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기행] 덕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산천재(山天齋)와 남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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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기행] 덕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산천재(山天齋)와 남명기념관..

by 정산 돌구름 2013. 5. 27.
[산청기행] 덕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산천재(山天齋)와 남명기념관...

 

탐방일 : 2013년 5월 26일

 소재지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384

산천재(山天齋) 소개

  산천재는 조선의 대표적인 처사였던 남명 조식선생이 거처하며 말년을 보낸 곳이다.

  남명 조식선생과 관련된 흩어져 있던 유물들을 모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 전시관이 있다.

  남명 조식선생은 조선 중기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던 도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을 야인으로 지내 후세에

  그리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 남명선생이 61세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던 곳이 바로 이 산천재이다.

  당시 남명의 제자로는 임진왜란 당시 유명한 의병장이었던 곽재우를 비롯하여 오건, 정구, 김우옹, 최영경, 조종도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산천재 건물과 작은 사랑채 그리고 남명선생 문집책판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 이렇게 세 채의 건물이 쓸쓸히 서 있을 뿐이다.

  산천재는 1561년(명종 16년)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방치되다가 1817년(순조 17년)에야 복원되었다고 한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서 산천재 현판 옆 세 면에는 그림이 있다. 지금은 희미해져서 정확한 그림을 볼 수 없는데, 

  그 그림은 각각 밭을 가는 농부와, 소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는 신선들, 개울에서 귀를 씻고 있는 선비의 그림이라 한다.

  이곳에는 그의 문집을 판각한 48.5×19.5 cm의 문집책판(文集冊板) 185매와 기와 등이 있다.

  또 산천재 건너편 언덕 위에 남명 선생의 묘가 있는데, 이 묘는 선생이 직접 자리를 잡아놓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산천재로 들어서는 산문..

 

안으로 들어서면 남명선생이 제자들에게 학문을 전수했던 산천재(山天齋)를 만난다...

 

산천재(山天齋)는 남명 조식선생이 거처하며, 61세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던 곳이다..

 

 

 

 

 

수령 450여년의 남명매(南冥梅)..

 

단성면 남사리 하영국 고택의 마당에 있는 고려조 원정공 하즙(河楫)이 심은 수령 670여년의 원정매(元正梅),

단성면 운리 단속사지에 있는 통정공 강회백이 심었다는 수령 640년의 정당매(政堂梅),

시천면 사리 산천재에 남명 조식선생이 심었다는 수령 450여년의 남명매(南冥梅)를 산청 3매라 한다..

 

 

 

 

 

 

 

 

남명선생 영전에 내린 선조대왕의 제문 비석..

 

 

작고 단아한 기와지붕의 남명학연구원..

 

 

건너편에는 남명기념관의 출입문인 성성문(惺惺門)..

 

남명기념관(南冥記念館)...

2001년 남명 조식(曺植)선생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었으며, 2004년7월 기념관이 완공되었다.

3개의 전시관이 있으며 영상실, 교육관, 세미나실, 유물 수장고가 있다..

 

제1전시실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서적이 전시되고 있으며, 제2전시실에는 선생의 제자들을 주제로 꾸며져 있다.

제3전시실에는 남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의 최근의 활동상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앞의 거대한 은행나무..

 

남명(南冥) 조식(曺植)..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본관 창녕(昌寧)이다.

지금의 합천인 삼가현(三嘉縣) 토골(兎洞)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20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이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45세 때 고향 삼가현에 돌아온 후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살면서 제자들 교육에도 힘썼다.

1548~1559년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단성현감·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하였다.

단성현감 사직 때 올린 상소는 조정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국왕 명종과 대비 문정왕후(文貞王后)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렇게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處士)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1551년 오건(吳健)에 이어 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김우옹(金宇顒)·곽재우(郭再祐)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이다.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1566년 상서원 판관을 제수받고 왕을 만나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즉위한 선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568년에는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봉사>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후인 1576년 그의 제자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천서원을 건립한 데 이어 그의 고향 삼가현에 회현서원(뒤에 용암서원)을,

1578년에는 김해에 신산서원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 문인들이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세 서원들이 모두 사액되었고 조식에게는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만큼 사화가 자주 일어난 시기로서 훈척정치의 폐해가 극심했던

때였다. 그는 두차례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탓에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하였다.

즉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하여 경으로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서 외부 사물을 처리해 나간다는 생활철학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초학자에게  <심경(心經)>, <태극도설>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방법을 비판하고 <소학>, <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우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황과 기대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하였다.

그는 출사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겨놓은 기록 곳곳에서 당시 폐정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慶尙右道)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합천 등지에 모여 살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 유학의

두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홍 등 남명의 문인들이 인조반정

(仁祖反正)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남명에 대한 폄하(貶下)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南冥學)은 그 후 제대로 계승

되지 못하였다. 저서에 문집 <남명집>과 그가 독서 중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學記類編)>이 있고, 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등이 있다..

 

 

 

 

 

 

재실로 들어서는 산문..

 

 

재실(齋室)..

 

여재실(如在室)..

남명선생과 정경부인, 숙부인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들이 제사를 드리는 가묘이다...

 

가묘는 서원의 사당과 구분하여 별묘라고도 한다.

여재실의 이름은 예기에서 따온 것으로 "비록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진리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매년 세분의 기일과 설, 추석, 동지에는 후손들이 이곳에 모여 제향을 올리고 있다...

 

 

 

 

 

 

산천재 건너편 언덕 위에 남명 선생의 묘가 있는데, 이 묘는 남명이 직접 자리를 잡아놓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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