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아름다운 산 용진산(聳珍山), 그리고 왕동저수지 고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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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산행2013

작지만 아름다운 산 용진산(聳珍山), 그리고 왕동저수지 고향길..

by 정산 돌구름 2013. 9. 19.
작지만 아름다운 산 용진산(聳珍山), 그리고 왕동저수지 고향길..

 

○ 산행일자 : 2013. 9. 18 (수)

○ 기상상황 : 맑음(맑고 무더운 날씨, 28~31℃)

○ 산행인원 : 2명(부부)

○ 산행코스 : 사호동~가학정~마애불~사호동~토봉~석봉~용진정사~왕동저수지 고향길~사호동(광주 광산)

○ 거리 및 구간별 소요시간 : 약13.6km, 5시간 5분 소요

  사호동(09:05)~가학정(09:20)~마애불(09:30)~용진사(09:40~45)~사호동 당산나무(09:50)~쉼터(등산로 입구 10:00)~

  약수터(10:12)~배넘어재(10:32)~토봉(10:55~11:05)~배넘어재(11:22)~석봉(11:30)~갈림길(11:45)~용진정사

  (12:00~05)~약수터(12:07)~왕동저수지(12:15)~축사(12:35)~원당영각(12:45~13:15)~쇠우개재(13:40)~두꺼비바위

  (13:57)~쉼터(14:03)~사호동 당산나무(14:10)

  <사호동~가학정~사호동 1.5km, 사호동~토봉~석봉~용진정사~약수터 3.6km, 약수터~고향길~사호동 8.5km>

○ 주요 봉우리 : 용진산 토봉(349.1m), 석봉(337m)

○ 교통상황 : 문흥1동(08:20)~호남고속~광산IC~13번~산단9번로~임곡~원사호마을(09:00)

 

 

○ 산행지 소개

  용진산(聳珍山, 349.1m)은 광주 광산구 임곡동과 본량동·지산동 경계에 있는 산으로 장성에서 남쪽으로 내려선 능선이 본량에서

  솟아 배산을 이룬다. 동쪽으로 황룡강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어등산과 마주보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쌍봉으로, 날카로운 서편이 '석봉(石峰)', 동편은 '토봉(土峰)'이라 부른다. 두 봉우리 사이 고개는 배가 넘어간다고

  '배넘어재'라 칭한다. 우뚝 솟아 '솟돌뫼'를 한자로 표기하면 용진산이 되고, 뾰쪽산을 풍수에서는 화산(火山)으로 보고 문(文)을

  취하면 필봉(筆峰)이 된다.

  석봉은 큰 바위가 겹겹이 쌓인 마치 붓끝처럼 뾰족하게 솟은 모습이 문필봉을 연상케 하고, 동쪽 봉우리는 석봉과 음양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 토봉으로 불리고 있으나, 암릉과 낙락장송이 숨 돌릴 틈도 없이 절경이 연이어진다.

  작지만 들녘에 우뚝 솟아 암릉과 낙락장송이 어우러져 기막힌 절경을 이루고, 동굴과 폭포 등 수려한 자연경관과 문화유산을 골고루

  갖추어 정도전이 전국을 두루 돌다가 이 산의 빼어난 경치에 매료되어 산사에서 며칠씩 머물고 갔다고 한다.

  일제 때 전국의 이름있는 금광이 있었던 곳으로 임곡 일대는 작은 도시처럼 융성했었다고 한다.

  서쪽 왕동제는 우리나라 지형을 닮은 호숫가에 아늑한 마을과 전원이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산줄기는 호남정맥 내장산 까치봉과 백암산 상왕봉 사이 530m봉에서 뻗어나온 영산기맥상의 구황산 부근에서 남쪽으로 가치를 친

  산줄기가 수련산~동구산을 거쳐 용진산을 빚는다. 동쪽 산줄기는 호남정맥 도장봉 앞에서 가지를 친 병풍지맥이 병풍산~불태산~

  제봉산~팔랑산으로 이어져 어등산을 지나 황룡강에 그 맥을 다한다.

  서쪽 산줄기는 영산기맥 태청산에서 갈려나온 태청지맥 산줄기가 월악산~사랑산~망산~옥산~신걸산을 지나 영산강으로 스며든다.

  물줄기는 모두 황룡강에 살을 섞은 뒤 봉황산 앞에서 영산강과 합류하여 서해바다로 들어간다.

  사호천(沙湖川) 벼랑 소금강(小金剛)에 '불당일월용진수석(佛堂日月聳珍水石)'이란 명문과 함께 마애불이 그려져 있고, 황룡강이

  조망되는 곳에 죽림처사 박경(朴璟)이 1601년 지은 가학정(駕鶴亭)이 있다.

  또, 용진정사는 한말의 도학자 후석 오준선이 나라가 병탄되자 용진산에 강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용진산 자락 임곡~본량 농촌마을 잇는 도보길 왕동저수지 고향길..

  2012년 친환경 생활공간 조성사업으로 만들어진 우리마을 녹색길 45개소 중 하나이다.

  왕동저수지 고향길은 이름 그대로 ‘고향’의 원형들이 살아있는 길이다.

  옛집, 정자나무, 논밭, 제각, 마을길, 고갯길, 저수지 등 농촌마을의 대표 풍경들을 엮었다.

  특히, 걷기 시작점인 원사호마을 앞에는 수령 500년 된 멋스러운 당산나무가 눈길을 끈다.

  코스 중간의 쇠우개재는 용진산 북쪽 산자락에 있는 고개로, 옛날 본량의 원당마을과 임곡의 원사호마을을 이어주던 길이다.

  고향길은 국비 3억5천만 원, 시비 3억5천만 원을 들인 사업으로, 광산구는 덤불에 쌓인 옛길을 다시 닦는 등 탐방로를 정비했다.

  또 정자 5개소, 운동시설 17점, 화장실 2개소, 목교 2개소 등을 설치하고, 곳곳에는 안내판을 세워 탐방객들을 안내한다.

  총 예정구간 10㎞(원사호마을~쇠우개재~원당마을~왕동저수지~본량동주민센터) 중 지난 6월19일 개장된 코스는 약 7㎞이다.

  왕동저수지 부근에서 둑높이기 공사로 인해 코스 개설이 완료되지 않은 것이다..

○ Prologue

 내일이 추석이다.. 추석을 하루 앞두고 시간이 나서 광주근교 산행을 하기로 하고 아침 일찍 광산구 용진산으로 향하였다.

 용진산 인근 마애불을 둘러보고 용진산 산행이 짧을 것 같아 최근에 길을 연 왕동저수지 고향길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무더운 날씨에 산행을 마무리하고 왕동저수지 고향길을 걷는데 아직 미개통인 저수지 인근을 지나 원등마을로 접어드는 길은

 이정표가 없어 찾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짐작으로 길을 찾아 드니 원등마을 입구부터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무더위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볼함된 하루였다..  

 

 

원사호마을 앞에는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수령 500년 된 멋스러운 당산나무가 눈길을 끈다..

 

마을회관 앞의 광산구 걷기 좋은 길 안내도..

 

주차장 옆에는 왕동저수지 고향길 시작점이 있다..

 

마애불과 가학정을 보기위해 마을에서 용진사로 향한다..

 

용진사 옆길로 황룡강 누리길이 이어져 들어서면 조그만 정자에 텐트가 하나 쳐있다..

 

숲길을 따라 오른다..

 

가학정(駕鶴亭)..

이 정자는 전방으로 황룡강을 바라보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육각정으로 골기와 육모지붕을 취하고 있다.

신라 박혁거세의 53대손이며,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하여 무훈을 세운 죽산박씨의 증시조인 박경(朴璟)은 선조가 벼슬길에 나서기를

권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여생을 야에 묻혀 충성할 것을 아뢰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1601년 가을 이곳에 가학정을 건립하였다...

 

 

신선이 학을 타고 노닌다는 뜻의 이 정자는 선조임금이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피난할 때에 벼슬도 없이 자신의 옆을 지키며 보필한

죽산박씨(竹山朴氏) 중시조 박경의 공을 치하하여 벼슬을 내리려 하였으나 한사코 사양하자 대신 축림처사(竹林處士)라는 시호와 

지팡이를 내리고 나라의 돈으로 지어준 정자이다.

400여년의 오랜 풍상을 겪어온 정자가 지난 2007년 폭우로 무너져내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 하는 중에 2012년 5월 광산구에서

남아있는 사진을 참고하여 비슷하게 재건하였다..

 

이곳의 경치를 살펴보면 황룡강이 구비쳐 정자밑을 흐르고 정자에 오르는 길목에는 층암절벽이 솟아있어 소금강을 방불케하고

수림이 울창하여 학덕이 높은 선비가 시서를 벗삼고 살기에는 더 없이 호적한 곳이다..

 

잠시 내려서면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1989.03.20)로 등록된 용진산 마애여래좌상(聳珍山磨崖如來坐像)..

청룡사와 가학정으로 가는 용진산 북쪽 기슭을 100여m 오르면 길 왼편의 서쪽을 향한 암벽중앙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이다..

 

총높이 117㎝, 무릎높이 28cm, 무릎너비 98cm, 머리높이 40cm, 어깨너비 51cm이다.

마애불은 대좌와 광배를 마련하지 않고 불신만을 선으로 새겨 놓았다.

마애불 위쪽 암벽에는 <佛堂日月(불당일월) 聳珍水石(용진수석)>이라는 글씨가 세로로 뚜렷하게 음각되어 있다.

글씨는 가로 28cm, 세로 87cm의 직사각형 구획안에 1.0∼1.5cm의 깊이로 새겨져 있고, 해서채 글씨 크기는 20㎝내외이다..

 

죽림처사 각인..

 

죽산박씨 가학정세수지..

 

그 측면의 소금강(小金剛)..

 

금광의 동굴..

 

소로에 내려서 공장 앞을 지나 49번지방도 아래의 터널을 통과한다..

 

다시 돌아온 용진사..

 

용진사 대웅전..

 

대웅전 불단..

 

석조 미륵불..

 

용진사에서 잠시 머무르다가 사호동으로 돌아간다..

 

누리길 표지판..

 

다시 마을 당산나무 앞에..

 

마을길을 따라 오르면 갈림길.. 우측으로 직진하여 오른다..

 

개울 건너 등산로가 보이고 직진하면 고향길..

 

다시 왕등저수지에서 이곳으로 먼길을 돌아와야 한다..

 

가야할 토봉과 석봉, 그리고 용진정사..

 

계단길이 이어진다..

 

약수터가 나타나고..

 

역시 동굴이 하나있다..

 

호젓한 산사면을 따라 오르면..

 

가파른 계단이 나타나 오른다..

 

우측으로의 조망..

영산기맥 상의 구황산 부근에서 남쪽으로 갈려나온 산줄기가 수련산, 동구산을 거쳐 이곳 용진산까지 달려오고 있다...

 

배넘어재에서 좌측 토봉으로 오른다..

 

토봉에 오르는 암릉에서..

 

잠시 쉬어간다..

 

우뚝 솟은 석봉.. 날카로운 모습이다..

 

소나무 숲과 암릉이 어울어진 토봉..

 

토봉 정상애는 무인감시카메라만 솟아있다..

 

삼각점이 있는 용진산 정상..

 

 

정상에서 잠시 머무르며..

 

잡목으로 둘러쌓여 조망은 별로이다..

 

잠시 쉬었다가 정상을 내려선다..

 

좌측 까작골산, 그리고 산골을 따라 지산저수지가 바라보인다..

 

우뚝 솟은 석봉..

 

황룡강변을 따라 49번지방도가 달리고 있다..

 

쇠우개재, 그리고 비네봉으로 이어지는 낮은 산맥..

 

용진산 석봉에서 내왕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희미한 동쪽 산줄기는 호남정맥 도장봉 앞에서 뻗어나온 병풍지맥이 팔랑산을 지나 어등산에서 황룡강에 숨어들고 있다..

 

서쪽 산줄기는 영산기맥 태청산에서 갈려나온 태청지맥이 월악산~사랑산~망산~옥산~신걸산을 지나 영산강으로 달려간다..

 

다시 내려선 배넘어재..

 

석봉으로 오르면서 바라본 어등산..

 

서북방면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그 뒤로는 희미하다..

 

석봉에서 바라본 토봉..

 

석봉 정상은 바위에 물이 고인 구덩이만 덜렁..

 

용진정사 방향으로 내려선다..

 

건너편의 암봉..

 

가파른 철계단 내리막..

 

또다시 긴 내리막 계단길이 이어진다..

 

올려다본 계단..

 

기암괴송..

 

능선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선다..

 

잠시 내려서면 널따란 상사화 군락지가 펼쳐진다..

 

활짝 핀 상사화가 그 자태를 뽐낸다..

 

상사화 길목을 따라 부드러운 내리막을 이어가면..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된 용진정사(湧珍精舍)에 이른다..

 

용진정사는 한말의 도학자 후석 오준선이 나라가 병탄되자 용진산에 강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용진사가 있던 곳으로 삼봉 정도전, 우암 송시열등이 다녀갔던 곳으로 전해진다.

절이 허물어진 뒤 청안이씨들이 그 터를 가지고 있었으나, 후석이 정사를 짓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옛 절터의 상대와 중대를

희사함으로써 4칸의 정사를 지을 수 있었다..

 

후석이 별세한 뒤 문인들이 정사 동쪽에 3칸의 용진영당(湧珍影堂)을 세우고 1924년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를 모셨다.

영당의 좌우벽에는 큰아들 북파 오헌수와 둘째 아들 도호 오동수의 영정이 함께 걸려있다.

후석은 본관이 나주이며 광산구 도덕동 도림마을에서 오하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백부 향규에게 입양되었다.

8세 때부터 이웃에 사는 친척 오태규로부터 사서와 근사록을 배웠다. 이어 18세 때부터 노사 기정진에게 배웠으며,

이를 계기로 송사 기우만, 식재 기재, 현와 고광선 등과 사귀었고, 전재 임헌회, 입재 송근수 등에게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그의 학문 체계는 경학, 성리학, 예학, 의리론 등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1910년 일제는 명사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이라는 금품을 지급하여 하였는데,

이를 거절하자 헌병대로 끌고 가 갖은 협박을 가했으나 끝내 받기를 거절하였다.

이후 1917년 용진산에 들어가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학을 가르치니, 문하생이 600여명에 이르렀다...

 

1919년 고종이 승하 하시자 문하생들과 용진정사 앞의 바위에서 통곡하였는데, 그뒤 이 바위를 읍궁암(泣弓岩)이라 불렀고,

"원수를 갚기 전에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하여 일생동안 백립을 쓰고 지냈다.

명정에 조선유민이라 쓰도록 유언하였다. 1934년에 그의 학문적 체계를 정리한 문집 25권 12책이 간행되었다..

 

주변에도 상사화가 아름답게 군락으로 피어있다..

 

옻닭으로 유명한 용진산장을 지나 내려선다..

 

약수터에는 용진산등산안내도가 있고..

 

약수터에는 금석(錦石) 오중렬(吳重烈)선생 상이 서있다..

금석은 1925년 도덕동에서 태어나 광주사범학교와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후 1954년 학교법인 금북학원 및 금북중학교를 세웠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교육사업가로 광산교육구 민선 교육감, 나주교육장을 역임하였고,

제8대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도 하였다고 한다..  

 

약수터에서 더러를 따라 내려서면 왕동저수지로 가는 길은 둑높이기와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왕동저수지를 따라간다..

 

그는 길목에서..

 

명절이지만 강태공들은 여전히..

 

저수지가의 외딴집.. 사당같기도 하고..

 

저수지가 끝나는 지점..

 

우측 숲길로 들어 마을길을 따라가면 거대한 축사(우사) 옆을 지난다..

 

축사를 지나 농로를 따라 원당마을로 들어간다..

 

처음으로 왕동저수지 고향길 이정표를 대한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녘너머로 원당마을이 바라보인다..

 

나주오씨 비석들..

 

원당영각(元堂影閣)..

 

보물 제1190호로 지정되어 있는 '전오자치영정(傳吳自治影幀)'을 모셨던 영각(影閣)으로,

나주오씨(羅州吳氏) 문중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현재 영정은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전시하고 있다.

원당영각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기둥을 세운 정면 4칸·측면 1칸 규모의 한식기와 맞배지붕 건물이다.

1892년 나주오씨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이 건립하였으며, 1975년과 1976년에 걸쳐 지붕과 대문을 보수하였다..

 

원당영각 근처에 양평공(襄平公) 오자치(吳自治)를 배향하고 있는 재실인 시기재(始基齋)가 있다..

 

재실은 정면 4칸·측면 2칸의 구조로, 한식기와를 올린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건물 앞에는 툇마루가 있고 뒤쪽에는 쪽마루가 있다.

내부 전면에 재실 건립에 대한 기록을 적은 시기재중건사실기(始基齋重建事實記)가 걸려 있다.

근처 원당마을에는 오자치의 묘가 있는데, 나라에 슬픈 일이 있을 때 묘 옆에 심은 백일홍은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오자치(吳自治)장군은 조선 초기의 무신이지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나 그밖의 인명사전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실려있지 않다.

다만, <세조실록>과 <성종실록>에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활을 아주 잘 쏘았고, 세조 13년(1467)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에 책록되었다고 한다.

그의 영정은 세조가 하사한 것이라 전해졌지만 양식을 보아 성종 7년에 모든 공신들의 영정을 그렸을 때 함께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오자치와 관련된 또 하나의 유적인 용마암은 광산구 지평동 용강골마을에 있으며, 이 바위에는 그의 애마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야생마 한마리가 마을 일대의 들을 쏘아다니며 곡식을 망쳐놓아 마을 사람들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에 오자치가 야생마를 잡아 준마로 길들이고 말과 더불어 무술을 닦었다.

하루는 오자치가 마을에서 복룡산을 향해 활을 쏘며 말에게 화살보다 앞서 달리라 명을 하였다.

화살과의 경주 후 산위에 올라 화살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자 성미가 급한 오자치는 말의 목을 베어 죽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화살이 날아와 말의 허벅지에 박혔다고 한다. 오자치는 자신의 경솔함이 말을 죽였음을 자책하며 말과 함께 달리던

황룡강변 부근의 바위에 앉아 애마에게 용서를 빌고 그 바위를 손으로 깎아 석마를 만들었다고 한다..

 

시기재 옆 정자에 앉아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걷는다..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토봉에서 석봉으로 이어지는 지나온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랭이논 들판과 석봉..

 

나무데크가 나타나고..

 

이어 시가있는 숲길이 이어진다..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쇠우개재..

 

 

소나무 숲길을 따라 내려선다..

 

아름다운 표지판..

 

조그만 목교를 지나..

 

고봉 기대승의 시도 새겨져 있다..

 

가마솥의 제조과정.. 

 

정자를 지나 내려서면..

 

토실토실 밤송이가 영글어간다..

 

두꺼비바위..

 

아름다운 야생화가 지천에 널려 꽃밭을 이룬다..

 

쉼터가 다가서고..

 

쉼터에는 왕동저수지 고향길 안내도..

 

마을길을 따라 당산나무에 이른다..

 

이렇게 왕동저수지 고향길도 끝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