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3년 6월 16일
○ 소재지 : 전북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 안국사(安國寺)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적상지(赤裳誌)>에 따르면 1277년(충렬왕 3년) 월인(月印)이 세웠다고하나 태조 때 자초(自超)가 적산산성(사적 제146호)을
쌓으며 지었다고도 전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때 승병들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5년) 증축하고 이듬해 사고(史庫)를 두어 사각(史閣)과 선원각(璿源閣)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을 보관하고
덕웅(德雄)을 승장으로 하여 승병 92명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
이때 사찰을 안국사라고 바꿨으며, 1910년에 사고의 책을 규장각으로 옮기자 이철허(李徹虛)가 사고 건물을 경내로 이전하였다.
1968년 유정환(柳正煥)이 이 건물에 천불을 모시고 천불보전이라고 이름을 바꿨고, 1990년 초에 댐 건설로 절 지역이 수몰지구에
포함되자 1991년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1993년에 절을 완전히 옮겼다.
건물로는 극락전과 천불보전·청하루·지장전·삼성각·범종각 등이 있다. 이 중 극락전은 전북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된 전각으로
내부에는 본래 1772년(영조 48년) 제작된 후불탱화가 있었으나 최근 도난당하였으며 현재의 탱화는 최근에 만든 것들이다.
삼성각 안에는 1899년에 만든 칠성탱화가 있는데, 화기에 따르면 본래 김천 봉곡사 극락암에 있었다.
그밖에 유물로는 범종과 괘불·괘불대·부도가 전한다. 범종은 1788년(정조 12)에 제작된 것으로 요사 옆에 걸려 있다.
보물 제1267호로 지정된 안국사괘불은 1728년(영조 4)에 의겸(義謙)·의윤(義允) 등 비구니 5명이 그린 것이다.
가로 1,075cm, 세로 750cm이며 가뭄 때 이 괘불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찰 입구에 있는 4기의 부도는 모두 석종형 부도로 조선 후기 유물이다..
일주문(一柱門)..
정면과 측면 각 1칸의 목조 맞배건물로 낮은 단층기단 위에 다듬지 않은 2개의 기둥을 일렬로 세운 뒤 창방과 평방을 얹고
그 위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다포로 장엄하였다.
일주문에는 1992년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이 쓴 ‘적상산 안국사(赤裳山 安國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안쪽에는 1995년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이 쓴 ‘국중제일정토도장(國中第一淨土道場)’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특히, ‘國中第一淨土道場’은 무학대사가 이곳을 ‘국중제일의 길지’라고 한 설화에서 유래한 편액으로,
‘안국(安國)’과 ‘정토(淨土)’를 바라는 안국사의 염원을 담고 있다..
청하루(淸霞樓)..
1990년대 적상호의 수몰로 인해 안국사 옛터에 있던 누각을 해체한 후 1992년에 복원한 것이다.
안국사의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목조 맞배건물이다. 불교용품점과 무주 33경의 비경을 엿볼 수 있는 전망대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 외부는 이중구조로 누각 아래로 출입하며, 내부에는 ‘석실비장(石室秘藏)’, ‘청하루(淸霞樓)’, ‘극락전(極樂殿)’, ‘산신각(山神閣)’
등 수몰되기 전 안국사에 있던 현판들이 걸려 있다...
또한 현판 중 ‘石室秘藏’은 사고와 연관된 상훈(尙訓) 스님의 일화를 전해주는 글씨로서 안국사가 『조선왕조실록』 824책,
『선원록』 1천446책, 『의궤』 260책, 『잡서』 2천984책 등 5천514책의 장서를 얼마나 잘 지켰는지를 말해준다.
1627년(인조 5) 적상산성에 사고가 설치된 후 13년 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전쟁의 불길이 적상산까지 번져왔는데,
사고를 지키기에는 승병의 전투력이 역부족이어서 자칫 사고의 장서들이 모두 유실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상훈스님이 사고 안의 장서들을 모두 적상산 정상인 향로봉 아래 안렴대로 숨김으로써 전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는 한 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적은 기록들이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스님에 의해 지켜진 일화로, 1902년 안국사의 대규모 중수 때
승정원 비서원랑 유인철(柳寅哲)이 안국사를 방문해 상훈스님의 일화를 듣고 ‘'석실비장(石室秘藏)’이란 현판을 남긴 것이다...
현판 ‘淸霞樓’는 송석(松石) 이도익(李都翼)이 1859년에 쓴 것으로 가로 165㎝, 세로 55㎝의 장방형 목판에 양각되어 있다..
호국사(護國寺)..
주차장 옆에 있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목조 팔작건물이다.
호국사는 조선 인조 때 전라감사로 있던 윤명은(尹鳴殷)이 창건한 절로, 적상산성 내에 사고를 지키는 산성수호사찰이었다.
1949년 여순사건 때 전소되어 그 터만이 남아 있던 것을, 1990년 적상호의 수몰로 안국사가 이곳 호국사터 로 이전하면서
옛 가람을 기억하기 위해 호국사라는 편액을 이 건물에 걸어둔 것이다.
현재 호국사 가람은 안국사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그 아래 사고를 수호하던 적산산성의 유구와 호국사비가 전하고 있다...
1994년 벽암(碧岩)스님이 쓴 ‘호국사(護國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안국사 수각(우물)...
안국사 성보박물관...
안에는 세계 각국의 불상 300여점과 불교작품 2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범종각(梵鐘閣)..
안국사의 옛 범종과 대화합의 범종을 봉안하기 위한 것으로 1994년 원행(圓行)스님이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팔작건물로 청하루 우측에 있다.
일중거사가 쓴 편액과 1996년 조성한 대화합의 범종 및 운판이 있으며, 1788년(정조 12)에 조성된 안국사 동종이 봉안되어 있다...
단층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얹고, 사면에 홍살을 세운 범종각은 청하루의 기왓골과 수평을 이루며 안국의 염원과
국민 대화합을 바라는 범음을 전하고 있다...
동종은 높이 85㎝, 구경 78㎝의 대형 종으로 어깨에 범자(梵字)가 둘러져 있으며, 4개의 유곽과 종신에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 용뉴는 결실되었으나 종신에 ‘乾隆五十三年戊申三月日赤裳山安國寺大鍾’이라는 명문과 ‘改鑄重’이라는 시주질이 돋을새김되어
있어 18세기 후반 조선 종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전북 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요사(寮舍)..
안국사의 종무를 담당하는 종무소 겸 공양간으로, 지장전 축대 아래에 있다.
1992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4칸의 목조 맞배건물로, 외부에는 주련 4기와 거암(居巖) 김봉관(金奉官)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전면 4칸은 툇마루를 가진 요사채로, 1칸은 부엌으로 사용되며 그 뒷면에는 가건물을 덧대어 창고로 활용하고 있다...
지장전(地藏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1992년에 원행(圓行)스님이 극락전 아래에 세웠다...
낮은 단층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얹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운 주심포계로, 평방없이 창방 위에 익공식 연화공포가 도출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2·4분합의 빗살창호와 4기의 주련이 걸려 있으며, 어칸 상부에는 일중거사(一中居士)가 쓴 지장전 편액이 양각되어 있다..
내부에는 육엽연화문으로 단청된 우물천장과 불단으로 구성되며,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도명존자·무독귀왕 및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어 있는 극락전(極樂殿)..
정면과 측면 각3칸의 목조 맞배건물로, 1991년 원행(圓行) 스님이 옛 안국사 터에서 옮겨지은 것이다. 잘 다듬어진 자연석 축대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3칸에는 꽃빗살문을 칸마다 설치하였다.
정면과 좌측은 4분합이나 우측은 2분합으로 협칸의 구조가 특이한 평면을 보여준다.
건물 외부는 정면과 배면에 다포계양식의 공포를 설치하였는데, 외부는 3출목으로 되어 있으나 내부는 4출목으로 쇠서는 연봉으로
장엄한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건물 외벽은 삼면에 심우도(尋牛圖)를 비롯하여 석가탄생도 등 다양한 설화적 도상을 표현하였으며, 단청은 얼금모로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엄하였으나, 극락전 우측창방 쪽에는 안국사의 설화를 입증하듯 딱 하루만큼 단청할 분량의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고, 우물반자 아래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은 족대 위에 3단으로 구획하여 내부에 안상을 채색하고,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탱화로는 1994년 불모(佛母) 혜원(慧園)이 그린 아미타후불탱과 1965년 금어 남춘인(南春仁)이 그린 신중탱이 있으며,
1995년에 조성된 청동금고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외 불단 뒷벽에는 이 지역의 신앙물로 천재지변을 몰아낸다고 전해지는 1728년 조성의 보물 제1267호인 괘불이 봉안되어 있다...
극락전 아미타삼존불..
극락전에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있다.
불상의 조성기록은 없으나 고개 숙인 자세에 굵고 짧은 목, 장방형 얼굴에 오뚝한 코, 자연스런 천의(天衣)의 옷주름,
사실적인 손표현 등에서 17세기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이 보인다...
본존인 아미타여래좌상은 앉은키 67㎝, 무릎 폭 43.5㎝의 중형 불상이다.
전반적으로 고개를 숙여 움츠린 듯한 어깨에 구부정한 자세를 보이며 장방형의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띤 원만한 상호를 가지고 있다.
얼굴은 중앙계주와 정상계주를 가진 나발에 턱이 짧아지고 각이 진 모습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오뚝한 코에 삼도가 표현된 짧은
목을 지니고 있으며, 법의는 통견의로 자연스런 옷주름과 사실적인 손표현에서 아미타불의 원만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좌협시인 관음보살은 본존불과 흡사한 모습으로 짧은 상투 속에 보관을 착용하였다.
보관(寶冠) 아래쪽으로 자연스럽게 머리칼을 흘러내리고 있어 보살의 오묘함이 느껴진다.
우협시인 세지보살은 관음보살과 대칭적인 구도로 조각수법에 있어 아미타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닮고 있다.
관음과 세지보살은 앉은 키 61㎝, 무릎폭 36.5㎝로 아미타불상과 함께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965년 금어 남춘인(南春仁)이 그린 신중탱...
안국사 극락전 단청 설화..
안국사의 주 법당으로 극락전을 지은 스님이 단청불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하얀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제가 지금부터 100일 동안 단청을 할 테니 극락전에 하얀 막을 치고 물 한 그릇만 넣어 주되
절대로 그 안을 들여다보지 마시오”라고 말하였다.
스님은 노인의 말을 깊이 새기며 궁금증을 억누른 채 노인에게 단청불사를 맡긴 채 무사히 끝나기를 부처님께 기도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 단풍이 떨어질 무렵 어느날, 스님은 천막 속 단청불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단청이 시작된 지 99일째 되던 날 그 호기심은 극에 달하여, 하루를 참지 못하고 가만히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막 안에 노인은 온데간데 없고, 붓을 입에 문 흰 학이 단청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스님이 지켜보는 것을 눈치 챈 학은 완성하지 못한 단청 일을 남겨 놓은 채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인지 안국사 극락전 뒤편 한쪽에는 딱 하루거리에 해당하는 분량의 목재가 단청이 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나뭇결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예전에는 ‘온통 학이 노닐었다’고 할 만큼 극락전에 학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괘불대(掛佛臺)..
극락전 앞 축대 좌우에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의 모습을 갖춘 높이 190㎝ 장방형으로, 중간에 간목(竿木)를 세울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네 면 중 3면은 자연석을 그대로 치석하고, 지주 앞면은 말끔하게 다듬어 ‘擁正八年四月十五日立’이라는 음각의 명문을 새겨 놓았다.
이 괘불대 역시 본래의 안국사 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1728년 괘불이 조성된 후 1730년에 조성한 것이다...
삼성각(三聖閣)...
1992년 원행(圓行)스님이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로 극락전 뒤편 언덕에 있다..
외부는 주로 녹청을 사용하여 단청하였으며, 4분합 어칸 띠살문 상부에는 소남(素南) 이규진(李圭鎭)이 쓴 ‘三聖閣’ 편액이 걸려있다...
내부는 불단 위로 1899년에 조성된 칠성탱과 근래 조성된 산신탱·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칠성탱은 금어 우송상수(友松爽洙)스님이 1899년 김천 봉곡사(鳳谷寺) 극락암에서 조성한 것을 옮겨온 것이다.
장방형의 화폭에 중앙의 치성광여래와 좌우에 일광·월광보살 및 삼태육성과 이십팔수 등 여러 권속을 배치한 모습이다.
이 탱화는 인근 북고사에도 똑같은 칠성탱이 봉안되어 있어, 지리적으로 가까운 김천지방의 금어인 우송스님이 무주지역의 불화불사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천불전(千佛殿)..
1991년 옛 사고(史庫) 터에 있던 선원각을 옮겨 지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맞배건물로 극락전 우측 축대 아래에 있다.
전란의 화마를 입지 않은 유일한 사고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건물 중간에 가로로 방(枋)을 쳐서 중층 구조를 가진 독특한 모습이다.
하부는 사고를 수장한 창고를 겸하며 상부는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어칸에는 4분합 빗살문과 강암(剛菴)선생이 쓴 편액이 걸려 있으며, 좌우 측면에는 내부에 채광을 공급하는 특이한 교창이 있다...
내부는 중앙 불단에는 1995년 합성수지로 만든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은 붉은 바탕에 금니로 출초한 홍탱으로 금어 남인식(南仁植)이 1969년에 조성한 것이다...
좌우 보조단에는 석고천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적정산에 설치한 실록보존창고로 실록(實錄) 824책, 선원록(璿源錄) 1,446책, 의궤(儀軌) 260책 등 총5,515책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1910년이후 일제에 의해 규장각으로 옮겨졌으며, 6.25 한국전쟁때 북한으로 반출되어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보관중이다.
현재 조선왕조실록 복본 34권(왕조별로 1권씩 27권, 무주에 관한 기록 7권)과 왕실 족보인 선원록 복본 5권이 비치되어 있다..
조선 광해군 2년(1610년) 순안어사(巡按御史) 최현(崔睍)과 무주현감 이유경(李有慶)의 요청에 따라 사관을 적상산에 보내
땅 모양을 살피게 하고 산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1614년 적상산성 안에 실록전(實錄殿)을 건립했으며, 4년 뒤인 1618년 9월부터 실록이 봉안되기 시작하였다.
인조11년(1633년)까지 묘향산사고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서 보관하였다...
1641년에는 선원각(璿源閣)을 건립하고 <선원록 璿源錄>을 봉안하여 적상산사고는 완전한 사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 5사고 중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의 실록이 산실(散失)되어 이를 다시 보완하는 작업이 현종7년(1666년)에 시작되었다.
이때 적상산 사고본을 근거로 등사·교정 작업을 했는데 3도 유생이 300명이나 동원되었다.
이 사고의 설치를 계기로 사고의 수호와 산성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승병을 모집하고 수호 사찰을 건립하는 등 여러 방안이 강구되었다.
사고 설치 직후에는 승려 덕웅(德雄)이 승병 92명을 모집해 산성을 수축하는 한편, 분번(分番)으로 사각(史閣)을 수호하였다.
특히, 정묘호란 때는 사고를 지킬 사람이 없어 승려 상훈(尙訓)이 사고의 서책을 성밖의 석굴(石窟)로 옮겨 보관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사고에 다시 봉안하였다. 사고의 수호가 이와 같이 어려워지자 1643년 산성 안에 호국사를 창건해 수호 사찰로 하였다.
조선 말기에 사고가 퇴락해 고종9년(1872년)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했으며, 1902년에는 대대적인 개수공사를 하였다.
1910년 조선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는 실록을 구황실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해 장서각에 보관시켰다.
그러나 산질(散秩)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뒤 6·25동란 중에 분실되어 버렸다.
실록전과 선원각의 건물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선원각은 부근 안국사(安國寺) 경내로 옮겨져 천불전(千佛殿)으로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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