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기행] 우리시대의 아픈 흔적, 구 목포일본영사관(舊 木浦日本領事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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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기행] 우리시대의 아픈 흔적, 구 목포일본영사관(舊 木浦日本領事官)..

by 정산 돌구름 2013. 5. 19.
우리시대의 아픈 흔적, 구 목포일본영사관(舊 木浦日本領事官)...

 

탐방일 : 2013년 5월 18일

소재지 : 목포시 대의동 2가 1-5

구 목포일본영사관 소개

  1981년9월25일 사적 제289호로 지정된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97년 10월 목포항이 개항되고, 1898년 10월 목포일본영사관이 목포에 설치됨에 따라 영사관으로 지은 것이다.

  일본은 영사관이 건립되기 전까지 조선정부로부터 만호청(1895년 폐진된 목포진)을 빌려 사용하였고, 유달산 고지대에 가건물을

  지어 이관하였으며, 다시 현재의 위치인 대의동에 목포일본영사관과 부대시설인 경찰서·우편국 등을 함께 마련하였다.

  당초 일본영사는 무안감리에게 영사관 부지 16,028㎡를 요청하였으나, 이 신청을 접수한 조선정부는 9,483㎡만을 승인하였다.

  공사비 7만여 원을 들여 1900년 1월에 착공하여 12월에 완공한 것으로 일본인들의 기록이 전해온다.

  이후 목포이사청, 목포부청사 등으로 사용되었고, 광복이후 1947년부터 목포시청, 1974년부터 (구)목포일본영사관,

  1990년 1월부터는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 최근 목포문화원이 이전함에 따라 보수 후 역사문화관으로 단장되었다.

  이 건물이 지어질 당시만 하더라도 높이 13.65m, 연면적 597.68m²로서 목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면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건물 외형은 장방형 2층 구조에 붉은 벽돌과 흰색 벽돌을 사용하였고, 좌우대칭으로 전면은 정연하게 배치되어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현관은 목재로 입구를 돌출 시켜 만들었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들이 대부분 이러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

  창문은 타원형에 차이를 틀어 오르내림창으로 만들었다. 또한 건물의 내부에는 각 실마다 벽난로를 설치하여 모두 9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2층의 두 곳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중 1기는 최고급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눈길을 끄는데, 그 당시에는 집 한 채 값을 호가하는 고가품이었다고 한다.

  건물의 내부는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히 변형되어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천정의 문양이나 띠둘림 등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외형은 백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견고한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시청으로 사용하던 시절에 건물의 주변에 설치한 부속건물들과의 연결통로를 만들기 위해 벽돌을 헐었다가 다시 복원해 놓은

  흔적들이 건물의 원래 벽돌과 조금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6.25당시 공중폭격으로 인해 건물 외부가 조금 손상된 모습이

  눈에 띤다. 목포문화원에는 당시 건물 벽돌에 박혀 있던 탄환4기를 보존하고 있다.

  옛 관청건물이 지니는 위풍당당함을 간직하고 있어 선창가 쪽을 바라보면 구 일본인 조차지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반대로 아래에서 바라보면 약간의 언덕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이 건물의 외형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매우 위압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부속 건물로는 현재 서예실과 음악실로 쓰고 있는 별관 1채가 남아있다.

  목포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개항되어 성장한 근대도시이자, 일제강점기 한국수탈의 기점 역할을 했던 눈물의 도시이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립한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용했던 것도 아니지만, 우리역사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중요한

  역사적 현장으로써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목포의 문화재중 유일하게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해방이후 목포시청으로 오래동안 사용되면서 목포가 행정중심의 도시로 탈바꿈하는 중심역할을 이 건물이 수행하였으며,

  (구)목포일본영사관으로 사용되어 목포시민과도 매우 친숙한 건물이 되었다.

  건축사적인 측면에서 근대건축기법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

  한동안 이 건물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알려져 있었고, 좀 자세히 아는 분들은 원래 러시아가 사용하려고 지었는데 나중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이 건물을 차지하여 사용했다는 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는 이 건물의 외양이 서구식이라는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 동안 이 건물의 유래에 대한 기록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있었다.

  하지만 현재로서 목포문화원은 이 건물이 처음부터 일본 영사관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건축 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우선 건물의 중심부 상단에 일본국화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던 점과 양측 벽면의 상단에 일장기 모형의 벽돌배치, 건물 내부 벽난로에

  새겨진 벚꽃문양 등이 그 물적 증거이다.

  또 1990년 본 건물 옥내 전기배선공사와 1992년 천정 및 마루장 보수시 [韓國木浦日本領事館建築場長谷川方行]이라 표시된

  여러개의 장목이 발견되어 일본인의 지휘하에 목포일본영사관 건물로 지어졌음을 뒤받침하고 되었는데, 확인 결과 현재 이 건물의

  내부에 사용되고 있는 목재들에도 이와같은 글씨가 써져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의 기록이긴 하지만 『목포지(1910년 발행)』라는 책에도 그들이 건축하였던 것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백여년을 목포시민들과 고락을 함께한 이 건물도 큰 아픔이 있었다. 6.25때 공중폭격으로 인해 건물의 외부가 조금 손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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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국도의 출발점 목포 도로원표..

골목길 지나 한 길로 고갯길 넘어 바른 길 찾아서 남쪽으로 내달리면 뱃길과 찾길이 만나는 곳에 시작을 알려주는 도로 원표가 있다.

목포시 대의동에 위치해 있는 도로원표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1번 국도는 목포에서부터 서울을 지나 신의주까지이며, 2번 국도는 부산까지인데, 이 1,2번 국도의 출발점이 바로 목포이다.

남북방향의 국도는 홀수번호, 동서방향의 국도는 짝수번호를 부여하고 있다.

이 길이 처음 만들어질 때 국도 1호선 구간의 공사는 일본인들에 의해 1904년부터 3년간 전구간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1호선 공사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투입되었고, 국도 2호선은 동학농민전쟁 때 포로들이 주요 노동력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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