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상징 유달산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그러나 아쉬운 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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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산행2014

목포의 상징 유달산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그러나 아쉬운 조망..

by 정산 돌구름 2014. 6. 20.
목포의 상징 유달산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그러나 아쉬운 조망..

 

○ 산행일자 : 2014. 6. 19(목)

○ 기상상황 : 맑음(맑은 날씨에 종일 안개가 가득하여 시야가 흐림. 26~28℃)

○ 산행인원 : 나홀로

○ 산행코스 : 노적봉~유선각~관운각~마당바위~일등바위~이등바위~달성공원주차장~도로따라~노적봉(전남 목포)

○ 거리 및 구간별 소요시간 : 약 3.0km(GPS), 1시간50분 소요

  노적봉(17:10)~대학루(17:16)~달선각(17:23)~유선각(17:28)~아기바위(17:40)~관운각(17:45)~마당바위(17:47)~

  홍법대사조각상(17:55)~일등바위(18:05~10)~소요정(18:17)~이등바위(18:25~37)~달성주차장(18:50)~노적봉(19:00)

○ 주요 봉우리 : 노적봉(60m), 일등바위(228.3m)

 

 

○ 산행지 소개

  유달산(儒達山 228.3m)은 기암절벽이 첩첩하여 <호남의 개골> 이라고 하며, 영달산(靈達山)이라고도 불렸다.

  목포 8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 등의 5개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1982년 발족된 추진위원회의 범시민적인 유달산 공원화 사업으로 작품 100점이 전시된 조각공원과 난공원 등이 조성되어 볼거리가

  많으며, 산 주변에 개통된 2.7㎞의 유달산 일주도로를 타고 달리며 목포시가와 다도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봉우리가 마치 쇠가 녹아내리는 듯한 색으로 변한다 하여 유달산(鍮達山)이라 하였다.

  이후 구한말 대학자인 무정 정만조가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유달산에서 시회를 열자 자극을 받은 지방선비들이 유달정(儒達亭)

  건립을 논의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산 이름도 유달산(儒達山)이 되었다.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 하여 이름 붙여진 일등바위(율동바위)와 심판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 하여 이름 지어진 이등바위(이동바위)로

  나뉘어진 유달산은 기암괴석과 병풍 절벽이 첩첩하며 옛날 봉수를 올렸던 봉수대와 달성사, 반야사 등의 전통사찰을 볼 수 있다.

  영산기맥의 큰 줄기가 무안반도 남단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유달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영산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끝인 산이다.

  유달산은 옛부터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靈達山)이라 불렸고, 도심 속에 우뚝 솟아 목포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보며

  이곳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예혼을 일깨우고 있다..

 

 

늦은 오후 노적봉 아래 주차를 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유달산보다 더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노적봉이 산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유달산 입구 도로 건너편에 일부러 가져다 높은 듯 서 있는 큰 바위덩어리 하나가 보이는 데 그곳이 바로 노적봉이다.

노적봉은 해발 60m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적은 군사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 봉우리를 이엉으로 덮어

멀리서 보면 군량미를 쌓아놓은 큰 노적처럼 보이게 했는데, 이를 본 왜적들은 저렇게 많은 군량을 쌓아두었으니

군사는 얼마나 많겠느냐며 지레 놀라 도망쳤다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유달산으로 오르는 긴 계단..

 

계단위에서 바라본 노적봉..

 

위 부분을 큰바위 얼굴이라 부른다...

 

유달산 정기.. 목포개항 110주년을 맞이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1897년 부산, 원산, 인천 다음으로 네번째 개항한 목포항을 기념하고 유달산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이기도 하다..

 

이순신장군동상.. 이 동상은 이순신장군동상 1호로 1974년 시금성금 등 2,000만원의 공사비를 들여 건립히였다.

충무공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4년5월20일 209명으로 이충무공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1974년8월15일 세워졌다.

비명은 박정희 전대통령이 휘호, 탁련하(卓鍊河)선생의 조각을, 이은상·최순우·최영희 선생의 사료에 의한 고증 및 심의를 거쳐,

1974년 문화공보부 등록 제1호가 되었다.

 

목포를 수호하듯 바라보고 있다..

 

정오를 알리던 포, 오포대(午砲臺)..

오포대는 유달산 입구 이순신 동상 남쪽에 있는데, 1909년 설치되었으며, 시민들에게 정오를 알리기 위한 포대였다.

당시의 오포대는 현재 유달산공원의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포는 주변에 모형으로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조선식 선입포로서 1667년(헌종 10년)에 제작되었고, 높이 5자, 구경 3자 5푼, 기부 8치, 주량 733근 이었다고 한다.

1회 발사시 화약 소비량 30량이었다고 한다.

1913년 8월 신식 대포로 일본 오오사까 포병공장에서 구입, 대체했고, 그 전에 있는 구식대포는 일본의 신사 경내로 옮겼다고 한다..

 

당시 오포대 담당직원이 정오에 맞춰 현재의 이충무공 동상 뒤에 있는 오포대에 올라가서 포탄 없이 포구에 화약과 신문지를 넣고

쏘아 굉음과 함께 목포 상공에 휴지가 흩어지면, 시민들은 "오포 텄다. 점심 먹자"라는 신호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 말기 일본이 전쟁수행을 위한 공출로 신·구 오포를 걷어가 버렸다고 한다.

1988년 12월 다시 이를 복원, 당시 오포대에 전시하고 지방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보존하고 있다..

 

유달산 첫번째 정자, 대학루(待鶴樓)..

이 정자는 목포시민을 위하여 2006년5월 기업은행 목포지점에서 기증한 누각이다.. 

 

대학루에서 바라본 목포시가지와 목포항..

 

옹기종기 모인 유달산 기슭..

목포 구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노적봉, 시민종각, 멀리 삼학도..

 

어린이헌장탑..

 

목포의 눈물 노래비..

이 노래를 부른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씨와 작사가 문일석씨를 기념하기 위해, 1969년 예총 목포지부가 주관하여 세운 것으로

비의 높이는 211㎝, 너비는 247㎝이다.

1930년대 가수 이난영씨가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노래 '목포의 눈물'이다.

1934년 조선일보사는 일제 탄압으로 억눌려 있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사업으로 향토 신민요 노래가사를

공모했는데 목포 출신인 문일석씨의 가사가 당선되었고, 작곡가 손목인씨가 곡을 붙여 '목포의 눈물'노래가 탄생하게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음반이 출시되자마자 대히트를 기록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알려져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부르는

대표적인 목포의 노래이다..

 

조금 오르면 달선각(達仙閣).. 1958년 광복 13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조금 더 오르면 천자총통 발포체험장..

 

유달산 체험장은 시민과 관광객이 천자통통을 발포하고 의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장소이다.

천자총통 체험은 목포 유달산 체험 프로그램(http://www.skygun.kr/) 또는 목포시청 사이트에서 신청 가능하며,

목포 유달산 체험 프로그램 사이트에는 천자총통에 관련된 다양한 자료와 채험 모습을 볼 수 있다...

 

목포 천자통통(天字銃筒)..

가정을묘명천자총통으로 이름 그대로 중국 가정(嘉靖) 년간 을묘년(1555)에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는 천자총통을 말한다.

조선 중기에는 물건을 세거나 순서를 말할 때, 천자문(千字文)의 순서에 따라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그 순서를 표기한 방법에 따라

이 총통이 조선시대 가장 큰 총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천자총통은 최무선(崔茂宣)이 고려말에 이미 제작하였던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발전시킨 것이다.

장군화통(將軍火筒)도 이 천자총통의 전신(前身)이다..

 

한없이 이어지는 돌계단길..

 

유선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다보면 왼편 여기저기에 바위들이 있는데 그 중 눈에 띄는 날렵한 바위가 투구바위이다...

투구모양 같기도 하며 코뿔소의 뿔 모양 같기도 하다. 위로 솟아 있는 장식이 없어 밋밋한 투구처럼 보이지만,

비스듬히 서 바라볼 때 투구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투구바위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설화를 지니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고하도에서 108일 간 머무르면서 목포 앞바다를 무대로 고금도 쪽으로 싸움터를 옮기기 위해 군량미를 확보해야 했다.

오가는 배를 통한 통행세를 곡물로 받아 군량미를 확보하고 목포 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략상 목포를 떠나야했던 마지막 날 이순신 장군은 유달산에 올라 내려오면서 일본이 목포를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투구를

벗어 놓았는데, 그것이 지금의 투구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유선각(儒仙閣)..

 

유달산에 세워진 6개의 정자(대학루·달선각·유선각·관운각·소요정·팔각정) 중 하나로 유달산 중턱에 있다.

목포의 최고 전망대로 알려진 정자로, 이곳에 서면 목포항과 목포시가지, 삼학도, 영산호, 다도해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932년 목포 개항 35주년을 기념하여 세웠다가 태풍으로 인해 무너져 중건하였고, 중건한 건물도 퇴락하자

1973년8월1일 옛 모습 그대로 개축하였는데 원래는 목조건물이었으나 현 건물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전통적 건축양식을 갖춘 누각이다.

한말 유학자로 시문에 능했던 무정 정만조(鄭萬朝)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유달산에서 시회(詩會)를 열고 시를 읊었던 곳이라하여

유선각(儒仙閣)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누각 전면에 걸린 현판의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해공 신익희(申翼熙)가 유달산에 들렀다가 기념으로 남긴 것이다..

 

유선각 앞쪽 암반에는 1973년 개축 때 세운 유선각 표비가 있다..

달성사 갈림길인 바람골쉼터를 지난다..

 

바위틈을 지나 가파르게 오르면..

 

일등봉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면 고래바위 옆을 지난다..

계단을 오르면서 쳐다보면 거대한 고래가 입을 벌리고있는 고래처럼 생겼다하여 고래바위라 하며 일명 '두꺼비 바위'라고도 부른다.

고래의 입 모양처럼 생긴 부분이 등산로 계단 부위에 돌출되어 있어 사람들은 의례 고래 입주둥이 부분을 한번씩 만져보면서 오른다..

관운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르면 하늘로 치솟아있는 입석바위 바로 위편에 종 모양의 바위가 있다.

절에서 흔히 볼수있는 범종과 다른 서양식 종으로 아래쪽에서 볼때 확연히 종 모양임을 알수있다..

 

종바위에 올라 바라본 목포시가지..

 

목포항, 그 건너의 대불부두..

 

목포항 국제여객터미널과 쾌속선..

 

우측 바위틈으로 내려다본 달성사..

 

달성사는 유달산의 동남방, 죽교동 317번지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대둔사의 말사다.

절은 이전에 대원사(大願寺)라 불렸다고도 전해지며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조선 말기 창건설 및 1913년 창건설 등이 있는데,

1913년 4월 초파일 대둔사에 있던 노대련(盧大連)선사가 이곳에 와서 창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달성사는 전통사찰 69호이며, 문화재(유형문화재 228호, 229호)를 보유하고 있는 목포에서 유일한 사찰이다..

 

잠시 오르면 전망데크.. 이름하여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이란다..

 

전망데크에서 바라본 이등바위..

 

일등바위까지는 330m남았다..

 

유달산에서 만난 꽃망울..

 

유달산은 사방이 조망터이다..

 

관운각 맞은편에 있는 ‘애기바위’는 두엄씨바위(큰 엄씨 · 작은 엄씨 바위)라고도 한다.

높이 솟아 있는 두 개의 바위 주변에는 여러 개의 바위들이 널려 있으며 조금 아래의 남쪽에는 몇 개의 벤치가 있다.

큰 엄씨가 애기를 업고 작은 엄씨에게 등을 돌리고, 작은 엄씨도 애기를 업었는데 큰 엄씨를 보려고 하는 형상이다.

이곳은 마당바위로 오르는 능선이 남동쪽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어 두 엄씨는 거센 바다 바람을 등지고 애처롭게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내려다보면 제 모습을 볼 수 있다..

 

애기바위 뒤편 아래쪽에 있는 조대바위...

고하도 앞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팔짱을 끼고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낚시꾼을 보는 듯하다.

등뒤의 큰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모양인데 네 개의 바위가 합쳐져 이러한 모양을 만들어 냈다...

 

이곳에서는 다도해의 잔잔한 바다와 길게 늘어진 고하도, 옹기종기 모여있는 온금동 마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으며,

안개 자욱한 날에 바라보면 더 이채롭다..

 

곳곳이 아름다운 전망대이다..

 

관운각 바로 아래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고개를 내밀고 엎드려 있는 거북이와 닮았다.

관운각을 지나 바다로 다시 돌아가려는 거북이의 모습인데 여기 이외에도 유달산에는 거북형상을 한 바위들이 많다...

 

나막신바위는 관운각 아래 마당바위로 가는 길과 곧장 일등봉으로 가는 갈림길의 아래 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갈림길에서 보이는 부분이 나막신의 앞부분으로 둔탁한 직사각형의 바위인데도 앞끝이 살짝 위로 올라가 나막신을 연상시킨다..

 

입석바위는 관운각에서 바당바위로 오르는 길에 있는 바위로 크고 작은 장방형의 네모 반듯한 두 개의 바위다.

일등봉의 능선에 걸쳐있는 이 바위는 바위능선의 지질변화 과정 중 수직으로 절리되어 기둥처럼 우뚝 서 있게 된 것이다.

정면에서는 사각기둥 모양의 평범한 입석으로 보이지만 옆면이 길에 뻗어있어 상당한 규모임을 자랑하고있으며,

 이곳이 유달산 상봉으로 가는 길목임을 상징하는듯하다..

 

관운각(觀雲閣)은 마당바위 아래에 있는 누각으로 유달산의 누정 중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또한 목포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위 마당바위.. 널따란 바위공간이다..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손가락바위...

 

마당바위에 올라서면 기괴한 손가락바위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목포의 어느지역에서나 보이는 것으로 유달산의 상징적인 바위라 할 수 있는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서로 상이하다.

뭔가 약속하자는듯 새끼손가락을 내세우는것 같기도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내가 최고라고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한다.

하늘을 향해 치켜세운 손가락이 하나 보이는데, 이 바위가 워낙 반듯하여 전문가라도 장비 없이는 오르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손가락바위를 아무런 기구 없이 마치 서커스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오르내린 기인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를 ‘유달산 타잔’이라

불렀는데 그가 바로 해방 직후에 살았다는 정인조이다.

그가 손가락바위를 타는 일요일이 되면 바위 타는 걸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한다.

바위를 타는 신기를 타고 난 그도 결국 산에서 떨어져 최후를 맞이했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고하도와 목포대교.. 그 너머의 신안군 섬들은 운무에 잠겨 보이질 않는다..

 

목포 구도심과 삼학도..

 

목포항과 대불항, 그리고 영암땅도 희미하다..

 

바로 아래에 일본불교의 흔적이 남아있다..

 

마당바위에서 내려섰다가 일등바위로 가는 길에 좌측 숲으로 들어 확인해 보았다.. 일본불교의 흔적들..

 

일본의 잔재라고 하지만 치욕의 역사도 역사인 만큼 보전하여야 할 가치는 있다고 본다.. 망가뜨릴 필요까지야..

 

1920년대 말 일본인들이 일본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 위하여 목포 유달산에 88개의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을 만들었는데,

현재 유달산 일등바위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암각상들만 남아 있다고 한다...

 

부동명왕(不動明王)은 불교 진언종에서 받드는 오대존명왕의 하나로 부동여래사자(不動如來使者)라고도 한다.

오대존명왕은 곧 중앙의 부동, 동방의 항남세, 남방의 군다리, 서방의 대위덕, 북방의 금강야차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 부동명왕은 중앙에 있으며 대일여래가 일체의 악마를 항복시키려고 변화하여 분노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원명은 아시알라라 하는데, 힌두교 시바신의 이명을 불교가 그대로 채택한 것으로 불교에서는 이 명왕에게 사자의 성격을 부여하였다.

후에는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사자로써 번뇌의 악마를 응징하고 밀교 수행자들을 보호하는 왕으로 간주되었다.

오른손에 검을 쥐고 왼손에는 삭(索)을 쥐었으며, 부릅뜬 눈과 뾰족한 어금니에 윗입술을 깨문 무서운 분노신(忿恕身)을 하고 있다.

맹염(猛炎)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악마를 박멸하는 위력을 나타낸 것이고, 동자형(童子形)의 몸 모양은 여래의 동복(童僕)이 되어

밀교 수행자들의 봉사자가 되려는 서원(誓願)에 따른 것이다.

조상(造像)은 히말라야 산록을 뛰어다니는 목동을 모델로 했는데, 불상 중에서 가장 인도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명왕부(明王部)의 대표격으로서 7세기 후반 <大日經>이 성립되자 밀교 오대명왕의 주존(主尊)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일제시대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 사이에는 유달산신사라는 글씨를 새겨 놓았는데, 지금은 '사'는 지워지고, '유달산신'만 남아있다.

 

일본 불교 진언종(眞言宗)의 창시자, 홍법대사(弘法大師) 구카이(空海)..

774년 시코쿠 사누키국(讚岐國 가가와현)을 세운 유력한 가문에 태어았는데, 어머니는 헤이안시대 고승을 배출한 집안출신이었다.

18세 때 교토의 대학에 입학하여 오카다 등에게 <상서(尙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 유교경전과 중국사서를 배웠다.

어느 날 한 승려를 만나 ‘허공장구문지법’을 백만번 외면 모든 가르침의 참뜻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출가의 뜻을 굳혔다.

20세 때 출가하였고, 24세 때는 <삼교지귀(三敎指歸)>라는 책을 저술, 유교와 불교, 도교를 비교하고 불교의 우수성을 강조하였다.

구카이가 수행한 불교는 율령국가 체제를 수립해간 불교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통해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30세 무렵에는 당나라로 건너가 청룡사의 혜과(惠果)를 만난 구카이는 학문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최고의 전법자가 되었다.

혜과는 그에게 관정(灌頂)을 베풀고 요가 등을 전수한 뒤 밀교를 일본에 전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구카이는 귀국하기 전 여러 가지 서적과 불상, 만다라, 법구, 혜과의 유물 등 밀교와 관련된 자료를 많이 모았다.

이들 자료는 뒤에 사이초[最澄]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일본 천황의 신임을 얻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귀국 후 밀교 경전을 널리 전파하고 이른바 동밀(東密) 일파를 개창하였으며 고야산[高野山]에 공고부사[金剛峯寺]를 세우고

교토의 도사[東寺] 건립에 참여하는 등 진언종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가 62세의 나이로 공고부사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진언종은 밀교를 받아들여 마음과 육체(물질)의 합일을 강조하고 현세에서의 이익을 인정하여 당시 귀족들의 환영을 받았다.

저서로는 <삼교지귀>를 비롯하여 <십주심론>, <즉신성불의>, <대일경약석>, <강정경약석> 등이 있다..

 

일등바위로 오르면서 바라본 목포 구도심..

 

일등바위로 오르는 길..

 

일등바위의 후면..

 

일등바위 아래의 다도해 풍경 안내도..

 

유달산의 최고봉, 일등봉..

 

오랜 옛날 사람이 죽으면 이 일등바위(율동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이등바위(이동바위)로 옮겨져 대기하고 있다가,

극락세계로 가는 영혼은 3마리의 학(삼학도)이나 고하도 용머리의 용을 타고가고, 용궁으로 가는 영혼은 영달산(유달산)에서

조금 떨어진 거북섬(목포와 압해도 사이에 있는 섬)에 있는 거북이 등에 실려 용궁으로 간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영산기맥의 큰 줄기가 무안반도 남단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유달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영산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끝인 산이다..

 

일등바위에서 바라본 이등바위..

 

목포 구도심..

 

삼학도가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보광사..

 

목포대교, 목포해양대학교..

 

목포대교 아래의 고하도 용머리해안..

 

길게 들어선 고하도..

 

목포항..

 

잠시 여유를 보인다..

 

유달산에서 바라보는 목포8경..

유산기암(儒山寄巖), 고도설송(高島雪松), 달사모종(達寺暮鐘), 학도청람(鶴島晴嵐), 금강추월(錦江秋月), 입암반조(笠岩返照),

아산춘우(雅山春雨), 용당귀범(龍塘歸帆)...

유달산, 고하도, 달성사, 삼학도, 영산강, 입암산(갓바위), 용당포구(돛단배) 등의 아름다운 풍광을 일컫는다..

 

건너편의 이등바위를 향하여 내려선다..

 

정상 바로 아래의 풍경..

 

이등바위 갈림길..

 

뒤돌아본 일등바위..

 

일등바위를 지나 이등바위를 향해 가다보면 흔들바위가 보인다.

급하게 경사진 암반 끝에 있어 실바람만 닿아도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흔들바위는 장정 대여섯명이 올라갈 수 있는 평평한 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 올라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재미도 뛰어나다.

또한 이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커다란 바위면을 직접 깎아 만들었는데 주변 바위들과 어울림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온통 바위 뿐..

 

일등바위에서 흔들바위를 지나면 소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큰 바위더미를 돌아가야 한다.

바위의 아래로 돌아서 지나야 하는데 돌아가기 전이나 돌아간 후에 바위를 올려다보면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바위의 끄트머리가 갑자기 튀어나와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포효하는 남자의 얼굴로 보인다..

 

이등바위 풍경..

 

너른 공터의 보리를 털어 말리던 곳, 보리마당..

오래전 목포 인근의 섬사람들은 보리나 벼 등을 수확한 뒤 목선에 바리바리 실어 목포까지 날라야 했다.

섬엔 변변한 도정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보리는 정미소 가기 전, 그리고 도정을 마친 뒤 각각 볕에 말려야 한다..

 

섬 주민들이 정미소가 있던 도심 외곽에 며칠씩 머물다 보니 자연스레 이들을 상대로 국밥집과 여관, 시장 등도 생겨났다.

지금은 명맥만 남은 백반거리, 팥죽거리 등도 따지고 보면 이때부터 조성됐던 셈이다.

흔히 다순구미와 보리마당이 같은 지역인 것처럼 표현되곤 하지만, 사실 별개의 마을이다.

아리랑고개(옛 말태기재)를 경계로 윗자락은 다순구미, 아래쪽은 보리마당이다..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이 두 봉우리 사이에 위치해 있는 소요정(逍遙亭)은 ‘거닐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1966년에 세워진 소요정은 평지처럼 산책하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등산객들에게는 다도해 전망대라고 불린다.

맑고 잔잔한 바닷물과 점점이 흩어진 푸른 섬들로 유명한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이곳에서 목포해양대 쪽을 바라다보면 고하도와 압해도를 위시한 조그마한 섬들이 펼쳐져 있다.

다도해 멀리 저녁해가 유달산너머로 빠져들 때면 저녁 노을은 갖가지 아름다움을 연출해 낸다.

그리고 난 공원이 있는 우측으로 목포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이등바위가 있는 쪽으로는 목포의 북항이 바라다 보인다.

 날씨가 좋으면 멀리 무안의 망운과 지도가 바라다 보인다고 한다..

 

갈림길에서 이등바위로..

 

지나온 일등바위 능선..

 

이등바위는 유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일등바위에서 심판받은 영혼이 이 바위로 이동하여 잠시 대기한다 하여 ‘이동바위’라고도 부른다.

이등봉은 동그란 탑처럼 보이는데 시내쪽에서 바라보면 마부가 말을 끄는 모습으로 ‘독승바위’라고도 부른다..

 

이등암은 일등암의 강렬한 인상이나 웅장함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멀리서 보면 둥그스름한 젖무덤처럼 솟아있는 봉우리를 중턱 곳곳에 자란 작은 나무들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듯하다...

 

이등바위 너머로 일등바위..

 

이등바위의 정상부는 제법 널따랗고 평평하여 사람들은 신선들이 쉬어가는 곳이라고 말한다..

 

동그란 바위가 얹혀 있는데 수도정진하는 수도자의 머리 모습을 닮았다하여 ‘수도바위’라고 부르며, 애칭으로 ‘똥바위’라고도 한다...

 

수행정진하고 있는 수도자의 모습은 마당바위에서 봐야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꼭 똥 덩어리처럼 보인다..

 

전면으로 눈을 돌리면 다도해의 잔잔한 물결 위를 흐늘거리듯 헤엄치는 거대한 용머리 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등바위에서 다도해의 색다른 매력을 확인할 수 있다..

 

목포시가지 전경이 보이고..

 

운무에 잠긴 시가지..

 

구도심의 풍경도 정겹다..

 

낙조를 볼 수 있을까 기다려보지만 앞으로 한시간여.. 포기하고 내려선다.. 

아름다운 풍경..

 

잠시 내려서면 정상 갈림길..

 

다시 긴 계단길을 내려선다..

 

달성사 갈림길에서 달성사를 포기한다..

 

유달산공원 조성 기념비..

 

바로 옆에 난전시관도 있지만..

 

달성공원..

 

유달산 공원안내도..

 

당겨본다..

 

주차장 앞 상가를 지나..

 

도로를 따라 노적봉으로 가면 팔각정..

배흘림 기둥으로 독특하게 세워진 팔각정안에는 8개의 단청 그림이 벽면에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는 다도해의 절경을 보여주는 홍도의 독립문, 바당바위 아래의 관운각, 영산강을 막아 인공호수가 조성된 영산강하구둑,

계절마다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유선각, 커다란 한이 맺혀 하늘이 보이지 않도록 삿갓을 쓴 바위형상이라는 갓바위,

갈매기와 물위를 떠다니는 배가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하는 다도해, 사공들의 옛노래가 들리는 듯한 아롱 젖은 손수건이

휘날리는 사랑의 항구를 그린 목포항구, 갈매기들이 너울거리는 삼학도의 전경이 그려진 그림들이다..

 

팔각정은 1984년 3월15일에 목포시내 전 라이온스 클럽에서 시민의 휴식처로 활용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당겨본 목포 최고의 고층건물, 31층 주상관 복합건물 '트윈스타' 아파트가 우뚝 솟아 있다..

 

바로 앞 노적봉이 다가온다..

 

다시 돌아온 노적봉..

 

이렇게 짧지만 조망이 시원스런 유달산을 일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