이 있다...

 

송흥록생가...

남원시 운봉 출생인 송흥록은 8명창의 한 사람으로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았다.

판소리의 중시조(中始祖)로서 모든 가조(歌調)를 집대성하는 한편, 매부인 김성옥(金成玉)이 시작한 진양조를 자신의 노래에 도입,

완성하였으며, 그의 창법은 발성초(發聲初)가 극히 신중하였고, 웅건·청담한 창법을 가진 동편제(東便制)를 이룩하였다.

특히 춘향가 중의 옥중가(獄中歌)와 변강쇠타령, 적벽가(赤壁歌) 등을 잘 불렀다.

현대 여류 판소리 명창으로서 김소희, 박록주와 함께 1930년대부터 우리나라 여류 판소리를 대표해 온 인물이다.

서슬과 구성이 있는 목으로 서민적 정서를 표현함으로써 김소희와는 다른 여창 판소리의 경지를 개척했다.

창극과 여성 국극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는데「춘향가」의 월매 역으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수궁가」로 중요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로 지정받았으며, 현재 박초월 바디「수궁가」「흥보가」가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비전마을...

황산대첩비가 세워지고 이 비각을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이 비(碑) 앞에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비전(碑前)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마을 5리 전에 하마정이 있어 말을 탄 관리가 황산대첩비를 지날 때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 이 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와

비 앞에서 절을 하였다. 이곳에는 구한 말까지 2층 정자가 있어 주변의 주막과 기녀(기생)와 소리꾼, 가마꾼(轎軍)이 상주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비전을 역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말 동편제의 가왕(歌王)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송만갑이 태어난 곳이고

명창 박초월이 성장한 곳으로 동편제의 고향으로 국악의성지가 있는 곳이다...

 

둑방을 따라가면 군화마을...

1961년 대홍수 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들의 가옥을 군인들이 주둔하며서 13가구를 건립하였는데,

이주 후 마을 이름을 ‘군인들이 지은 화수 마을’이란 뜻으로 군화동(軍花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원불교일까? 길가에 남무대각세존 석가모니불이 있다...

 

람천 건너편의 대덕리조트..

 

대덕리조트 뒤편의 옥계호 표지석...

 

거대한 둑을 지나 올라서면 옥계호..

 

일진광풍이 눈보라를 휘감고...

 

지나온 둑방...

 

한없이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가면 흥부골자연휴양림이 내려다보인다..

 

자연휴양림에 내려서면...

 

흥부골 자연휴양림..

1997년 조성되기 시작하여 2002년 개장하였다. 약 1㎢에 단체수련동(2동)·숲속의집(7동)·방갈로(3동)·취사장·공동샤워장·급수대를

비롯하여 향토민속놀이마당·교육자료관 등 총 17동의 건물이 있다.

덕두산(德頭山, 1,150m) 정상까지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휴양림에서 덕두산 정상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산자락에 수령 약 55년의 잣나무 군락이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 좋고, 경관 또한 뛰어나다..

 

월평의 민박집들..

 

「구인월마을」유래비에 의하면 고려 제23대 우왕6년(1380년)9월 삼도순찰사 이성계장군이 이끄는 고려토벌군과 인월에 본거지를 

왜장 아지발도가 황산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긴박한 전투가 진행하는 동안 날이 어두워지자 적의 행동을 탐지하기 위하여 이성계장군이

하늘을 우러러 달뜨기를 기원하니 동쪽에서 밝은 달이 떠 올라 아지발도의 목을 쏘아 대승하였다고 전한다.

이 황산대첩에서 달을 끌어 앞당겨 뜨게 하였다는 유래가 전하여져 마을 이름을 끌 인(引)자와 달 월(月)자를 써서 인월(引月)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후 인월보다 먼저 생긴 마을이라 하여 옛 구(舊)자를 써서 구인월이라 전해지고 있다..

 

월평마을.. 

 

운봉에서 박씨가 처음 입주하고 새마을 신촌으로 불리다가 후에 마을 형국이 반월형이라 월평(月坪)이라 불렀다...

 

또는 마을 터가 동쪽 팔랑치를 마주하고 있어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는다..

 

월평(月坪)이란 마을 이름이 말하여 주듯이 ‘달이 뜨면 바로 보이는 언덕’이란 뜻으로 월평이라 하였다...

 

1800년대 후반 천석꾼이 운봉 박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사람을 모아 살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오늘의 종점 인월면...

 

인월면은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서울, 남원, 함양 등지에서 접근이 쉽다.

인월에서 비전마을로 가는 길은 조선시대의 7대 대로중 하나인 통영별로의 일부로 이 길은 비전에서는 여원재를 거쳐 남원, 오수, 전주를

거쳐 서울로 이어지고, 인월에서는 팔랑치, 함양을 거쳐 진주로 이어지던 옛길이다...

 

산행 후 인월 황토사우나에서의 뜨끈한 온천욕... 그리고 채식뷔폐로의 뒤풀이..

멀리 덕두산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