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기행] 월명무애(月明霧靄)의 고요한 사찰, 변산 월명암(月明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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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기행] 월명무애(月明霧靄)의 고요한 사찰, 변산 월명암(月明庵)

by 정산 돌구름 2013. 6. 9.
[부안기행] 월명무애(月明霧靄)의 고요한 사찰, 월명암(月明庵)..

 

탐방일 : 2013년 6월 8일

소재지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월명암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91년(신문왕 11) 고승 부설(浮雪)이 창건하였다.

  선조 때의 고승 진묵(震默)이 중창하여 17년 동안 머물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1863년(철종 14) 성암(性庵)이 중건하였다.

  1908년에 불탄 것을 1915년에 학명(鶴鳴)이 중건하였고, 1956년에는 원경(圓鏡)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의 한 곳으로 대둔산 태고사, 백암산 운문암과 함께 호남지방의 3대 영지로 손꼽힌다.

  봉래선원이 있어서 근대의 고승인 행암(行庵)·용성(龍城)·고암(古庵)·해안(海眼)·소공(簫空) 등이 수도한 참선도량으로 유명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인법당(因法堂)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운해당(雲海堂)·수각(水閣)·요사채 등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쌍선봉 쪽으로 약 100m 거리에 있는 묘적암(妙寂庵)이 있다.

  이 중 운해당과 묘적암, 요사채는 최근에 주지 종흥(宗興)이 신축 또는 중수한 것이다.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없으나 묘적암 위쪽에 있는 2기의 부도(浮屠)가 주목된다.

  사찰측에서는 이부도 중 왼쪽에 있는 석종형 부도가 부설의 사리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부설전(浮雪傳)」에는 그가 죽은 뒤에 다비하여 사리를 묘적봉 남쪽 기슭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

  절의 앞쪽으로는 의상봉과 가인관음봉 등의 암봉들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있고, 법왕봉에 올라 바라보는 일몰 광경이 빼어나다..

 

 

대웅전..

2005년에 새로 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목조기와집이다.

자연초석 위에 덤벙주초와 두리기둥을 세우고 다포형식으로 지었으며, 편액은 ‘대웅전’이고 주련은 4기가 걸려 있다.

내외부에는 단청이 화려하게 칠해져 있고 외벽화는 심우도와 관음보살도가 그려져 있다..

 

천장은 우물반자이고 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며, 창호는 빗살창으로 중앙칸은 4분합이고, 좌우협칸은 3분합씩으로 되어 있다.

내부벽화는 석가팔상도와 천장화로는 16나한상이 그려져있다...

 

내부에는 화려한 닫집과 은은한 색감으로 조각된 장식적인 수미단이 놓여 있으며, 그위에 모셔진 주존불은 석가삼존불좌상이다...

 

주존불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가불좌상이고 협시보살로는 좌우대칭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왼쪽에는 같은 닫집 위에 영가단을 조성하고 있다.  

탱화로는 석가삼존불좌상 뒤쪽에 석가후불탱으로 모셨는데, 그림에는 부설거사나 월명스님이 그려져있는 것이 독특하다.

산신탱과 칠성탱화는 불기 2989년10월18일에 금어 구봉 홍선이 주지 도전 동규스님의 발원으로 조성하였다..

 

또 다른 산신탱과 제석신중탱이 모셔져 있다...

 

내부에는 불기 2525년에 조성한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전..

대웅전과 함께 2005년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에 측면 3칸이고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목조기와집이다.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주심포형식으로 편액은 ‘관음전’이고 주련은 4기가 걸려 있다.

내외부에는 단청이 칠해져있고 외벽화는 그려져 있지 않다...

 

천장은 합판으로 막았으며 용그림과 연꽃이 그려져 있으며, 좌우벽에는 연꽃이 활짝 편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벽 위에는 닫집이 화려하고 천장에는 연꽃등이 매달려있으며, 그 위에 화려하게 조각된 수미단이 놓여 있다...

 

주존불은 2005년 이전 법당에 모셔져 있던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고, 그 뒤쪽에는 목각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연꽃을 투각해서 화려하게 꾸민 목각신중탱이 모셔져 있다..

이 관음좌상은 조선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크기는 높이 80㎝, 무릎 너비 48㎝이다.

내부에는 청옥제 촛대와 향로 등의 의식구가 놓여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범종각..

 

월명범종...

 

요사는 전부 3채가 있는데, 사성선원 옆의 요사는 산신각을 겸하며, 법당 옆 요사는 공양처이다..

 

해당(雲海堂)..

선원 북쪽에 있는 요사는 운해당으로 부르는데 운해당에 걸려있는 현판 가운데 암자이름인 월명암(月明庵)이라는 현판이다...

 

월명암에 얽힌 수많은 전설 속에서 부설전에 전해지는 전설을 살펴본다.

월명은 오빠 등운과 함께 발심하여 수도하고 있을 때 월명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린 부목이 월명에게 정을 품고 접근하였다.

월명은 그 부목의 간절한 요구를 물리쳐야 할 것인가 어떤가를 오빠 등운에게 의논하였다.

등운은 부목이 그렇게 소원하는 것이라면 한번쯤 허락해도 좋다고 했다.

월명은 부목에게 자기 몸을 주어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등운은 그 일에 대하여 누이 월명에게 소감을 물었다.

월명은 “허공에 대고 장대를 휘두르는 것 같다”고 하였다.

얼마 뒤 부목은 다시 관계를 요구해 와 월명은 다시 오빠 등운에게 의견을 물었다. 등운은 한 번 더 들어주어도 무방할 것이라 하였다.

두번째의 소감을 물으니, 월명은 “진흙탕에서 장대를 휘젓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뒤 부목은 다시 세 번째로 월명에게 관계를 요구했다. 이번에도 월명은 오빠 승낙을 받고 부목에게 자기 몸을 허락하였다.

세번째로 오빠가 소감을 물으니, 월명은 “굳은 땅에 장대가 부딪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등운은 월명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운은 월명에게 “깨치지 않으면 죽는다.”고 결단을 요구했다.

오빠는 동생에게 “깨치는 길은 오직 부목을 죽이는 것뿐이다.”고 했다.

애욕과 견성의 두 갈래 길에서 월명은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 했다.

부목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숯불이 새빨갛게 피어오를 무렵, 월명은 부목에게 숯불을 골라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월명의 부탁을 받은 부목은 무심코 허리를 굽혀 아궁이 안에 반신을 들여 밀고 숯불을 고르기 시작했다.

바로 이 때 월명이 그의 몸을 힘껏 아궁이 안으로 밀어 넣고 부목이 아궁이에서 나오려고 하자 등운이 발로 차서 못 나오게 밀어 넣었다.

부목은 그만 죽고 말았다. 

등운은 월명에게"이제 우리는 살인자다. 살인자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법이니 우리가 지옥으로 가지 않으려면 깨치는 것뿐이다.

지옥이냐, 깨치느냐의 두 길 밖에 없다.”고 말했다.. 두사람은 그 날부터 용맹 정진하여 드디어 이레 만에 깨달았다.

한편 불의의 화로 저승에 간 부목의 영혼은 염라대왕에게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여 등운과 월명을 처벌해 줄 것을 요구했다.

염라대왕은 차사를 보내어 월명과 등운을 잡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입선 중이어서 못 잡아갔다.

등운은 부목을 죽인 전후의 사연을 자세히 써서 염라대왕에게 보내며, “나를 잡으려면 모래로 밧줄을 꼬아서 해를 묶어오는 재주가

없다면 나를 잡지 못할 것이다.”라고 이르니 염라대왕은 그의 구도심에 감동하여 그를 용서하고 잡아가지 않았다.

그 후 두 남매는 성불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조선 후기에 편찬한 <영허대사집(暎虛大師集)> 속에 수록되어 있는 부설에 대한 내용이다.

부설거사(浮雪居士)의 성은 진씨(陳氏), 이름은 광세(光世), 자는 의상(宜祥)으로 경주 출신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태어났으며, 어려서 출가하여 경주 불국사에서 원정(圓淨)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영희·영조 등과 함께 지리산·천관산·능가산 등지에서 수 년 동안 수도하다가 문수도량(文殊道場)을 순례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가던 중,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들판이 있는 두릉(杜陵)의 구무원(仇無寃)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집에 있는 18세의 딸 묘화(妙花)는 나면서부터 벙어리였으나 부설의 법문을 듣고 말문이 열렸으며, 그 때부터 부설을 사모하여 함께

살고자 하였다. 부설이 승려의 본분을 들어 이를 거절하자 묘화는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에 부설은 ‘모든 보살의 자비는 중생을 인연따라 제도하는 것’이라 하여 묘화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15년을 살면서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은 뒤 아이들을 부인에게 맡기고 별당을 지어 수도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영희와 영조가 부설을 찾아왔을 때 세 사람은 서로의 도력을 시험하였다.

질그릇 병 세 개에 물을 가득 채워서 대들보에 달아두고 병을 돌로 쳐서 물이 흘러내리는지 아닌지로 도력을 가늠하기로 하였다.

영희도 영조도 병을 돌로 치자 물이 흘러내렸지만 부설이 그 병을 치자 병은 깨어졌으나 물은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부설은 참된 법신에 생사(生死)가 없다는 것을 밝히는 설법을 한 뒤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단정히 앉아서 입적(入寂)하였다.

영희와 영조가 다비(茶毘)하여 사리를 변산 묘적봉(妙寂峰) 남쪽에 안치하였다.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은 그때 출가, 수도하여 도를 깨우쳤으며, 부인 묘화는 110세까지 살다가 죽기 전에 집을 보시하여 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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