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3년7월20일
○ 소재지 :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
○ 소쇄원(瀟灑園) 소개
1983년7월20일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5월2일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
이곳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각 건물을 지어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 정원이다.
소쇄원은 1530년경에 양산보(梁山甫)가 조영한 별서(別墅) 원림이다.
별서란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여 은거생활을 하기 위한 곳이다.
주된 일상을 위한 저택에서 떨어져 산수가 빼어난 장소에 지어진 별저(別邸)를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 원림(園林)이란 정원과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과 우리나라에선 원림을, 일본에서는 정원을 주로 선호한다.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 오곡문(五曲門), 애양단(愛陽壇), 고암정사(鼓巖精舍) 등 10여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고, 광풍각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집이다.
또한 광풍각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남아 있다.
소쇄원의 형태는 1528년까지 정자 한 채만 있었고, 말년에 이르러 '원(園)'을 갖추었으나 별서원림을 직접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현재 남아있는 소쇄원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그의 손자인 양천운(梁千運)이 1614년에 재건한 것이다.
소쇄원 경영에는 송순과 김인후 등도 참가했는데, 송순은 양산보와는 이종사촌 간이었으며, 김인후는 양산보와 사돈 간이었다.
그밖에 담양부사를 지낸 임억령(林億齡)과 인근 환벽당의 주인인 김윤제(金允梯) 등도 참가하여 풍류를 즐겼다.
홍문관 대사헌으로 있던 양산보는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사사되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지었다.
양산보(梁山甫)는 양사원의 세아들 중 장남으로 담양 창평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공(瀟灑公)이다.
15세 때 상경, 조광조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1519년 17세 때 현량과에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벼슬에 나가지는 못했다.
그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 조광조가 화를 입어 귀향을 가자 유배지까지 스승을 모셨다.
그해 겨울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벼슬길을 등지게 되었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소쇄원을 지었다.
이때 양산보의 나이 17세였다. 그는 이곳에서 세속적인 것과 거리를 멀리하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고 전하지만 그의 학문적 행적은
뚜렷하지 않다. 그가 지은 효부(孝賦)와 애일가(愛日歌)가 전하고 있다..
광풍각(光風閣)..
양산보가 계곡 가까이 세운 정자를 광풍각이라 하고 방과 대청마루가 붙은 집을 제월당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춘릉(春陵)의 주무숙의 인물됨을 얘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을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갠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라고 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
1574년에 쓰여진 <유서석록>에는 광풍각이라는 명칭은 쓰여지지 않고 소재(小齋)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1614년에 양천운이 쓴
「소쇄원계당중수상량문」에는 계당(溪堂)을 '침계문방' 혹은 '광풍각'이라고 같이 쓰고 있어 광풍각이 바로 '침계문방'임을 알 수 있다.
제월당이 주인을 위한 집이라면 광풍각은 객을 위한 사랑방이라 할 수 있다.
이 상량문에 의하면 광풍각은 1597년 불에 타버리고 1614년 4월에 중수하였다.
또한 ‘계당’은 광풍각의 별칭으로 또 다른 시기에는 침계헌, 침계방, 수함水檻, 소함小檻 등으로 부르는 별칭이 있다...
광풍각은 소쇄원의 하단에 있는 별당으로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1칸 전후퇴의 팔작지붕 한식기와 건물이다.
중안 1칸은 온돌방으로 뒷면에는 90cm 높이의 함실 아궁이가 있다.
방의 문턱에는 머름대를 구성하였으며, 문은 삼분합의 들어열개문으로 되어 있다...
막돌허튼층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주두와 소로, 장혀, 굴도리로 결구된 평5량가구이다.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합하였는데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은 눈썹천장으로 되어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서까래는 선자서까래이다...
대봉대(待鳳臺)..
사방 1칸의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는 현재의 초정 대봉대는 1985년경에 재건된 것이다.
소쇄원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 소정은 시원한 벽오동나무의 그늘에 앉아 봉황새(귀한 손님)를 기다리는 집이다.
「소쇄원48영」의 주요한 시점의 하나로 여기에서면 소쇄원의 모든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봉대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대를 쌓고 정자(소정)를 지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대봉대는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봉황새를 기다리는 동대桐臺‘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 곁에는 봉황새가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와 열매를 먹이로 한다는 대나무를 심었다.
또한 입구 쪽으로는 상지와 하지가 있고 바람을 막기 위해 애양단이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상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쇄원48영」중 많은 구절이 적용되는 장소 가운데 한 곳이며, 제37영 ’동대하음(桐臺夏陰)’에서 동대 주변의 분위기를 노래하였다.
이러한 주변의 상황으로 보아 ‘동대’란 대봉대를 가리킨다. 이 대봉대의 넓이는 4m×2.5m이다.
현재 대봉대의 초정 옆에 심어진 오동나무는「소쇄원도」에 근거해서 15대손 양재영씨가 최근에 심어 가꾸고 있다...
제월당(霽月堂)은 정자라기 보다는 정사(精舍)의 성격을 띄는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었다.
당호인 제월은 ‘비 갠 뒤하늘의 상쾌한 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소쇄원도」에 나타난 제월당이나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흥미롭다.
그 건축형태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인 팔작지붕의 한식기와 건물이다.
광풍각의 배면에 여러개의 단을 올려 주거형식으로 건축하여 전면에 마당을 두었다...
좌측 1칸은 다락을 둔 온돌방이며 중앙칸과 우측 1칸은 장귀틀과 동귀틀을 갖춘 우물마루구조인데,
전면과 좌측면은 개방되어 있는 반면, 뒷면은 판벽과 판문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한 높이 1.3m의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워, 도리와 장혀, 보아지로 결구된 평5량가구이다.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합한 형태로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에는 눈썹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추녀 끝에는 팔각의 활주를 세우고 합각부분에서 우미량 형태의 충량이 보와 연결된다...
제월당은 소당(小堂), 고당(高堂)이라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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