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명산 탐방] 호서의 금강 덕숭산(수덕산),그리고 천년고찰 수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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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산행2013

[100대명산 탐방] 호서의 금강 덕숭산(수덕산),그리고 천년고찰 수덕사

by 정산 돌구름 2013. 9. 8.
[100대명산 탐방] 호서의 금강 덕숭산(수덕산), 그리고 천년고찰 수덕사...

 

 

○ 산행일자 : 2013. 9. 7(토)

○ 기상상황 : 구름 조금의 맑음(25~27℃)

○ 산행인원 : 빛고을토요산악회(24명) - 회비 40,000원

○ 산행코스

<오전> 주차장~수덕사~총림~정혜사~덕숭산~만공탑~소림초당~수덕사~주차장(충남 예산)

<오후> 용봉초교~미륵암~용봉산~노적봉~악귀봉~절고개~수암산~덕산온천(충남 홍성)

○ 거리 및 소요시간 : <오전> 6.5km/2시간25분

  주차장(09:00)~능선(09:14)~수덕사갈림길(09:56)~덕숭산(10:00~25)~정혜사(10:40)~만공탑(10:45)~미륵불(10:50)~

  소림초당(10:55)~사면석불(11:00)~수덕사(11:05~15)~주차장(11:25)

○ 교통상황

  광주비엔날레주차장(06:30)~호남고속~서해안고속~홍성IC~40번~수덕사주차장(08:55)

  덕산온천(17:15)~609번~빛고을식당(17:35~18:15)~21번~광천IC~서해안고속~호남고속~비엔날레(20:45)

 

 

○ 산행지 소개

  호서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리는 덕숭산(德崇山 495.2m)은 기암괴석이 풍부하여 마치 바위들이 사람의 두개골이나 노적가리, 사나운

  짐승이 입을 벌리고 있는 듯 절묘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이 지방 현인들이 모여 수양을 하다 산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하여 수덕산이라고도 한다.

  절경으로는 원효봉과 석문봉, 덕숭산과 해태바위 등이 있다.

  또한 백제의 명찰인 수덕사를 비롯하여 정혜사, 만공탑, 여승당, 보덕사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충의사와 덕산온천 등 명소가 있다.

  도립공원은 덕산면의 시량리, 사천리, 둔리, 상가리, 광천리 등을 포함하여 1973년3월6일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나 북쪽에는 가야산, 남쪽에는 일월산, 동쪽에 용봉산, 서쪽에 삼준산이 주위를 삼엄하게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라

  낮은 산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담한 산세와 더불어 향운각, 견성암, 정혜사 등의 암자가 산 속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가까운 곳에는 덕산온천을 비롯해서 윤봉길

  의사의 사당인 충의사, 천주교인들의 성지인 해미읍성, 추사 김정희의 고택 등 역사적인 배경지가 많다.

  덕숭산에 자리하고 있는 수덕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창건된 고찰(古刹)로 대웅전이 유명한 사찰이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지어진 대웅전은 국보 제49호로 현존하는 건물 중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이어 세번째로 오래된 고려시대 목조건물이다.

  또한, 공주의 동학사, 청도의 운문사와 더불어 3대 비구니 도량으로 꼽힐 만큼 유명한 비구니 사찰이다.

  소금강이라고 할 만큼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경관이 수려하고, 백제고찰 수덕사가 자리한 덕숭산은 산림청 100명산에 선정되었다..

○ Prologue

 오늘은 100대명산 2개를 연이어 탐방하는 산행으로 오전에는 수덕사를 품은 덕숭산(수덕산), 오후에는 홍성의 용봉산을 산행한다.

 가을로 접어든 맑은 날씨에 무더위도 한풀 꺾여 조석으로는 제법 쌀쌀한 느낌마져 든다.

 30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24명의 조촐한 인원이 산행에 참여하였다.

 부드러운 덕숭산 오름길, 그리고 아름다운 암릉미를 자랑하는 용봉산..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한 즐거운 하루였다.

 

수덕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가야할 능선.. 

 

수덕저수지 옆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간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능선을 따라 부드러운 오름길이 시작되고..

 

오르는 길목의 갖가지 기암들..

 

능선따라 연이어 나타난다..

 

포갠바위..

 

아름다운 소나무 숲과 건너편의 산줄기...

 

멀리 가야산 줄기가 바라보인다..

 

누렇게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판..

 

길목마다 기암들이 시야를 현혹시킨다..

 

지나온 능선, 그리고 수덕사 주차장..

 

수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덕사, 그리고 건너편으로는 용봉산이 하늘금을 긋는다..

 

조망이 트이는 바위 전망대..

 

기암..

 

견성암으로 내려서는 길은 막혀있다..

 

아담한 암자의 담이 모습을 드러낸다..

 

45번 국도상의 덕산터널, 그 뒤로는 연암산 능선..

 

조망이 트이는 전망바위가 곳곳에 있다..

 

소나무 숲 너머로 덕숭산 정상이 다가온다..

 

의자를 닮은 바위..

 

 덕숭산 정상에 서다..

 

호서의 금강이라 불리는 덕숭산..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이기도 하다..

 

후미를 기다렸다가 함께 내려선다..

 

해발 495.2m의 낮은 산이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산이다..

 

건너편으로는 우뚝 솟은 가야산 원효봉,  그리고 온통 통신시설로 가득한 가야봉이 바라보인다...

 

수덕사 방향으로 내려선다..

 

수덕사와 들판..

 

스님들의 채소밭..

 

굳게 닫힌 문..

 

담넘어 바라본 정혜사..

 

잠시 문이 열려 들여다 본 정혜사..

 

수덕사의 말사인 정혜사(定慧寺)...

수덕사와 함께 559년(법왕 1년) 지명법사가 창건, 이후 많은 고승대덕들이 수도한 곳이나,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고 있다.

다만, 1930년 만공선사(滿空禪師)가 중수한 이후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가 이 절 선원의 조실이 된 이래 문하에 100여 명의 승니(僧尼)가 따랐고, 현대의 불교계를 움직인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능인선원(能仁禪院)..

 

바위 위에 작은 2기의 석탑이 나란히 서 있어 쌍탑(雙塔) 또는 남매탑(男妹塔)이라고 하나 유래 및 연대 등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정혜사 앞마당은 덕숭산 최고의 조망처로 꼽히지만 비구니도량인 탓에 일반 출입은 금지된다..

쫒기듯 다시 사찰을 나선다..

 

다시 굳게 닫힌 출입문.. 

 

정혜사 석문..

 

아름다운 풍경이다..

 

또다른 문..

 

아담한 내부...

 

등록문화재 제473호(2011년8월24일)로 지정된 만공스님의 부도탑인 수덕사 만공탑(滿空塔)...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 만공스님의 제자였던 박중은 스님에 의해서 만공스님을 추모하기 위해 1947년에 제작된 것이다.

상륜부의 둥근 원석 안에는 만공스님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고, 가운데 팔각의 세기둥은 불교의 불(佛)·법(法)·승(僧) 삼보를 상징한다.

또 기단부라 할 수 있는 8각기단은 팔정도(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를 나타낸다.

팔정도란 열반에 이르기 위해 실천하는 8가지의 올바른 길이다.

팔각의 세 기둥사이에는 세 개의 면석이 들어가 있는데, 서측면에는 만공스님의 서체로 세계일화가 새겨져 있다.

중앙 전면에 만공탑, 동측면에는 만공스님의 생애가 간략하게 적혀있고 그 옆으로 스님의 법훈이 적혀있다..

 

사람이 만물(萬物) 가운데 가장 귀(貴)하다는 뜻은 [나]를 찾아 얻는데 있느니라.

불법(佛法)은 이론(理論)이나 사량(思量)으로 아는 도리(道理)가 아니니라.

허공(虛空)이 가장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물심(物心)이라면 우주(宇宙)의 총칭(總稱)인줄 알지마는 우주의 정체(正體)는 따로 있느니라.

나의 법문(法門) 못 듣는 것이 나의 임종게(臨終偈)니라...

 

 만공스님의 서체로 새긴 세계일화..

 

 만공이 건립한 25척의 석불...

 

머리에 이중의 갓을 쓰고 있는 미륵불입상이다..

 

석탑의 흔적..

 

메마른 우물..

 

전망좋은 암자이지만 굳게 닫혀있다..

 

금선대 밑, 깎아지른 절벽 밑에는 그림같은 초가가 있는데, 만공스님이 머물렀던 소림초당(小林草堂)이다.

만공스님이 ‘저 절벽 밑에 작은 초가집을 지으면 참 좋겠다’고 하자 상좌였던 벽초스님이 그 길로 연장을 들고 위험한 절벽을 타고 가

초가를 지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소림초당 앞 계곡에는 갱진교(更進橋)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 옆 바위 위에서 만공스님이 조선 말의 왕자 의친왕 이강(李堈)에게

신표로 받은 거문고를 달 밝은 밤에 홀로 탔다고 한다...

 

잠시 내려서면 사면석불...

 

이 사면석불은 1983년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유일한 사면불을 그대로 재현하여 사면에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미륵존불을 조각한 불상으로 2008년 봉안하였다고 한다..

 

잠시 내려서면 수덕사 경내의 심우당..

 

관음보살이 현현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관음바위와 관음보살입상...

관음보살이 현신, 수덕사가 창건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져오는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수덕사(修德寺)는 문헌으로 남아있는 기록은 없지만, 백제 위덕왕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무왕 때 혜현(惠顯)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설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 혜근)이 중수하였다.

일설에는 599년(신라 진평왕 21년)에 지명(智命)이 창건하고 원효가 중수하였다고도 전한다.

고종 2년(1865년)에 만공(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국내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가운데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에 이어

오래된 건축물로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축의 기단위에 정면3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보다 측면의 칸수가 더 많은 것이 특징이다..

 

수덕사 3층석탑..

1983년에 충남 유형문화재 103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은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하고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한 고려 초기의 석탑이며,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탑의 높이는 410 cm이다..

2층의 기단으로 상층기단은 4개의 돌로 면석을 조립하였고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표현해 놓았다.

지붕돌과 몸돌은 각각 한 개의 돌로 구성, 탑신1층은 5개의 옥개받침을 갖고 있으나, 탑신2층과 3층은 각 3개의 옥개받침을 갖고있다.

석탑 상륜부에는 3층의 지붕돌과 한돌로 만들어진 노반이 있으며, 수레바퀴 모양의 보륜과 보개가 남아있다.

지붕돌은 끝이 올라가 있으며 파손된 귀퉁이 부분이 보인다..

 

청련당(淸漣堂)..

대웅전을 오르기 전 바로 좌우측에는 백련당과 청련당이 있는데, 강원의 학인스님들과 스님들이 거처하시는 요사인 것이다.

대웅전에서 보았을때 좌청룡 우백호를 상징한다고 한다.

청련당은 1974년 견성암 건물을 축소 이전하여 건립한 것으로 처음에는 일자형 건물이었으나 1997년 'ㄴ'자형으로 개축하였다.

청련당 건물 아래 식당을 신축하여 후원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백련당(白蓮堂)은 1926년 만공스님이 초창하였고 1993년 법장스님이 개창하였다고 한다..

백련당과 청련당의 현판글씨는 만공스님의 제자(題字)이다.. 

 

관음전과 그 옆에 개산조 대덕지명법사 비가 있다..

 

수덕사 명부전은 1968년에 원담스님이 건립하였으며 맞배지붕이며 정면3칸 측면2칸의 주심포집이다.

외부 벽화는 사찰 법당 벽화에서 흔히 마주치게 되는 심우도이다.

소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소를 타고 집에 돌아와서 모두 놓고 일원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일러주는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

명부전은 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기원하며 영가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전각이다.

모든 중생이 성불할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다..

 

수덕사 금강보탑은 성역화 중창불사 중 조인정사를 해체하면서 전탑좌대가 발견된 그 자리에 2000년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3층석탑 기단부 면석에는 문수 보현 관음보살 등을 부조해 보살의 자비를 상징하고 사천왕상은 이를 지켜주는 의미로 함께 부조되었다.

기단부의 귀부분에는 사자상을 조각하여 세웠다.

탑신좌대에는 앙련과 복련을 돋을새김으로 표현했으며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 한 개의 돌로 조성되었고 지붕돌받침은 4개이다.

탑의 상륜부는 금강저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석탑의 높이는 950 cm 이다.

 

안에는 1988년 원담스님(덕숭총림 방장)이 스리랑카를 예방하고 종정으로부터 증정받은 부처님진신사리 3과를 친견법회 후 봉안했다.

또 소불상 천불과 금강보탑의 외형을 본뜬 999개의 모형탑을 봉안하여 여래천불천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발견된 전탑자리는 전문가의 고증을 받았고 이에, 탑명칭을 금강보탑이라고 하였다.

금강(金剛)이란 불괴신(不壞信)의 불·법·승 삼보와 계체(戒體)를 상징한다.

남북통일과 민족화합을 염원하며 건립된 금강보탑은 2000년 7월 다음과 같은 발원문을 남겼다.

국태민안과 세계평화를 위해 청풍납자 속성정각하여 광도중생하고 박복자(薄福者) 복덕구족(福德具足)하여 고통받는 이 모두 이고득락

(離苦得樂) 할 것을 발원한다...

 

백련당..

 

종무소 조인정사 앞에 있는 법고각은 범종각과 같은 규모로 정면3칸 측면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법고각은 소리를 통해 뭇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전달해 주고자 하는 사물이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범종은 종각 안에 봉안했기에 이곳 법고각에는 법고, 목어, 운판이 있다.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고 수행 정진해야 하는 수행 납자들을 경책하는 의미로 만들어진 목어는 처음에 단순한 물고기 모양이었다가

차츰 용두어신(龍頭魚身)의 형태로 전이되었다. 수덕사의 목어는 물고기의 형상이나 입안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법을 전하는 북, 법고가 올려져 있는 법고대는 조수좌(鳥獸座)의 일종으로 거북등문양(귀갑문)이 조형되어 있으며,

법고의 높이는 297cm 이고 직경 100cm로 천의를 날리며 주악을 울리는 주악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전체 모양 자체가 구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운판은 하늘을 나는 생명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전달해 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운판이 울리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중생들이 제도되고, 무주고혼은 천도될 수 있는 것이다.

한없이 윤회하는 사람의 몸을 받아 인연 맺기 어려운 일, 불법 인연 맺어 금생에서는 이 몸을 제도해야 함을 일러주는 가르침이

원담스님의 초서로 적혀있다..

 

범종각은 1973년에 건축된 정면3칸 측면2칸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화강암의 장대석 기단을 쌓고 원형의 주초위에 기둥을 세웠다.

불교에서 말하는 체용설(體用說)에 왼쪽은 체에, 오른쪽은 용에 해당하기 때문에 범종각은 대체로 법당의 오른쪽에 위치한다고 한다.

체(體)는 본질이라서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으나 용(用)은 작용이라고 한다.

범종각에서 울려퍼지는 소리 일승원음(一乘圓音)은 부처님의 위대한 작용을 상징화한 것이다.

범종과 함께 목어 운판 법고를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고 하는데, 수덕사 범종각에는 범종만을, 법고각에 법고와 목어 운판을 두었다.. 

 

만공스님이 1916년 처음 지은 조인정사(祖印精舍)는 부처님께서 혜맥을 판단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름 지어진 곳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대웅전과 마주하여 있었으나 건물이 퇴락하여 보수하고자 해체를 해보니, 고탑좌대가 발견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1993년부터 94년까지 2년여에 걸쳐 해체한 조인정사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현재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1996년11월에 원담, 숭산, 설정스님 등이 참석한 가운데 덕숭총림 수덕사 승가대학 현판식을 이곳 조인정사에서 거행하기도 했다.. 

 

황하정루(黃河精樓)

2층의 누각으로 대웅전과 마주하여 92년에 준공 되었으나 그 규모가 거대하고 용마루 선이 높아 대웅전을 외호한다는 근본 취지에서

벗어나 94년에 지금의 장소로 이전 개축한 정면7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하는 근역성보관인 박물관으로, 1층은 박물관 사무실로, 2층은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에 걸려있는 '선지종찰수덕사( 禪之宗刹修德寺)'와 '황하정루(黃河亭樓)' 현판은 원담스님 글씨이다.

황하정루의 황(黃)은 부처님의 정신을 뜻하고, 하(何)는 큰강이 흐르듯 정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코끼리석등..

 

달마의 품속..

 

수덕사 염불원(念佛院)...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염불수행을 전문적으로 전수하는 염불원(念佛院)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총림이라고 한다.

그간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등 4개 사찰이 있었는데, 1996년 3월 장성 백양사(白羊寺)가 총림으로 공식 승격하였다..

 

선지종찰 수덕사, 황하정루..

 

수덕사 7층석탑..

1984년에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칠층석탑은 1931년 만공스님이 수덕사 주지로 임할 당시 제작한 것이다.

기단부 없이 바로 탑신과 옥개석으로 되어 있다.

기단 면석 밖으로 두드러지게 우주가 표현되어 있으며 면석과 지붕돌은 별개의 돌로 조성되었다.

면석마다 우주와 창방이 표현되어 있으며 지붕돌은 2단의 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결한 느낌을 주는 7층석탑 상륜부는 찰주 보주 보륜이 올려져 있으며, 비교적 탑의 원형보존이 잘되어 있다..

 

2012년3월28일 만공스님 탄신 141주년을 맞아 스님의 선사상과 민족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경내에 지어진 만공기념관..

기념관에는 만공스님의 진영과 발우, 나막신, 세계일화 등의 친필이 전시되어 있다.

경허스님의 법을 계승하고 선지종풍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는 만공스님은 1937년 미나미 총독이 주재하는

31본산주지회의에서 조선과 일본불교가 합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등 일본불교화를 막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는데 앞장섰다...

 

경내를 나서 내려선다..

 

수덕사로 들어가는 길에는 모두 3개의 문과 1개의 루(樓)를 지난다.

이 문들은 모두 승속(僧俗)의 경계로 첫 관문인 일주문, 모든 잡귀를 물리친다는 금강문, 사방에서 불법을 외호(外護)한다는 사천왕문..

이 문들을 지나서야 절은 속인(俗人)들의 발걸음을 들인다...

 

환희대는 만공선사께서 창건하시고 일엽선사와 경희 효상좌께서 만년에 주석하였던 곳으로 그 법제자들이 수선정진하는 도량이다.

일엽선사께서 입적하신 후 손상좌 월송, 정진 두스님이 힘을 합하여 기념도량을 정비하고 원통보전을 건립하였다.

원통보전은 덕숭총림 초대방장이신 혜암선사께서 증명하시고 2대방장이신 벽초선서께서 터를 잡으시고 3대방장이신 원담선사께서

불사를 직접 진두지휘하여 도편수 장영근거사가 건축하였다.

 

 

이니보탑(二尼寶塔)은 이 모든 선사들의 법은과 시주해주신 은혜불사를 이룩하신 월송, 정진 두 스님을 이니(二尼)로 하여 기리고자

경내에 다보탑을 세우고 이니보탑(二尼寶塔)으로 명명하였다..

 

수덕사 주변에는 비구니들의 암자인 견성암(見性庵)과 환희대(歡喜臺)가 있는데, 견성암은 최초로 문을 연 비구니 선방이며,

환희대는 일엽스님이 거처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겨운 풍경.. 

 

모든 잡귀를 물리친다는 금강문을 나선다.. 

 

수덕여관..

이곳엔 가수 윤심덕과 함께 한말 3대 신여성으로 불리던 여류문인 김일엽과 화가 나혜석의 자취가 남아있다.

춘원 이광수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일엽은 1933년 38세에 이곳으로 들어와 수도승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국 최초 변호사였던 김우영과의 파경으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던 나혜석도 일엽의 뒤를 이어 불제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만공스님으로부터 “너는 스님이 될 재목이 아니다”라고 거부당하자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후에 인생유전을 거듭하던 나혜석은 1948년 서울시립자제원 행려병자 병동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당시 나혜석에게서 그림 지도를 받았던 고암(顧庵) 이응로화백이 1944년 이 여관을 사들였고,

1958년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이곳에 기거했다고 한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고암은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다.

여관 앞 바위에 암각화도 이때 그가 그렸다고 한다..

 

마음속 품은 생각까지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니 그는 그러한 울분을 이 그림에 담아 새겼을지도 모른다..

세계의 화단을 넘나들던 대가의 작품인지라 일반인은 그림을 이해하기 힘든 추상이다...

 

오롯이 남아있는 우물과 장독대..

 

이응로 화백이 인수한 수덕여관은 부인 박귀희 여사가 운영했다고 한다.

이 화백이 아주 어린 제자를 사랑하고 더불어 프랑스로 가 버린 뒤에도 부인은 묵묵히 인내하며 여기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동백림사건으로 투옥된 뒤에도 변함없는 애정으로 옥바라지를 했다. 남편의 사망 후에도 여사는 오랜 인고의 세월을 혼자 견디었다.

부인이 돌아가고 난 후 수덕여관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방치되어 있다가 수덕사에서 관리를 위임받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고암 이응로(李應魯)화백은 이곳 홍성 출신으로 해강 김규진에게 서화를 배웠으며,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남화(南畵) 2대가 중 한명인 마쓰바야시 게이게쓰에게 사사받았고, 혼고(本鄕)연구소 등에서 서양화를

연구하는 등 근대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해방을 맞은 고암은 김영기, 장우성 등과 함께 '단구(檀丘)미술원'을 조직해 식민잔재에서

벗어나 새로운 한국회화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8년 프랑스 평론가 자크 라센의 초청으로 파리로 건너갔고, 이듬해 독일에서 순회전을 가진 뒤 1960년 파리에 정착했다.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한 파케티화랑과 전속계약을 맺어 1961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63년 살롱도톤전에 출품하면서 유럽 화단에 알려지게 되었다.

1968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전에서 명예대상을 획득하여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60년 파리에 정착하였지만 가난에 쪼들려 물감 구입비 조차 없어 컬러 잡지를 찢어 붙여 콜라주 작품을 만드는데 몰두했다.

파리 화단에서는 당시 벽지 신문지 헝겊 등을 화면에 붙이는 콜라주 작업은 많았으나 고암의 작품은 이들과는 달랐다.

종이를 찢고 자르고 구겨서 붙일 뿐 아니라 그 위에 다시 수묵이나 담채로 다양한 마티에르를 표현하는 새로운 콜라주를 선보였다.

고암은 서양미술에 한지와 수묵이라는 동양화 매체를 사용해 스스로‘서예적 추상’이라고 이름붙인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했다.

그의 서예 추상은 70년대 문자추상과 80년대의 군상 연작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데 이어 1977년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미수사건에 연루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1969년 사면되었으나 1977년 서울 문헌화랑의 ‘무화(舞畵)전’을 끝으로 작고할 때까지 국내활동을 하지 못했다.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고, 1987년에는 북한의 초대를 받아 평양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1989년, 그가 사람을 그린 지 10년이 되던 해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그의 대규모 회고전이 기획되었다.

고국 땅을 밟을 수 있다는 희망에 이 전시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정부의 입국금지 명령에 의해 끝내 희망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전시 첫 날 파리의 작업실에서 심장 마비로 쓰러졌으며, 이튿날 86세를 일기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그는 파리에서 활동한 위대한 예술가들이 누워 있는 파리시립 펠 라세즈 묘지에 안장됐다..

 

가수 송춘희의 수덕사의 여승은 수덕사를 ‘실연한 여인의 도피처’로 묘사함으로써 당시 불교계의 큰 반발을 샀다.

당시 수덕사에는 동경유학 중에 만나 결혼한 남편과 이혼하고 수덕사 견성암에 와서 출가를 한 한말 신여성 1호의 칭호를 받던 

김일엽 스님이 수도 중이어서 세간의 관심은 더했다. 숱한 로맨스로 세간에 오르내렸던 그녀 인지라 노래 가사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심기가 불편했던 그녀는 직접 방송국을 찾아가 노래를 금지시켜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송춘희는 수덕사의 여승이 히트하는 동안 한 번도 이 절에 발을 들이지 못했는데, 수도도량을 세속화시켰다는 교계의 반발 때문이었다.

그 후 송춘희는 속세의 길과 결별하고 불교 포교사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대중가요로 인해 수덕사가 비구니사찰이라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였지만 수덕사는 비구니 사찰이 아니다.. 

 

지난 2008년 입적한 대한불교조계종 덕숭총림 수덕사 전 방장 원담 대선사의 부도..

3주기를 맞은 2011년3월15일 추모다례 및 부도 제막식이 있었다고 한다.. 

 

수덕사 부도전..

 

수덕사는 송광사, 해인사, 통도사, 백양사와 함께 우리나라 5대 총림을 구성하고 있다.

총림(叢林)은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 염불원(念佛院)을 갖추어야 비로소 자격을 갖춘다.

경허(鏡虛)스님과 그 법맥을 이은 만공(滿空)스님이 이곳에서 선맥을 일으켰다.

5대총림은 양산 영축산 통도사의 영축총림, 합천 가야산 해인사의 해인총림, 순천 조계산 송광사의 조계총림, 예산 덕숭산 수덕사의

덕숭총림, 장성 백암산 백양사의 고불총림이 있다. 순천 조계산 선암사의 태고총림은 한국불교태고종 소속의 총림이다.

총림(叢林)은 많은 스님들이 함께 모여 수행 정진하는 절을 말하는데, <백장청규>에 따라 수행하는 스님들의 화합하는 모습이 마치

수목(樹木)이 우거진 숲과 같다는데서 유래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에서는 지혜와 복덕을 겸비한 스님을 양성하는 한편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총림설치법>을 제정하였고,

총림 내에는 강원(講院), 율원(律院), 선원(禪院), 염불원(念佛院)을 두도록 하였다.

그러나 현재 총림으로 지정된 모든 곳에는 강원, 율원, 선원만 있고 염불원은 갖추어져 있지 않거나 현판만을 붙여놓은 곳이 대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조계종의 사찰 가운데 염불원을 따로 갖춘 곳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총림이라 하면 강원, 율원, 선원을 두루 갖추고 있는 절이란 의미로 통용된다..

 

수덕사를 생각하며 어느덧 산행을 마치고 주차장에 도착한다..

 

짧은 산행이었지만 천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덕숭총림 수덕사를 함께 탐방할 수 있어 좋았고,

또 하나의 오후 산행이 기다리고 있어 서둘러 주차장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