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기행] 조선 왕조의 법궁, 조선의 중심지 사적 제117호 경복궁(景福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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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기행] 조선 왕조의 법궁, 조선의 중심지 사적 제117호 경복궁(景福宮)

by 정산 돌구름 2014. 9. 25.
조선 왕조의 법궁, 조선의 중심지 사적 제117호 경복궁(景福宮)..

 

 

○ 탐방일 : 2014년 9월 25일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22

○ 경복궁 소개

  사적 제117호(1963년1월21일)인 경복궁은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렸다.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궁궐로 이용되었다.

  이성계가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크지 않았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5칸에 상하층 월대(月臺)와 행랑·근정문·천랑(穿廊)·각루(角樓)·강녕전(康寧殿) 7칸, 연생전(延生殿)

  3칸, 경성전(慶成殿) 3칸, 왕의 평상시 집무처인 보평청(報平廳) 5칸 외에 상의원·중추원·삼군부(三軍府) 등이 마련되었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는데, 연못을 넓게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報漏閣)을 세우고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시설인 간의대(簡儀臺)를 마련하였다.

  강녕전 서쪽에는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였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강녕전 외에 교태전(交泰殿)·연생전·흠경각·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왕이 환도하였을 때 정릉동의 구 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궁의 복구 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선조는 환도한 뒤 경복궁에 가가(假家)라도 지을 것을 명하였고, 1606년에는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광화문과

  근정전 등 주요건물만이라도 우선 지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부 대신들이 ‘공사가 커서 1, 2년에 끝낼 수 없으므로 후에 일을 시작해야 한다’며 만류하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경복궁이 길(吉)하지 못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결국 왜란 후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과거 경복궁에서 단종이 쫓겨난 일이 있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가 사정전 뜰에서 왕의 친국(親鞫)에 이어 사약을 받은 일 등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광해군도 한때 경복궁성을 수축케 하고 중건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중건공사 개시: 1865년,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그 규모는 7,225칸 반이며 후원에 지어진 전각은 융문당(隆文堂)을 포함하여 256칸이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이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으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延吉堂)·

  경성전·연생전·인지당·흠경각·함원전·만경전·흥복전(興福殿)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수정전(修政殿)·천추전(千秋殿)·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또한, 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건물인 총독부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 밖에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

  1945년 광복 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일인(日人)들이 지었던 총독부청사는 정부종합청사로 활용되다가,

  1971년에 궁의 동북 담장 가까이에 지어진 목조기와건물 모양의 철근콘크리트조 건물에 들어있던 국립박물관이,

  1986년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이 건물로 이건되었다.

  구 총독부청사는 1995년 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으며, 원래 있던 흥례문 권역이 2001년 10월 복원·낙성되었다.

  한편, 일제에 의해 건물이 훼철되는 피해를 입은 경복궁을 복원하는 공사가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었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조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를 보면 궁 앞면에 광화문이 있고 동·서쪽에 건춘(建春)·영추(迎秋)의 두 문이 있으며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네 귀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있고 그 안에 개천(開川) 어구(御溝)가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어구에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 곧 영제교(永濟橋)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근정문이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이중으로 높이 쌓은 월대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정사를 보는 곳인 사정전이 있고 그 동·서쪽에 만춘전·천추전이 모두 남향으로 놓여 있다.

  사정전 뒤 향오문(嚮五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연침(燕寢)인 강녕전이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연생전·경성전이 있다.

  강녕전 뒤에는 양의문(兩儀門)이 있고 문 안에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이 있으며 잇대어서 동쪽에 원길헌(元吉軒)·서쪽에 함광각

  (含光閣)·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그 뒤로는 후원이 전개되어 소나무가 우거지고 연못·정자 등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흥례문으로부터 이곳까지에는 동서로 낭무(廊廡)가 각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이밖에 궁 서쪽에 수정전이 있고 그 위에 경회루가 있는데 수정전은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며,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또한 건춘문과 영추문 안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전 등이며,

  복원된 건물은 강녕전·자선당·태원전·광화문 등이다.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인 청계천과 외수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인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따른 것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

  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궁성의 정문이다. 국왕이 드나드는 정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그 규모와 격식 면에서도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또한, 담장 끝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두어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형식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에 세 개의 홍예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도록 하였다.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때를 알리는 데 사용하였다.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고 오문(午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은 석축기단(石築基壇)에 3개의 홍예문(虹霓門)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목조건축의 양식은 다포식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삼출목(內三出目), 외부는 제공(諸工)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雲工)을 만들었으며, 첨차(墅遮)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波蓮草刻)을 하였다.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으로 평가되었다.

광화문 3개의 궐문 중 가운데 칸이 높고 크다. 이곳은 임금이 행차하는 문이며 천정에는 주작(朱雀)을 그려 넣었다.

정면 좌우에는 상상의 동물이자 영물인 해태상을 설치했다.

광화문 앞으로는 궐외각사인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등 육조의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를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년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고,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1968년에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 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고, 도로확장을 위해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2006년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전통적인 옛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2010년8월15일에 완공되었다..

 

 

 

해태(獬豸)는 중국 고대부터 전해오는 상상의 동물로 해치(해태 獬, 해태 豸)라고도 한다.

중국 문헌인 <이물지(異物志)>에는 "동북 변방에 있는 짐승이며,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대사헌의 흉배에 가식(加飾)되기도 하였고,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여겨 궁궐 등에 장식되기도 하였다.

본래 뿔이 하나이고 성품이 충직한데,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들이받고 사람들이 서로 따지는 것을 들으면

옳지 못한 자를 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옛날 중국 우(禹) 임금 때 법을 맡았던 신하인 고요(皐陶)가 옥사를 다스릴 때 이 짐승을 써서 죄가 있는 사람을 들이받게 하였다든가,

상서로운 짐승이어서 옥송이 잘 해결되면 나타난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수문장청(守門將廳)..

초기에는 서반(西班) 종4품 이하의 무직자(武職者)로서, 국왕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윤번으로 궁궐문을 수비하게 하여

따로 이를 관장하는 기구를 두지 않았다.

정조 때 수문장 직제를 정하고 이를 관장할 수문장청을 설치하여 종6품 참상관(參上官) 13명, 종9품 참하관(參下官) 23명을 두었다.

수문장청은 대궐 내에 있었고, 수문장들이 9명씩 입직하면서 각 문을 수비하였는데, 실제 업무는 각 문의 개폐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업무의 중요도에 따라 입직은 왕의 선정을 뜻하는 수점(受點)으로 결정되었다..

 

협생문(協生門)은 동쪽 내부 담장에 난 문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구조다.

이극문, 즉 세자가 동궁으로 드는 오른편 측문에서 출발해 광화문 밖으로 나갈 때 세자가 이용했다..

 

흥례문(興禮門)은 1395년(태조 4년)에 창건된 것으로 원래는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1867년(고종 4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청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歷)에서 홍(弘)자를 피하기 위해 흥례문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다 1910년 일제강점기 주변이 훼손되었고, 191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흥례문을 비롯한 주변 행각이 모두 파괴되었다.

경복궁 복원사업의 5개 권역 가운데 침전(寢殿)·동궁(東宮)에 이어 3번째로 2001년10월26일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광화문(光化門)과 근정문(勤政門) 사이에 있는 경복궁의 중문(中門)으로 2층 목조건물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주변 행각과 유화문(維和門)·기별청(奇別廳)·영제교(永濟橋)·어도(御道)·금천(禁川, 또는 御溝) 등과 함께 복원되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원래의 지반보다 1.5m 높게 지었기 때문에 복원 때는 경복궁의 본래 모습대로 1.5m의 땅을 파내고

근정문과 같은 높이로 하였다..

 

 

유화문(維和門)은 경복궁 홍례문과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勤政門)으로 들어서기 전 좌측에 있는 문이다.

이 문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했던 궐내각사(闕內各司)의 관원(신하)들이 경복궁을 출입할 때 이용했던 문이다.

당시 경복궁 서쪽에는 행정을 담당했던 춘추관(春秋館), 승정원(承政院),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등 궐내각사들이 모여

있었는데 관원들이 출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건립되었던 문이다..

 

근정문(勤政門)은 흥례문을 지나 영제교를 건너면 나오는 근정전(勤政殿)의 정문이다.

근정문은 3문으로 되어있는데 흥례문과 마찬가지로 답도가 있고 큰 가운데 문으로는 왕만이 드나들었다.

근정문 양 옆 동서로 난 문으로는 문관과 무관의 전용 출입문이었다.

동쪽의 일화문(日華門)으로는 문관(文官)이 서쪽의 월화문(月華門)으로는 무관(武官)이 드나들었다.

<경복궁전도>에 의하면 일화문과 월화문이 현재의 위치가 아닌 근정전 좌우행각 앞쪽에 각각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현재의 일화문과 월화문의 위치는 고종 2년(1865년) 재건할 당시 재배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근정문에서도 왕위 즉위식 등 중요한 행사가 치러졌다.

왕이 승하하면 왕세자는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후에 근정전 옥좌에 앉는 절차를 밟았다.

이곳 근정문에서 왕위에 오른 역대 국왕으로는 단종(1452년), 성종(1469년), 선조(1567년)가 있다.

근정문은 궁궐의 법전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중층으로 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의 겹처마 다포계 양식에 우진각 지붕이다.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고종 4년(1867)에 재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국보 제223호(1985년1월8일) 근정전(勤政殿)..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 창건시 지어진 건물로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이 거행되었고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1395년에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의 것은 1867년(고종 4년) 11월에 흥선대원군이 136년만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다포양식(多包樣式)의 건물로,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이중의 월대를 설치하고 그위에 전각을 세웠다.

정면과 후면, 좌우 측면에 계단 설치되었으며 상, 하 월대에는 하엽동자를 받친 돌난간을 둘렀다.

각 계단과 월대 모서리에는 12지신상을 조각하였고 정면 계단에는 석수를 조각하였고 답도에는 봉황을 새겨넣었다.

다포양식의 전각은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의 중층 팔작지붕의 큰 직사각형 건물이다.

기단의 4면은 석란(石欄)으로 둘려지고, 월대가 있는 마당에는 박석을 깔았다.

월대 정면 계단 아래에서 근정문 방향으로 좌우에는 정1품에서 종9품까지 품계석(品階石)을 세웠다.

건물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을 정면으로 4개, 측면으로 3개씩을 세워 천장을 받들게 함과 동시에 궁전 안을 중앙부의

내진(內陣)과 주위를 도는 외진(外陣)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겸하게 했다.

중앙간 북쪽 후면에 방형의 보좌(寶座)를 두고, 그 단상에 어좌(御座)와 그뒤에 일월오악(日月五嶽, 일월곤륜도)을 그린 병장(屛障)을

세우고, 그 위에 화려한 보개(寶蓋)를 달았다.

두공은 상·하층이 외삼출목, 내사출목이며 내출목에서는 수설(垂舌)이나 앙설(仰舌)이 구름무늬처럼 새겨진 운궁(雲宮)으로 되었고,

살미[山彌] 표면의 초화각무늬[草花刻文]나 단청(丹靑)·금색쌍룡(金色雙龍)과 조화되어 화려한 장식적 효과를 낸다.

전체적으로 장식적 의장(意匠)을 마음껏 담고 있어, 다소 과식(過飾)의 감이 있기는 하나 조선 말기 건축의 정수라 할 수 있고,

당시 건축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표본적 건물이다.. 

 

 

 

 

 

 

 

 

 

 

사정문(思政門)은 근정전과 사정전 사이에 있는 삼문으로 이루어진 출입문으로 솟을대문이다..

 

 

보물 제1759호(2012년3월2일), 사정전(思政殿)..

1395년 태조 때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건립되었고 '사정(思政)'이라는 편전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다.

경복궁의 편전(便殿)으로 임금이 평상시에 머물면서 정사를 펼치던 곳이었다.

정전인 근정전 바로 뒷편에 위치하며 사이에 사정문이 있고 사정전 뒤로 향오문(嚮五門)을 통해 강녕전으로 연결된다.

건립당시에는 좌측에 가을, 겨울에 이용하는 천추전과 우측에 봄에 이용하는 만춘전이 서로 행랑으로 연결되어 건너갈 수 있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복궁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867년(고종 4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건립한 것이다.

하지만 태조 때 건립된 형태와는 달리 좌우 천추전과 만춘전이 서로 행랑으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전각으로 건립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며, 장대석으로 두른 기단을 3단으로 쌓았고 그 위에 전각을 세웠다.

마당보다 약간 높게 원주(圓柱)를 세웠으며, 4면의 기둥 사이는 토벽이 하나도 없이 사분합(四分閤)의 광창(光窓)과 문만으로 짰다.

내외 이출목(二出目)의 공포(拱包)로 짜여져 있고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였으며, 망새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배열하였다.

내부에는 어좌두었고 황금색 용상으로 장식되었으며 어좌 뒤로 일월곤륜도 병풍을 배치했다.

어좌 위로는 두마리의 용이 붉은색 여의주를 중심으로 배치된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천정은 우물천장으로 장식하였다..

 

 

 

 

 

 

 

 

 

 

 

용부문(用敷門)은 강녕전 남쪽 행각의 향오문 서편에 난 문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경복궁 중건 후 새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

1892년의 실록 기사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용부(用敷)'는 '백성들에게 오복을 펴서 줌'을 뜻한다..

 

경성전(慶成殿)은 1395년 경복궁의 창건 때 임금의 침전으로 건립되었다.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 연침(延寢)이었고 경성전은 서소침(西小寢), 연생전(延生殿)은 동소침(東小寢)으로 지어졌다.

건물의 방향은 동향이다. 경성전(慶成殿)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다시 지어졌다.

당시에는 응지당(膺祉堂)을 거쳐 강녕전까지 회랑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현재는 단독 건물로 남아있다..

 

 

 

연생전(延生殿)

1395년 경복궁 창건 때 건립된 강녕전의 부속건물이며 강녕전의 동쪽에 위치하는 작은 침전을 뜻하는 동소침(東小寢)으로 지어졌다.

강녕전의 좌측 서쪽에는 서소침(西小寢)인 경성전(慶成殿)이 나란히 지어졌고, 건물은 강녕전과 직각을 이루고 방향은 서향이다.

연생전(延生殿)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다시 지어졌다.

이때 연길당(延吉堂)이 새로운 침전으로 지어졌고 연길당을 거쳐 강녕전까지 회랑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현재는 단독건물로 남아있다..

 

응지당(膺祉堂)..

경복궁 내 임금의 처소인 강녕전(康寧殿)에 딸린 부속건물이며 위치는 강녕전 좌측에 있다.

연길당(延吉堂)과 좌우 짝을 이루는 쌍둥이 건물이다.

응지당이란 복을 받는 집이라는 뜻이며, 1867년(고종 4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연길당(延吉堂)과 함께 지어졌다.

강녕전은 응지당과 연길당 외 경성전(慶成殿), 연생전(延生殿)이 있어 5채의 침전으로 구성되었다.

이곳의 건물들은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內殿) 건물이며, 침전으로 사용하거나 신하를 접견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강녕전진찬도(康寧殿進饌圖)에 의하면 강녕전의 5채 건물은 서로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917년 경덕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전각들이 소실되자 응지당을 헐어 창덕궁을 복원하는 부재로 사용하였다.

1995년 경복궁 재건 공사 때 다시 복원되었다...

 

강녕전(康寧殿)

경복궁의 내전(內殿)이며 왕이 일상을 보내는 거처였으며 침전으로 사용한 전각(殿閣)이다.

1395년(태조 4)에 창건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건물 이름을 강녕전(康寧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은 오복(五福)의 하나로, 임금으로서 해야 할 이상적인 정치이념을 궁궐 건축에 반영한 유가(儒家)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강녕전의 동쪽 침전을 연생전(延生殿)이라고 지었고 서쪽 침전을 경성전(慶成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전은 임금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기에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웅장한 목조건축물이며 4단의 기단이 설치되고 가운데에는 월대를 설치하였다.

1553년(명종 8년)에 경복궁에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고 없어진 것을 이듬해 중건하고, 다시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한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재건하였으며, 그 후 1920년까지 제자리에 있었다.

1917년에 창덕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내전(內殿)이 불타버리자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을 다시 짓기위해 1920년에 강녕전을

헐어버리고 일부는 내전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1995년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강녕전을 다시 지었으며 그외 12개 전각이 복원되었다..

 

 

 

 

 

연길당(延生殿)..

경복궁 내 임금의 처소인 강녕전에 딸린 부속건물이며, 강녕전 우측에 있어 좌측의 응지당(膺祉堂)과 좌우 짝을 이루는 건물이다.

연길(延吉)이라는 이름은 복을 맞아 들인다는 뜻이며 1867년(고종 4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지어졌다.

강녕전은 응지당과 연길당 외 경성전(慶成殿), 연생전(延生殿)이 있어 5채의 침전으로 구성되었다.

이곳의 건물들은 임금이 거처하는 건물이며, 침전으로 사용하거나 신하를 접견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강녕전진찬도(康寧殿進饌圖)에 의하면 강녕전의 5채 건물은 서로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917년 경덕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전각들이 소실되자 연길당을 헐어 창덕궁을 복원하는 부재로 사용하였다.

1995년 경복궁 재건 공사 때 다시 복원되었다.. 

 

흥안당(興安堂)은 강녕전 동쪽 행각 위에 있는 당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북궐도형>과 <궁궐지>에 나타난다.

흥안(興安)은 '편안함을 일으킴'을 의미하므로 '편안하고 건강함'을 의미하는 강녕전의 뜻과 서로 통한다..

 

계광당(啓光堂)은 강녕전 동쪽 행각의 중앙에 있는 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만들었다.

계광(啓光)은 '밝은 빛이 열린다'는 뜻이다. 동쪽에 위치한 건물이므로 이와 같이 작명하였다고 한다..

 

수경당(壽慶堂)은 강녕전 동편 행각의 아래쪽에 위치한 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지어졌다.

수경(壽慶)은 '장수를 누리는 복'을 뜻하는데, 수(壽)는 장수를 뜻하고, 경(慶)은 복을 의미한다.

<서경>(홍범)에서는 '수'를 오복의 으뜸으로 꼽는다.

오복의 첫번째는 오래 사는 것[壽]이고, 두번째는 부(富)이고, 세번째는 강녕(康寧)한 것이고,

네번째는 덕을 좋아하는 것[攸好德]이고, 다섯번째는 목숨을 살펴서 마치는 것[考終命]이다..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양의문(兩儀門)이라고 이름지었으며 음양의 조화를 의미한다..

 

교태전(交泰殿)..

1394년 경복궁 창건할 당시에는 교태전이 없었으며, 건립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세종 때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으로 불렀다.

교태전이라는 명칭은 주역의 64괘 중 태(泰)괘에서 따온 것인데 괘의 형상은 위로는 곤(坤)이고 아래는 건(乾)이 합쳐진 모양이다.

지천태(地天泰), 즉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면 9칸 측면 5칸이며 장대석 4벌대로 기단을 쌓아 장방형의 큰 규모의 전각으로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우측에는 원길헌(元吉軒)이 위치하고, 좌측에 함홍각(含弘閣), 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부속 건물로 연결되어 있다.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음양의 조화를 의미하는 양의문이며, 1553년 명종 때 경복궁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후 1555년(명종 I0년) 8월에 다시 지었으나 이것 역시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

1869년(고종 6년)에 재건하였으나 창덕궁 대화재로 내전이 불타자 이의 복구를 위해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서 재목으로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에 다시 중건한 것이다..

 

 

 

 

 

함홍각(含弘閣)은 교태전 서쪽에 붙어 있는 건물로 교태전과 이어져 있으며, 교태전을 중건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함홍(含弘)은 '함홍광대(含弘光大)'에서 온 말로 '포용하고 너그럽다'는 뜻이다..

 

내순당((乃順堂)은 교태전의 서쪽 행각 아래쪽에 위치한 당으로 교태전 동쪽 행각의 체인당과 짝을 이룬다.

내순(乃順)은 '내순승천(乃順承天)'에서 온 말로 '이에 승천하여 하늘을 받든다'는 뜻이다.. 

 

보의당(輔宜堂)은 교태전 남쪽 행각의 양의문 서편에 있는 당으로 동쪽의 승순당과 짝을 이룬다.

보의당은 현재 '補宣堂(보선당)'으로 현판이 붙어 있지만 <북궐도형>, <궁궐지> 등에 의하면 '輔宜堂(보의당)'이 맞다.

현판을 새롭게 제작하여 붙일 때 비슷한 글자로 착오가 일어난 듯하다.

보의(輔宜)는 '천지(天地)의 마땅함을 돕는다'는 뜻으로 <주역> 태괘의 '보상천지지의(輔相天地之宜)'에서 왔다.. 

 

승순당(承順堂)은 교태전 남쪽 행각의 양의문 동편에 있는 당으로 보의당(輔宜堂)과 짝을 이룬다.

승순(承順)은 '받들어 순종한다'는 뜻으로 부인에게 곤괘의 특성인 유순함을 받든다는 덕성을 장려한다는 의미이다.. 

 

원길헌(元吉軒)은 교태전의 동쪽에 붙어 있는 건물로 교태전과 이어져 교태전을 중건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891년(고종 28년)에 이 곳에서 약원(藥院)들이 진료를 했다는 일성록의 기사가 있다.

원길(元吉)은 '크게 선하여 길하다'는 의미이다...

 

건순각((健順閣)은 교태전 후원에 교태전과 이어져 있으며, 1876년(고종 13년)에 교태전과 함께 불탔다가 뒤에 중건하였다.

1867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건순문(健順門)을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건순(健順)'은 '건(乾)은 굳세며 곤(坤)은 유순함'을 뜻한다..

 

함원전(含元殿)은 교태전 서쪽에 있는 건물로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된 것이다.

건축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의 세종 31년(1449년)6월18일(병인) 기사에 "내가 지은 건물"이라는 기록이 있어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재건하였다.

함원전은 불교 행사가 자주 열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채롭다.

지금의 현판은 1888년(고종 25년)에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낸 문신인 이명재(李命宰, 1838~1895)가 썼다..

 

흠경각(欽敬閣)은 강녕전 서쪽, 함원전 앞에 있으며, 1438년(세종 20년) 세종의 명에 따라 장영실이 새로 지었다.

하늘을 숭배하는 사상을 지닌 전통 농경사회에서 천체의 운행과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왕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에 따라 천체 운행을 측정하는 일을 맡은 흠경각은 왕이 일상생활을 하는 장소인 강녕전과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다.

흠경각에는 앙부일구, 옥루기륜, 간의대 등과 같은 관측기구들이 설치되었다.

1553년(명종 8년)에 불에 탄 뒤 재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경복궁 중건 때 재건하였다.

1876년(고종 13년)에 불탔으며 1888년(고종 25년)에 복원하였다.

1917년 창덕궁 대화재 이후 철거되어 그 부재가 창덕궁 복원에 사용되었으며, 1995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세종 당시 흠경각을 창설하는 데 참여한 관료이자 과학자인 김돈(金墩)이 기문(記文)을 지은 바 있다.

현판은 1995년에 설치하였으며, 서예가 동강 조수호(趙守鎬)가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자선당(資善堂)은 흠경각 서쪽 행각으로 1868년(고종 5년)에 만들었다.

현판이 '자선당(資善堂)'으로 붙어 있으나 <북궐도형>, <일성록>에는 '자안당(資安堂)'으로 나온다..  

 

융화당(隆和堂)은 함원전 서쪽 행각으로 1868년(고종 5년)에 만들었다.

隆化堂(융화당)으로 현판이 걸려 있으나 <북궐도형>, <일성록>에는 隆和堂으로 나온다.

1915년 이후 나온 <궁궐지>의 경우에만 '隆化堂'이라 했다..

 

태원전(泰元殿)..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지어진 건물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두는 곳이었고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시신을 이곳에 안치하였다.

국상(國喪)이 있을 때에는 장례용으로 사용했으며, 그외 궁녀들이 주로 거주했다. 2005년 중건되었다..

 

 

 

 

 

 

 

 

 

 

 

 

 

 

 

 

 

 

 

 

집옥재(集玉齋)..

고종이 서재로 사용하던 곳으로 경복궁 건청궁내의 신무문 동쪽에 있으며, 왼쪽에 팔우정, 오른쪽에 협길당이 있다.

원래는 팔우정·협길당과 함께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졌으나, 1888년 고종이 거처를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함께 이전되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맞배집으로 정면의 월대(月臺) 중앙에 놓인 계단에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서수상(瑞獸像)을 새겼다.

고종은 이곳에 선대 임금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경복궁 내의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신식인 중국풍의 서양식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현판도 중국 북송(北宋) 때의 서예가 미불(米芾)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건청궁(乾淸宮)은 경복궁 중건이 끝난 지 1년 뒤인 1873년에 창건되었으며, 궁궐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자리에 있다.

정부 대신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비밀리에 내탕금으로 짓다 공사 도중 문제가 되어 중지할 것을 요청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사가 강행되어 여러 건물이 지어졌으며, 그 뒤 국왕과 왕비의 거처로 이용되거나 외교적인 접대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건청궁 안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한국 근세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경복궁 안에 있던 수많은 건물을 파괴할 때 건청궁도 함께 헐렸다.

현재 이 자리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워져 있고, 그 동쪽에 3단으로 기단을 쌓아 ‘明成皇后遭難之地’라고 새긴 표석을 세워 놓았다.

그 옆에는 당시의 참상을 그린 기록화를 그려 전시하고 있다.

건물이 남아 있지 않아 창건 당시의 원형을 복원할 수는 없으나 <북궐도형>·<궁궐지> 등을 통해 전체의 구성·규모 등은 알 수 있다.

건물 전체의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장안당(長安堂)·곤녕합·복수당(福綏堂)으로 이루어진 구역이 162.5칸, 장안당 서쪽에 있는 각감청(閣監廳) 60칸, 남쪽에 있는 연못과

그 가운데에 만들어진 섬과 향원정(香遠亭), 섬과 건청궁을 잇는 취향교(醉香橋) 등으로 이루어진 궁궐 안 후원 등이다.

건청궁은 명성황후 시해와 최초로 전기설비를 하여 유명한 장소이다..

 

 

 

 

 

 

 

 

 

 

 

향원정(香遠亭)..

1867년(고종 4년)부터 1873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경회루의 서북쪽 넓은 터에 있는 향원지(香遠池) 안의 작은 동산 위에 있다.

원래 연못 북쪽에 연못과 정자를 연결하는 취향교(醉香橋)가 있었으나 6·25때 파괴되었고, 지금의 다리는 1953년에 가설된 것이다.

정자의 평면은 정육각형으로 아래·위층이 똑같은 크기이며,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으로 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일·이층을 관통하는 육모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이층 기둥 위에 짜여지는데,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 주두를 놓고 끝이 둥글게 초각된 헛첨차를 놓았다.

일출목의 행공첨차(行工檐遮)를 받치고, 다시 소로(小累)를 두어 외목도리(外目道里) 밑의 장혀(長舌)를 받친 몰익공식이다.

일층 평면은 바닥 주위로 평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고, 이층 바닥 주위로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사방둘레의 모든 칸에는 완자살창틀을 달았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육모지붕으로, 중앙의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중심점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어 치장하였다..

 

 

 

 

 

 

 

자경전(慈慶殿)

보물 제809호(1985년1월8일)로, 1867년(고종 4년) 경복궁 재건의 제2단계 조영(造營) 때 대왕대비인 조대비를 위하여

옛 자미당(紫薇堂) 터에 지은 연침(燕寢 한가롭게 거처하는 전각)으로 현재 경복궁 안에 남아있는 유일한 연침건물이다.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의 동쪽 정면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청연루(淸讌樓)가 건축되고, 연이어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그리고 서쪽 뒤쪽으로 정면 2칸, 측면 6칸의 방과 대청이 부속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 ㄴ자형을 이루고 있다.

동행각·남행각·북행각 등의 부속건물과 일곽을 이루고 건립되었으나 두번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88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 전각의 주평면(主平面)은 교태전(交泰殿)과 같은 침전이 이루는 기본적인 것으로, 중앙에 커다란 대청을 두고 그 대청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커다란 온돌방, 그리고 그 측면으로 누마루를 두었으며, 이들의 앞면과 뒷면으로는 툇마루와 좁은 온돌방을 두었다..

 

 

 

 

 

청연루(淸讌樓)는 자경전의 동편 첫 칸에서 남쪽으로 2칸을 돌출시킨 다락집이다.

용례정원에 전교하기를 “청연루 근처에 눈비를 피할 수 있는 월랑을 짓는 일은 차지 내관의 말에 따라 하라.…” 하였다.

傳于政院曰 淸讌樓近處 避雨雪月廊造成事 聽次知內官之言而爲之… [명종실록 권제22, 68장 뒤쪽, 명종 12년5월11일(계해)]

1545년7월1일 인종은 경복궁 청연루에서 승하했다..

 

 

 

 

 

 

경회루(慶會樓)..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의 경회루는 국보 제224호(1985년1월8일)로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태종 12년(1412년)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아 있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년)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 처음 지어진 경회루는 성종 때 고쳐지으면서 누각의 돌기둥을 화려하게 용의 문양을 조각하였다고 전해지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고종대에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은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 높이를 3단으로 각각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후기 누각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수정전(修政殿)..

보물 제1760호(2012년3월2일)인 수정전은 근정전 서측에 있는 건물로써 북쪽으로는 경회루가 자리 잡고 있다.

수정전이 있는 권역은 세종 연간에는 학문을 연구하며, 왕에게 주요 정책을 자문하고 건의하던 기관으로 한글을 창제하는 등 문치의

본산이었던 집현전이 있던 궐내각사의 지역에 해당한다.

동쪽으로 사정전의 왕의 영역과 신하들의 영역이 만나는 접점인 이곳에 궐내의 관청인 각사들이 자리 잡고 있다.

수정전은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왕의 편전으로도 사용되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대한제국의 군국기무처를 여기에 두고,

이후 내각청사로 사용되었다.

4면에는 행각과 남쪽의 외행각이 일곽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일제 때 훼철되고 현재는 본건물인 수정전만 남아있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4년(1867년)에 근정전, 사정전, 경회루 등과 함께 중건되었다.

중건 당시에는 4면의 행각과 남쪽으로 외행각이 있었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내부 벽체와 창호가 훼철되었고,

그 일곽 또한 1915년 가을에 조선총독부를 세우고자 하는 일제의 전초작업으로 시정 5주년 기념사업인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모두 헐리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판글씨는 중건 당시 조석원이 썼으며, 조선 후기 문신으로 도승지에까지 이르렀으며, 글씨에 조예가 깊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헌인 궁궐지에는 수정전과 이에 부속된 행각의 명칭, 규모, 양식, 주칸 등이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정면 10칸, 측면 4칸의 비교적 긴 장대한 건물로 남향으로 앉혀진 1고주 7량가의 이익공양식 단층 팔작지붕이다.

네 벌대의 넓은 월대에는 정면에 계단을 3곳 설치하였고, 중앙의 계단은 소맷돌을 두어 좌우계단과 차별화시켰으며,

이것은 임금의 출입이 자주 있는 편전임을 의미한다.

다섯 벌대의 높은 건물기단 위에는 4각 초석위에 각기둥을 세우고 띠살창 분합문과 빗살창교창을 사방 전면으로 둘러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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