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기행] 소사모종(蘇寺暮鐘)의 아름다운 사찰, 능가산 내소사(來蘇寺)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변산기행] 소사모종(蘇寺暮鐘)의 아름다운 사찰, 능가산 내소사(來蘇寺)

by 정산 돌구름 2013. 6. 9.
소사모종(蘇寺暮鐘)의 아름다운 사찰, 능가산 내소사(來蘇寺)...

 

탐방일 : 2013년 6월 8일

소재지 :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내소사(來蘇寺)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백제 무왕 34년(633) 백제의 승려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하여 처음에는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내소사는 소소래사이다.  인조 11년(1633) 청민(淸旻)이 대웅전

  지었는데, 그 건축양식이 매우 정교하고 환상적이어서 가히 조선 중기 사찰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후 고종2년(1865) 관해(觀海)가 중수하고 만허(萬虛)가 보수한 뒤, 1983년 혜산(慧山)이 중창하여 현재의 가람을 이루었다.

  이밖에도 고려동종(보물 제277호),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8호), 3층석탑(전북유형문화재 제124호), 설선당(說禪堂)과 요사

  (전북유형문화재 제125호) 등 여러 문화재가 있으며, 정문에는 실상사지(實相寺址)에서 이건(移建)한 연래루(蓮來樓)가 있다.

  내소사의 유래에 관하여, 일설에는 중국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와서 세웠기 때문에 '내소(來蘇)'라 하였다고도 하나 이는

  와전된 것이며, 원래는 '소래사(蘇來寺)'였음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고, 최자(崔滋)의 <보한집>에도 고려 인종 때 정지상

  (鄭知常)이 지은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기록되어 있다.

  또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일기(南行日記)>에도 '소래사'라 하였는데, 이것이 언제 '내소사'로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부속암자로는 청련암(靑蓮庵)·지장암(地藏庵)이 있다.

  1986년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반경 500m 일원이 문화재보호구역(전북기념물 제78호)으로 지정되었다.

  일주문(一柱門)부터 천왕문(天王門)에 걸쳐 약 600m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이 유명하다.

  관음봉(觀音峰) 아래 있는데, 관음봉을 일명 능가산이라고도 하는 까닭에 보통 <능가산 내소사>로 부른다..

 

 

 

보물 제291호 대웅보전(大雄寶殿)...

정면과 측면 각 3칸으로 조선 인조11년(1633)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자연석 축대위에 낮은 기단과 다듬지 않은 덤벙주초를 놓고 집을 세운 다포계건물로 외삼출목 내5출목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그렇지만 단청이 퇴색해 오래된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나 있어 그 화려함이 부담스럽지는 않다.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을 두고 안기둥은 민흘림을 두었으며, 귀솟음과 안쏠림의 기법도 충실하게 이행되어 아주 안정감 있어 보인다.

 

전면 기둥사이 문들은 꽃창살로 장식되어있고, 연화와 국화꽃을 섬세하게 하나하나 조각하였다.

창호의 짜임에 따라 나타나는 짜임새는 다르게 드러나는 내소사 대웅보전의 문살은 꽃살창에 초화문을 투각(透刻)하여 붙인것으로

정면8칸의 문짝은 연꽃과 국화꽃으로 가득 수놓인 화사한 꽃밭이며 정교하고 아름답다..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주불은 아미타여래로 좌 보처에는 관음보살을, 우 보처에는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다..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현존하는 국내 후불벽화로는 가장 큰 규모이다.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인간의 솜씨를 넘은 성스러운 모습이다.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데,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오른쪽에는 신중탱이 있다..

 

대웅전 후면..

 

대웅전 좌측의 조사당...

 

역대 조사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학명당 계종 대선사(鶴鳴堂啓宗大禪師), 만허당 경화 대선사(滿虛堂慶華大禪師), 관해당 인주 대종사(觀海堂仁舟大宗師)..

 

해안당 봉수 대선사(海眼堂鳳秀大宗師), 우암당 혜산 대종사 (愚岩堂慧山大宗師)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삼성각(三聖閣)..

대웅보전 우측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41년 능파스님이 건립하였다.

원래 대웅전 좌측면에 붙어 정북향하고 있었으나, 기와가 동파되고 단청의 박락이 심하여 1986년과 1993년 2차례에 걸친 우암혜산

(愚岩慧山) 스님의 보수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건물 전면은 낮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얹고 그 위에 원주를 세운 민도리집 모습으로이며,

외벽에는 16나한도를 비롯하여 구당(丘堂) 여원구(呂元九)가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후불벽 맞닿는 곳에 불단을 설치하고 그 위로 석고 관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다.

불화로는 1960년 해안(海眼)스님이 모신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이 있다..

 

진화사(眞華舍)..

정면 3칸, 측면2칸, 7평 목조 팔작기와집..

사료는 찾을 수 없으나 1988년 옛터에 우암 혜산선사가 건립하여 한주실 (閑主室)로 사용하고 있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층석탑(三層石塔)...

대웅보전 앞 3층석탑은 화강암을 재질로 한 이중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세운 구조로, 전반적으로 세장한 모습이다.

하층기단은 하나의 석재에 지대석ㆍ면석ㆍ갑석을 각각 각출하고, 면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모각하였다.

갑석 윗면은 상대중석(上臺中石) 받침이 높은 경사를 이루며, 중석 받침은 2단으로 각출하여 아래를 둥글게 말각하였다.

상층기단도 모두 1매의 석재로 면석에 우주와 당주를 하나씩 모각하고, 상대갑석은 탑신받침 쪽에 높은 경사를 주어 2단의 탑신받침을

말각시켰으며, 갑석의 아래 갑석부연을 각출하였다. 탑신석과 옥개는 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으며, 우주를 각 층마다 모각하였다...

 

전반적으로 탑신이 2층부터 급격하게 체감되어 세장한 고려후기 석탑의 모습을 보여준다.

탑의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을 제외하고 완전하지 않은 모습으로, 상륜에는 노반으로 생각되는 장방형의 받침돌 위에

둥근 형태의 작은 석재(石材) 2개를 올려놓았다.

이외 옥개석(屋蓋石)은 4단의 층급받침을 두고 낙수면을 반전시킨 형태로, 옥개석 상면에 탑신 받침을 새기지 않은 특이한 모습이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신라계의 석탑양식을 따른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전북유형문화재 제125호 설선당(說禪堂)..

정면 6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건물로 1640년(인조18년)에 청민대사(靑旻大師)가 승려와 일반신도들의 수학정진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배치는 전면 중앙의 설선당을 중심으로 4면을 건물로 연결하고, 내부에 안마당을 둔 회자형(回字形)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전면에서 보면 설선당이 좌측 건물 옆에 이어 지은 듯하고, 우측은 요사와 연결된 건물이 설선당과 마치 합각을 이룬 모습이다.

안마당에는 우물이 설치되어 있다.

설선당은 112㎡(34평) 규모로 중앙에 우물천장을 배치한 구조로 이루어졌다.

건물 동쪽의 측면 한 칸은 마루이고, 전면의 남쪽 2칸은 난방을 위한 부엌으로 거대한 아궁이가 시설되어 있다.

주초석은 커다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원형 기둥을 설치하였다.

현건물은 1982년 우암 혜산선사가 보수한 것을 1993년 중수한 것으로 어칸에는 이광사가 쓴 ‘설선당(說禪堂)’ 편액 1기가 걸려 있다..

 

요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넓이는 230㎡(69평) 규모이다.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은 현재 승방과 식당 및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고,

2층은 마루로서 식료품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각 칸의 벽면에 환기창을 시설해 놓았다.

설선당과 요사의 두 건물은 서로 높낮이가 다르지만 인위적으로 땅을 평평하게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초석만을 사용하여,

설선당 동쪽과 요사의 서쪽 서까래 일부를 잘라내고 건물의 용마루를 끼워 지붕을 서로 맞추어 건립하였다.

옛 선인들의 지혜와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이 엿보이는 건물로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 당산목 오른쪽에 있는 범종각은 1995년 당시 주지였던 철산스님이 건립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로 종각 내부에 범종ㆍ법고ㆍ목어ㆍ운판의 불전사물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은 사면에 벽체가 없는 개방된 모습으로 초석 위로 난간을 가설하였으며,

정면 어칸에는 1995년 일중거사가 쓴 편액과 1929년에 쓴 ‘혼고대시주(昏鼓大施主)’ 현판이 걸려 있다. 

종을 매달아 놓은 곳으로 종루(鍾樓)라고 부르기도 하며, 북을 매단 곳을 고루(鼓樓) 또는 고각(鼓樓)이라 하지만

대개 절의 사물(四物)이 함께 안치되어 있어 통칭해서 종각이라 부른다.

사물 중의 하나인 법고는 축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한다.

운판은 하늘을 나는 짐승, 목어는 물속에 사는 짐승을 제도하기 위한 소리를 내는 의식구이다...

 

봉래루(蓬萊樓)..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맞배건물로 대웅보전 바로 앞에서 누각과 문의 역할을 하는 봉래루는 1414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1987년 우암혜산(愚岩慧山) 스님이 복원한 것이다.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여 원주를 세우고 그 위에 널마루를 깔아 누각을 올린 모습으로, 1층의 막돌초석에서 생긴 변형된 높낮이를,

2층 누각을 받치는 기둥 높낮이로 조절하여 수평을 취하게 한 특이한 모습이다.

원래 봉래루는 불교탄압기인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대웅보전까지 진입하여 예불을 올렸는데,

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이보다 50cm 정도 낮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봉래루는 본래 1823년에 만세루(萬歲樓)라는 이름으로 중건된 것을 이후 봉래루라는 별칭으로 부르다가 1926년 봉래루로 바뀌었다.

특히, 최남선의 『심춘순례(尋春巡禮)』 중 「변산(邊山)의 사대사(四大寺)」에는 “…여기서부터 전나무 자욱한 축동으로 들어서서

것이 다하는 곳에 만세루(萬歲樓)라는 높은 다락이 앞에 나섬은 이미 내소사(來蘇寺)에 다다른 것이다. 일변에는 봉래루(蓬萊樓)라는

현판을 달았으니…”라고 하여 봉래루와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속설에 ‘봉래루는 실상사의 누각으로 1415년에 세웠다가 옮겨왔다’고도 하나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없다. 

봉래루 내부에는 정지상의 시와 그 주위로 정지상의 원래 운을 차운(次韻)한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으며, 송덕기ㆍ시주질을 비롯하여,

'내소사만세루중건기'(1821), '변산내소사사자암중창기'(1856), '변산내소사영세불망기'(1875) 등 36개의 현판이 사면에 걸려있다..

 

보종각 (寶鍾閣)..

정면과 측면 각1칸의 팔작지붕으로 봉래루 우측에 있는 고려 동종을 봉안한 종각이다.

3단의 계단식 기단 위에 있으며, 낮은 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두고 그 위로 8각형의 석재주좌를 깎아 짧은 원형기둥을 세운 모습이다.

기둥 위로는 창방과 평방을 올려 5포로 구성된 다포를 떠받들게 하였으며,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올렸다.

지붕의 구조가 하부의 구조보다 훨씬 커서 지붕을 지탱하기 위해 사면에서 처마를 받드는 작은 활주가 설치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개방된 모습으로 사면에 창살이 둘러져 있다.

어칸에 걸려있는 편액은 일중거사가 쓴 것이라고 한다...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1880년경 태인에 세워졌던 것을 어떤 연유에서인지 부안군 상서면 김상기의 누각으로

사용하다가 다시 만화동 구병서가 사용하였는데, 1965년 내소사 주지 원경(圓鏡)스님이 이곳으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법당 앞마당에 서남향으로 설치되어 있었으나 우암혜산(愚岩慧山) 스님이 1983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보종각 고려동종(高麗銅鍾)..

높이 103cm, 입지름 67cm의 고려후기 중종(中鐘)으로 보물 제277호로 지정되었다.

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고려 고종9년(1222)에 청림사(靑林寺)에서 만들어진 것을 철종4년(1853)에 내소사로 옮긴 것이다.

항아리를 엎어 놓은 듯한 고복형으로 종신(鐘身)에는 상대와 하대에 모란당초문(牡丹唐草紋)이 시문되어 있으며,

어깨에는 이중여의두문(二重如意頭紋)의 입상화문대(立狀花紋帶)가 배치되어 있다.

종의 정상부에는 주형(珠形)이 달린 용통(甬筒)을 두고 큰 머리의 용뉴가 있는데, 모두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종신에는 당초문의 띠 아래 중판연화문으로 장엄된 유곽 4개를 두르고 유곽 안에 당초문을 새겼으며, 그안에 9개의 유두를 표현하였다.

또 유곽 아래에는 12개의 연잎으로 장식된 당좌(撞座)가 원좌(圓座) 밖에 있다.

유곽과 유곽 사이인 종신 중앙부에는 꽃송이 위로 구름을 표현하고 구름 위에 삼존(三尊)을 새겨 놓았다.

삼존 중 본존은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협시상은 서있는 모습으로, 모두 둥근 두광을 갖추었으며, 운미가 길게 위로 솟아 있다.

그리고 구름 위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보개(寶蓋)가 있어 고려시대 범종문양의 특징과 화려한 장엄미를 보여준다.

이외에도 종신에는 당좌와 당좌 사이에 3종류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에 따르면 “1222년(고종 9) 6월에 장인 한중서(韓仲敍)가

주조하고 담묵선사가 주성한 부령의 청림사 종을 1853년(철종 4) 청림(靑林)에 복거하던 은사(隱士) 김성규(金性圭)가 발굴하여

내소사로 이현(移縣)하였다”고 한다. 내소사 동종은 고려후기의 특징인 입상 화문대를 갖추고 있으며, 표면의 묘사수법과 함께 정교하고

사실적인 주조기술로 한국 종의 양식을 잘 계승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무설당(無說堂)..

대웅보전 앞마당 왼쪽에 있는 무설당(無說堂)은 오른쪽 있는 설선당(說禪堂)과 함께 내소사의 대중방으로 알려져 있다.

두 건물은 처마를 마주보고 서 있으면서 ‘무설(無說)’과 ‘설선(說禪)’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조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무설당의 유래는 해안선사의 『능가산의 유래』에 “고(故) 민허화상(滿虛和尙)의 구전에 의하면 1919년까지 당시 서편에 지금의 설선당과 동일한 건물이 있었는데, 주민의 부주의로 인해 실화소각 당할 때 사적(寺蹟)까지 소실되었는데…”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기록을 통해 1990년 우암혜산(愚岩慧山) 스님이 그 터만이 남아 있던 곳에 현재의 무설당을 복원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 주지실과 승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평면은 ㄱ자형의 구조를 지닌다..

 

내소사 느티나무..

1982년7월21일 부안군에서 보호수로 지정된 내소사 천왕문 앞에 있는 느티나무로 높이 약 20m, 둘레 7.5m의 규모이다...

 

약 1,000년의 수령으로 본래 입암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으로 숭상되어 온 나무이다.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 나무 허리에 무성한 이끼가 덮여 있어 오랜 세월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일주문 앞에는 수령이 500년 정도되는 또다른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이 할아버지 당산과 짝을 이루는 할머니 당산나무이다..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이면 이 나무 앞에서 내소사 승려들과 입암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인줄을 치고 당산제를 지낸다..

 

화래원은 14평의 목조 팔작지붕으로 된 건축물로 1999년 우암혜산선사가 불서보급과 다실로 건립하였다...

 

천왕문(天王門)..

1986년에 우암혜산스님이 신축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사찰의 수호신장인 사천왕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이다.

내부에는 1988년에 조성된 높이 365㎝의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천왕문은 건물 어칸을 통해 출입할 수 있으며, ‘천왕문(天王門)’ 편액은 1986년 김충현(金忠縣)이 썼다.

해안선사의 오도송을 새겨 넣은 4기의 주련이 걸려 있다.

탁명종락우죽폭(鐸鳴鍾落又竹幅) 봉비은산철벽외(鳳飛銀山鐵壁外)

약인문아희소식(若人問我喜消息) 회승당리만발공(會僧堂裡滿鉢供)

 

사천왕상(四天王像)..

동방천왕은 지국천왕으로 비파를 들고 나타나며, 남방천왕은 증장천왕으로 보검을 들고 나타난다... 

 

서쪽을 수호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악인에게 고통을 줘 구도심을 일으키게 한다고 하며,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북쪽을 수호하며 어둠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해 준다... 

 

내소사 사적비와 해안당대종사 행적비..

해안스님은 부안 출생으로 1914년 내소사에서 만허스님을 은사로 출가, 1917년 백양사에서 만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32년 계명학원을 설립하고 1936년 금산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1969년 불교 전등회 대종사로 추대됐다.

스님은 세수 74세, 법랍 57세의 일기로 입적했다.

해안스님은 다양한 수행이력으로 호남지역에서 대도인(大道人)으로 추앙받았으며 당시 묵담스님은 전주를 중심으로 선풍을 드날렸고,

구산스님은 광주와 순천을 중심으로 효봉스님의 가풍을 이어갔다면 해안스님은 김제와 부안을 무대로 선풍을 펼쳤다... 

 

부도군(浮屠群)..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숲 왼쪽에는 크고 작은 10여 개의 부도와 탑비가 정연히 줄을 서 있다.

현재 전부 9기의 부도가 2열로 배치되어 있는데, 앞 열의 부도 4기는 능파당(楞坡堂), 만허당(萬虛堂), 관해당(觀海堂), 해안당(海眼堂)의 근대 부도로 당호가 확인되나, 뒷열의 5기는 조선후기 부도로 그 주인을 알 수 없다...

 

부도전에 있는 비석은 모두 3기가 있다. 「능가산 중흥법주 만허선사비」는 만허선사 제자 해안이 <만허선사 약전>을 바탕으로 지은

것으로, 석전스님이 비문을 짓고 위창거사(葦滄居士) 오세창(吳世昌)이 글을 쓴 것이다.

그 옆에 있는「해안범부지비」는 비를 세울 것을 원하는 제자들의 간곡한 청에 따라 세운 것으로, 당대의 명필 탄허스님이 전면에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라 쓰고 뒷면에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 是無生死)'라 음각하였다.

그뜻은 ‘생사가 이곳에서 나왔으나 이곳에는 생사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외에 1972년 해안스님이 세운「능파당 명철선사 공덕비」가 있다...

 

드라마 대장금 촬영장소..

 

 

<한국의 아름다운 숲>과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 선정된 내소사 전나무 숲길이다...

 

일주문(一柱門)...

사찰 입구에 있는 출입문으로, 1982년 원조스님이 3평의 팔작건물로 건립한 것을 1984년 우암혜산 스님이 단청하여 중수하였다.

정면 어칸에는 1983년 일중(一中) 김충현(金忠縣)이 쓴 ‘능가산내소사(楞伽山來蘇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일주문 앞 할머니 당산.

수령이 500년 정도되는 느티나무로 천왕문 앞의 할아버지 당산과 짝을 이루는 할머니 당산나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