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기행] 광주유형문화재 제9호(1985년2월25일) 광주향교(光州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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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기행] 광주유형문화재 제9호(1985년2월25일) 광주향교(光州鄕校)..

by 정산 돌구름 2014. 10. 26.
광주유형문화재 제9호(1985년2월25일) 광주향교(光州鄕校)..

 

○ 탐방일 : 2014년 10월 26일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5(구동 22-3)

○ 광주향교 소개

 1398년(태조7년)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 중등교육과 지방민 교화를 위해 서석산 장원봉 아래에 창건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호환(虎患)이 있어서 동문 안으로 옮겨 세웠다가, 1488년(성종 19년)에 수해(水害)로 현감 권수평(權守平)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고, 현재 건물은 후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1974년 대성전을 보수 ·단청하였고, 1976년 동 ·서재와 1978년에 명륜당을, 1981년에 담장 등 외관을 수리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비각·동무(東廡) ·서무(西廡) ·동재 ·서재·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5성(五聖), 송조 6현(宋朝六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외삼문 밖에 있는 비각에는 흥학비(興學碑)와 중수비(重修碑)·위성묘비(衛聖廟碑) 등이 있는데, 흥학비는 1563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대승(奇大升)이 찬기(撰記)하고 박광옥(朴光玉)이 음기(陰記)를 찬하였다.

  중수비는 둘이 있는데 하나는 1803년에 목사 김선(金銑)이 중수하고 교리 기학민(奇學敏)이 찬기한 것이며,

  또 하나는 1855년에 목사 홍재응(洪在應)이 중수하고 기정진(奇正鎭)이 찬기한 것이다.

  위성묘비는 권일제가 성묘를 지킨 것을 1843년에 목사 조철영(趙徹永)이 그 기(記)를 새겨 세운 비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소장 전적은 189종 306책으로 주로 경서와 문집류이며,

  필사본인 <관안(官案)>·<광주유림안(光州儒林案)>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광주향교는 1398년(태조 7년) 유학을 온 백성에게 가르쳐 교화를 시키기위해 세워졌다.

처음에는 서석산(무등산) 장원봉 아래에 있었으나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는 바람에 성의 동문(대인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곳은 좁고, 건물도 오래되고, 땅이 낮아 여러가지 불편과 홍수의 피해를 많이 입어서 1488년 권수평현감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후 지금의 광주향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지금의 자리에 향교를 세울 때 권수평 현감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땅과 책과 건축자재 등을 사서 향교를 짓는 것을 보고 백성들이

감동하여 너도나도 향교 짓는 일에 함께하여 몇 달 만에 지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고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하던 때 일본군이 광주에 쳐들어와 향교의 모든 건물들을

불 지른 후 1600년 유림 및 백성들이 다시 지었다.

1841년 화재로 인해 명륜당과 동·서재가 불탔고, 조철명 목사가 재건한 후로 수차례의 수리와 재건축을 한 후 지금에 이른다..

 

하마비(下馬碑)는 <신분, 나이를 막론하고 지나갈 때는 말에서 내려라>라는 뜻을 가진 비석으로

공자님이 계신 신성한 궁전(교궁)이므로 경건한 마음으로 향교를 지나가라는 뜻이 있다.

 

비각(碑閣)에는 중수비와 중건비가 들어서 있다..

 

외삼문 오른쪽에 있으며 향교의 건축 및 이전, 건물들의 신축과 보수를 기념하여 세워놓은 비석으로써,

향교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나 역사 등이 기록되어 있다..

 

외삼문(外三門)은 <밖에 있는 세 칸의 문>이라는 뜻으로 내삼문과 용도는 같으나

한 가지 차이점은 외삼문 중문은 지방의 수령(시장, 군수, 도지사)이나 왕은 출입이 가능하나 내삼문은 불가하는 점이다.

 

200년이 넘은 보호수 은행나무..

 

명륜단(明倫堂)..

명륜당은 성균관이나 지방의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던 강당이다.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맹자> 등문공편(滕文公篇)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글을 배우고 익혔으며, 또한 왕이 직접 유생들에게 강시한 곳이다..


8칸으로 된 학교기능의 대표적 건물로서 학생(교생)들을 모아놓고 강이란 문답식 수업을 했던 장소이다.

현재 유교경전인 4서 5경 등 고급반 한문교육을 하고 있는 장소이며 일반인 남여들을 위한 예절 및 한문교육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륜당은 2008년 재보수ㆍ수리 하였다..

 

동재(東齋)는 <동쪽에 있는 집>이란 뜻으로 양반의 자제들이 기숙사로 사용했다.

현재는 전통혼례시 신부대기실과 관리자 처소로 사용하고 있다.

예전엔 전통예절, 다도, 폐백실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서무에서 하고 있다..

 

서재(西)는 <서쪽에 있는 집>이란 뜻으로 평민의 자제들이 기숙사 건물로 사용했다.

현재는 향교 전교(교장) 및 어르신들께서 사무실로 쓰고 있다..

 

내삼문(內三門)은 <안쪽에 있는 세 칸의 문>이란 뜻으로 대성전을 출입하는 문으로 학교와 사당을 구분하는 경계이다.

해가 뜨고지는 자연법칙에 따라 동쪽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나오며, 중문은 제수(祭隋), 제기(祭器), 축문(祝門)만 출입이 가능하다..

 

대성전(大成殿).. <공자님의 궁전>이란 뜻으로 공자님과 그 제자, 우리나라 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음력 2월과 8월 성정일(길일)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방수령 및 유림들이 성균관과 전국 234개 향교에서 일제히 경건하게 드린다.

석전대제(釋奠大祭)는 문묘인 성균관의 대성전에서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과 선현(先賢)들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이다.

모든 유교적 제사 의식의 전범(典範)이며, 가장 규모가 큰 제사이기 때문에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석전은 희생(犧牲)과 폐백(幣帛) 그리고 합악(合樂)과 헌수(獻酬)가 있는 성대한 제사의식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조성되어 있고,

5성(五聖), 송조 6현(宋朝六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5성(聖)은 대성지성 문선왕 공자(大成至聖 文宣王 孔子), 복성공 안자(復聖公 顔子), 종성공 증자(宗聖公 曾子), 술성공 자사

(述聖公 子思), 아성공 맹자(亞聖公 孟子)를 일컫고..

 

송조 6현(宋朝 六賢)은 염계 주돈이(濂溪 周敦頤), 명도 정호(程明 程顥), 이천 정이(伊川 程頤), 안락 소옹(安樂 邵雍 ),

횡거 장재(橫渠 張載), 회암 주희(晦庵 熹) 말한다..

 

동국18현(東國一八賢)은 홍유후 설총(弘儒侯 薛聰),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회헌 안향(晦軒 安珦),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황

(退溪 李滉),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율곡 이이(栗谷 李珥), 우계 성혼(牛溪 成渾),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중봉 조헌

(重峯 趙憲),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 등이다..

 

 

東·西撫(동·서무)는 대성전에 비해 격이 낮은 건물로서 <동, 서쪽의 행랑채>이다.

1951년 이전까지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으나 1951년 성균관에서 "대성전에 중국 사람을 모시고 우리나라 분들께는

격이 낮은 곳에 모시는것은 사대주의적인 발상이다."라고 해서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려는 의도로 대성전으로 옮긴 후

현재 제수창고인 전사청으로 쓰고 있습니다..

<서무>

 

<동무>

 

동무 옆에는 수령 250년이 넘은 측백나무 보호수가 서있다..

 

문회재(文會齋)는 사마재 라고도 하며, <학문을 하기 위해 모이는 집>이란 뜻이다.

옛날 생원과 진사(과거 3번의 시험 중 1차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일종의 대학 건물이다.

원래 향교의 동쪽 외곽에 있었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며 없어졌다가 1987년 정해규 전교 때 복원했다.

현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2시간씩 기초한자, 사자소학, 명심보감, 추구 등 중급 한자반 교실로 쓰고 있다.

특히 월요일과 목요일 동양철학, 4서5경, 관혼상제 등을 강의하는 유교대학 강의실로도 쓰고 있다..

 

양사재(養士齋)

육영재라고도 하며, <선비를 양성하는 집>이란 뜻으로 조선시대 지방 영재 40명을 선발하여 과거시험을 준비시키던 입시학원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교 건물쯤되며, 향교의 남쪽에 있었으나 소실된 후 1985년 정해규 전교 때 유림들과 더불어 복원했다...

 

현재 매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서예교실 및 전통혼례 폐백실로도 사용하고 있으며 각 단체의 소회의실로도 사용되고 있다..

 

충효교육관(忠孝敎育館)..

 

충효교육관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전통체험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유림회관(儒林會館)..

현대식으로 1996년 지은 건물로 2층은 예식장 및 회의장으로 쓰고 있고 1층은 향교, 유도회 및 재단 사무실로 쓰고 있다.

우리나라 성씨의 각종 도서와 경전 및 계보를 모아 놓은 족보도서관이 있으며 신청시 열람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