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3년 7월 27일
○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 360-2
○ 만육 최양선생유허비 소개
전북 기념물 제81호(1992.6.20)로 두문동 72현(賢) 중 한사람인 최양선생이 산중으로 도피하면서 잠시 머물렀던 곳에 세워졌다.
비석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1.5m, 폭 1m, 두께 0.4m의 크기로, 그가 죽은 뒤에 유림들이 세웠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비문은 노사 기정진이 썼다.
최양(1351~1424)의 자는 백함(伯函)이며, 호는 만육(晩六) 또는 장륙당(藏六堂), 본관은 전주이다.
아버지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지(贄)이며, 어머니는 영일정씨(迎日鄭氏)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운관(云瓘)의 딸이다.
외삼촌인 정몽주에게 사사하였으며,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대제학 등을 지냈다.1384년 예문관직제학에 재임할 때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서북면 정벌에 참여하였으며, 그 뒤 대사간 문하찬성사에 이르렀다.
1392년 이성계파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진안 팔공산으로 들어가 3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태조가 된 이성계와 최양은 고향이 같았고 과거도 한 과장에서 보았다.
태조가 그를 친구로 대우하여 재상 자리에 불렀으나 ‘충신 불사이군(忠臣 不事二君)’이라며 벼슬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태조가 온양에서 완산 공전 팔백결을 전록으로 주어도 받지 않았다.
1424년(세종 6년) 74세에 죽었는데, 세종은 3일간 조회를 폐하고 그의 자손이 등과하면 지체없이 군역을 면제하라고 특령을 내렸다.
또 도승지로 하여금 치제문을 쓰게 했는데, ‘학문과 도덕은 정이천 같고 절의 청직은 엄광과 같다’고 하였다.
태종이 저작하고 세종이 계술한 <금감록(金鑑錄)>에는 위의 사실을 기록하여 전주이씨가 영원히 잊지 않도록 장서각에 비치하고
그 후손들에게도 보냈다. 1834년(순조 34년)에 충익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최양의 사우인 서산서원과 고암서원은 훼손된 뒤 복원되지 않았으며, 덕암서원과 영계서원에서는 제향하고 있다.
두문동 72현은 고려가 망하자 벼슬에 나아가길 거부하고 평생을 두문동에 은거하며 학문을 했던 72명의 고려 충신을 말한다.
유허비는 선현들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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