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기행] 천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덕숭총림 수덕사(修德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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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기행] 천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덕숭총림 수덕사(修德寺)

by 정산 돌구름 2013. 5. 5.
[예산기행] 천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덕숭총림 수덕사(修德寺)..

 

탐방일 : 2013년 5월 3일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

수덕사(修德寺) 소개

  수덕사(修德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천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고찰이다.

  문헌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무왕(武王) 때 혜현(惠顯)이 <묘법연화경>을 강설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 혜근)이 중수하였다.

  일설에는 신라 진평왕 21년(599년)에 지명(智命)이 창건하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도 전한다.

  고종 2년(1865년)에 만공(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국내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가운데 봉정사 극락전(極樂殿, 국보 제15호)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

  18호)에 이어 오래된 건축물로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양 옆에는 승려들의 수도장인 백련당(白蓮堂)과 청련당(靑蓮堂)이 있고, 앞에는 조인정사(祖印精舍)와 3층석탑이 있다.

  그리고 1,020계단을 따라 미륵불입상·만공탑·금선대·진영각 등이 있고, 그 위에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운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부속 암자로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했던 환희대(歡喜臺)가 있으며, 선수암(善修庵)·

  극락암 등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특히 견성암에는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설립되어 있다.

  그밖에 주요 문화재로는 수덕사노사나불괘불탱(보물 제1263호),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381호), 7층석탑(충남

  문화재자료 제181호), 수덕사유물(거문고, 충남문화재자료 제192호), 소조불상좌상(충남문화재자료 제384호) 등이 있다.

  운수납자(雲水衲子 구름과 물처럼 수행처를 돌아다니며 수행하는 스님) 들의 수행정진터,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5대총림(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의 한 곳이다. 일반적으로 수덕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절로 알려져 있다.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의견이 분분한 것이다.

  다만, 삼국유사 <혜현구정(惠現求靜)>조의 기록을 통해 수덕사가 백제시대에 이미 창건된 사찰임 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백제 말에 창건된 수덕사는 근·현대에 들어서 경허 성우(鏡虛 惺牛) 스님을 비롯해 만공 월면(滿空 月面), 수월, 금오 태전(金烏 太田),

  벽초 경선(碧超 鏡禪), 대의(大義), 청담 순호(靑潭 淳浩), 묘리 법희(妙理 法喜), 일엽 하엽(一葉 荷葉) 스님 등의 고승이 주석,

  선(禪)의 중흥지로 뿌리내려져  있다.  

  1984년에 덕숭총림(德崇叢林)을 개설한 수덕사는 종합수도도량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혜암 현문(惠庵 玄門)· 벽초 있다.

  산내암자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선원인 견성암을 비롯하여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선풍을 휘날리던 정혜사와 금선대 등이 있다.

  경선(碧超 鏡禪)·원담 진성(圓潭 眞性)스님 등이 방장으로 주석하면서 수선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이어오고 있다.

  또한 1996년에는 승가대학을 개설해 총림의 위상 제고에 힘쓰고 있다.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개 사찰이 전하지만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수덕사 부도군...

 

 

 

수덕사에는 두가지 전설이 있다.

먼저, 덕산향토지(德山鄕土誌)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홍주마을에 수덕이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 있었는데, 어느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 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번 거절당한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줄 것을 조건으로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개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낭자의 한쪽 버선만

쥐어져 있었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

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두번째 전설은 대웅전 서쪽 벽련당 뒤편의 바위가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신 성역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온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심상궁곡인 수덕사에 이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

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광경을 본 정혜라는 청년은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고 바위속으로 사라진 이 곳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경향각지에 퍼지자 소원을 비는 인적이 끊이지 않았으나 수덕사는 근대한국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만공스님의 가풍을 간직한 선찰로서

자칫 기복에 치우칠 우려가 있어 이를 더이상 구전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많은 불자들의 심원에 따라 수덕사에서는

이 성역에 참배 기도하는 이에게 관음의 신통묘용(神通妙用)한 가피(加被)가 얻어지기를 기원하며 근래에 관음상을 봉조하게 되었다.

 

덕숭총림 제3대방장 원담대선사탑...

2012년3월15일(음력 2월 11일) 수덕사 방장(方丈)을 지낸 선승(禪僧)이자 선필(禪筆)로도 일가를 이뤘던 원담(圓潭 1927~2008)

스님 입적 3주기를 맞아 수덕사에 스님을 기리는 부도(浮屠)가 세워졌다.

원담스님은 한국근대불교사 거봉인 경허(鏡虛)·만공(滿空)스님의 선맥을 이어 수덕사가 덕숭총림으로 자리잡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언제나 자애로운 미소와 천진함을 잃지 않아 '덕숭산 천진불'로 널리 알려졌다.

부도는 원담스님의 상좌였던 옹산스님이 스승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직접 설계했다.

부도의 맨 위에는 만공스님의 법손임을 상징하는 둥근 돌을 깎아 올렸고, 탑신부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는 6각으로 원담스님의

친필을 새겼다. 기단부는 삼보(三寶)와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하는 3단 8각으로 세워졌다..

 

일주문 (一柱門)..

목재가 아닌 석재기둥을 사용해 지어진 수덕사의 일주문 기둥의 형태는 안정감이 돋보이는 배흘림이다.

일직선으로 있는 두개의 기둥사이에 공포가 짜여있는 다포계 형식의 맞배지붕이다.

일주문에는 대체로 많은 현판을 걸어 두는데, 이는 사찰의 위상과 그 격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또 사찰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람의 성격을 앞서 일러주기 위함인데 수덕사도 마찬가지다.

일주문에는 소전 손재영이 쓴 덕숭산 수덕사와 동방제일선원이라는 현판을 걸어 사격을 나타내고 선수행 도량임을 말해주고 있다.

1960년 신축된 수덕사 일주문은 1998년 법장스님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수덕사 사적비...

 

수덕사 금강문..

200년 신축한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장방형 평면을 이룬 단층 맞배집으로 중앙문은 창호를 달지않고 개방하였다..

안에는 중앙문에만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하고 양 측칸에는 중앙 쪽으로 홍살을 세워놓고 그 안에 금강역사(金剛力士) 입상을 세웠다.

금강역사를 인왕(仁王)이라고도 하는데 불법을 수호하는 호불신(護佛神)이다.

금강저를 들고 무서운 모습으로 서 있는 경우도 있고 상체를 벗고 맨주먹으로 치려는 분노의 상으로 서 있는 경우도 있다.

입을 벌린 상을 阿金剛力士(아금강역사) 입을 다문 상을 金剛力士(음금강역사)라 한다..

 

대체로 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구실을 담당하며, ‘인왕역사(仁王力士)’라고도 한다.

이 신은 여래의 온갖 비밀된 사적(事迹)을 알고 5백 야차신(夜叉神)을 거느리면서 천불(千佛)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보통 사찰 문의 왼쪽에는 밀적금강(密迹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서 있다.

이 중 나라연금강은 천상계의 역사로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 배가 된다고 한다.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라는 무기를 가지고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으로,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라고 한다..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사천왕은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한다.

수미단상(須彌壇上)에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차례 동서남북에 배치하였으며 가진 물건으로 구별하였다..

 

수미단상(須彌壇上)에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차례 동서남북에 배치하였으며 가진 물건으로 구별하였다.

사대천왕(四大天王)·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한다. 욕계육천(欲界六天)의 최하위를 차지한다.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그 부하로는 견수(堅手)·지만(持鬘)·항교(恒憍)가 있는데, 이들은 수미산의 아래쪽에 있다.

또한 사천왕은 이들 외에도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는 지쌍산(持雙山) 등 일곱 겹의 산맥과 태양·달 등도 지배하고 있다...

 

광목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다문천왕은 보탑(寶塔)을 받쳐든 모습이며..

 

지국천왕은 비파(琵琶)를, 증장천왕은 보검(寶劒)을 들고 있다...

 

수덕사 가람배치도...

 

덕사 근역성보관(修德寺 槿域聖寶館)...

95년부터 약 5년간의 준비 끝에 2000년 4월에 개관하였으며, 개관식 후 본말사의 성보 약1천여점을 전시, 일반에 공개하기도 했다..

 

성보관 명칭을 근역 성보관으로 칭한 것은 삼천리 화려강산인 대한민국의 상징이며, 수덕사가 백제 불교의 근원지이고,

근대 한국 불교의 선풍을 진작하고 근역 불교운동을 주창한 경허·만공스님의 유훈에서 비롯 명명했다고 건립문에서 밝히고 있다...

 

수덕사 황하정루 지하1층에 240여평 규모로 자동 습도, 온도 조절 시설 등의 현대식 설비를 갖추고 전시실과 수장고를 확보하고 있다.

전시실은 주제별로 구획되어 첫번째 구역에는 백제와 고려시대 불교 역사의 흐름을 정리한 역사관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영탑사 금동삼존불, 개심사 금동여래좌상 등의 각 불상, 풍탁 바라 등의 의식구, 향천사 범종 등이 전시되어 있는 불교미술권역,

흥주사 아미타후불탱화를 비롯하여 각종 탱화를 건 불화관, 멀티미디어관으로 나뉘어 있다...

 

선중흥의 효시로 숭앙받는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유물도 볼거리로 관람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여기에는 경허스님이 제작했다는 심우도 6곡병풍, 그리고 만공스님이 고종의 아들로부터 하사받은 거문고도 보인다.

경허·만공·일엽스님 등 큰스님들의 유품인 발우와 인장 주장자 가사장삼 등이 눈길을 끈다...

 

또, 성보관에는 수덕사와 결연을 맺은 일본 비조사(飛鳥寺)에서 보내온 593년 제작된 금귀걸이, 관옥, 구슬 향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수덕사 근역 성보관은 수덕사 본말사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각 자료에서부터 40여개의 말사에서 기증한 부석사 범종,

백제시대 와당 문수사 금동여래좌상 개심사 괘불탱 등 불교문화재와 백제 문화재 1천4백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수덕사 칠층석탑(七層石塔)..

1984년에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칠층석탑은 1931년 만공스님이 수덕사 주지로 임할 당시 제작한 것이다.

기단부 없이 바로 탑신과 옥개석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면석 밖으로 두드러지게 우주가 표현되어 있다.

면석과 지붕돌은 별개의 돌로 조성되었고, 면석마다 우주와 창방이 표현되어 있으며 지붕돌은 2단의 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결한 느낌을 주는 칠층석탑 상륜부는 찰주 보주 보륜이 올려져 있으며, 비교적 탑의 원형보존이 잘되어 있다..

 

한국전통불교의 맥을 계승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만공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만공기념관(滿空記念館)..

2012년3월28일 만공스님 탄신 141주년을 맞아 경내에 지어진 만공기념관에서 개관식을 가졌다...

 

만공기념관은 스님의 선사상과 민족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08년부터 건립을 추진해 이날 결실을 맺은 것이다.

기념관에는 만공스님의 진영과 발우, 나막신, 세계일화 등의 친필이 전시되어 있다..

 

 

 

 

수덕사 염불원(念佛院)...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염불수행을 전문적으로 전수하는 염불원(念佛院)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총림이라고 한다.

그간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등 4개 사찰이 있었는데, 1996년 3월 장성 백양사(白羊寺)가 총림으로 공식 승격하였다..

 

 

황하정루(黃河精樓)...

2층의 누각으로 대웅전과 마주하여 92년에 준공 되었으나 그 규모가 거대하고 용마루 선이 높아 대웅전을 외호한다는 근본 취지에서

벗어나 94년에 지금의 장소로 이전 개축하였다. 산지형 사찰에서 보여지는 위계 질서를 고려한 것이다.

황하정루는 정면7칸 측면3칸 맞배지붕의 3익공구조로 1고주 11량가구집이다. 

현재 이 누각의 지하는 근역성보관인 박물관으로, 1층은 박물관 사무실로 이층은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에 걸려있는 '선지종찰수덕사'와 '황하정루' 현판은 원담스님 글씨이다.

황하정루(黃河亭樓)의  황(黃)은 부처님의 정신을 뜻하고, 하(何)는 큰강이 흐르듯 정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수덕사 법고각 (法鼓閣)..

종무소 조인정사 앞에 있으며, 범종각과 같은 규모로 정면3칸 측면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법고각은 소리를 통해 뭇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전달해 주고자 하는 사물이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범종은 맞은편의 종각 안에 봉안했기에 이곳 법고각에는 법고 목어, 운판이 있다.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고 수행 정진해야 하는 수행 납자들을 경책하는 의미로 만들어진 목어는 처음에 단순한 물고기 모양이었다가

차츰 용두어신(龍頭魚身)의 형태로 전이되었다. 수덕사의 목어는 물고기의 형상이나 입안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법을 전하는 북, 법고가 올려져 있는 법고대는 조수좌(鳥獸座)의 일종으로 거북등문양(귀갑문)이 조형되어 있으며,

법고의 높이는 297cm 이고 직경 100cm로 천의를 날리며 주악을 울리는 주악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전체 모양 자체가 구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운판은 하늘을 나는 생명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전달해 주는 상징적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운판이 울리면 하늘을 날아 다니는 중생들이 제도되고, 무주고혼은 천도될 수 있는 것이다...

 

범종각(梵鐘閣)..

정면3칸, 측면2칸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1973년에 건축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제작된 범종을 봉안한 곳이다.

화강암의 장대석 기단을 쌓고 원형의 주초위에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을 받치는 주좌는 연판문을 돋을새김하였다.

범종각에서 울려퍼지는 소리 일승원음(一乘圓音)은 부처님의 위대한 작용을 상징화한 것이다.

범종과 함께 목어 운판 법고를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고 하는데, 수덕사에는 불전사물을 한곳에 봉안하지 않았다.

범종각에는 범종만을, 법고각에 법고와 목어 운판을 두었다...

 

1973년에 조성된 이 범종은 높이 4.5m, 둘레 2.7m, 무게는 6500근에 달한다.

범종의 장엄한 소리는 중생을 착한 길로 인도하며 해탈의 길로 승화시켜주는 의식구이다.

수덕사 범종은 에밀레종의 소리를 재현해내기 위해 범종 주조를 전통기법에 따라 제작 하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 처음 만들어지는 대종으로 당시 국내에서 두번째 크기였다고 전해진다. 주조 당시 일만 신도의 동참과 사찰의 재원으로

3년만에 만들어진 이 대종은 한 번 타종하면 2분30초동안 울리고 30리밖까지 소리가 퍼져 나간다고 한다.

하대를 두르고 연주문으로 이어진 복련으로 그 안에는 당초문으로 장식하였고 종신의 하대 바로 위 당좌 사이에는 비천상을 배치하였다.

그 윗부분에 두 겹으로 된 두 줄의 연판문이 유곽을 형성하고 있는데, 각 겹의 연잎문 안에는 연주문이 넣어져 있다.

두 줄 사이에는 국화문과 당초문을 돌려 표현해 놓았으며 유곽안의 유두는 9개로 원형의 화문에 낮은 반구형 돌기를 표출시켜 놓았다.

범종의 종신에는 덕숭산 수덕사범종이라고 명문되어 있고 범종각 내부 평방과 창방에는 범종 불사 동참자 명단이 걸려있다...

 

조인정사(祖印精舍)...

만공스님이 1916년 처음 지은 조인정사는 부처님께서 혜맥을 판단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름 지어진 곳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대웅전과 마주하여 있었으나 건물이 퇴락하여 보수하고자 해체를 해보니, 고탑좌대가 발견되어 현재의 위치인

청련당과 백련당이 있는 단보다 한 단계 낮은 법고각 뒤쪽으로 옮겨졌다.

1993년부터 94년까지 2년여에 걸쳐 해체한 조인정사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집으로 현재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은 화강암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았고 다듬은 사각의 주초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전각의 정면 중앙 5칸 각 칸에는 장방형의 디딤돌이 놓여있고, 이익공 구조의 겹처마로 무고주 5량가구이며, 출입문은 삼분합문이다.

1996년 11월에는 원담스님 숭산스님 설정스님 등이 참석한 가운데 덕숭총림 수덕사 승가대학 현판식을 이곳에서 거행하기도 했다...

 

수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 조사당(1377년) 강릉 객사문과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며 현존하는 건축물로

건축사연구는 물론 미술사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평가받는다...

 

일제강점기 1937년에도 한번의 수리공사가 있었는데, 대웅전 전각건물이 퇴락하여 일본인들에 위해 해체수리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리를 받치는 장여(長舌)와 화반(花盤)의 밑둥에서 발견된 '지대 원년 무신 4월 17일에 기둥을 세웠다(至大元年戊申四月

十七日立柱)'는 묵서명을 통해 수덕사 대웅전은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건립되었고 조선시대에는 1528년(중종 23)과 1688년

(숙종 14), 1751년(영조 27), 1803년(순조 3)에 각각 몇번의 보수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은 석축의 기단위에 세워진 정면3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보다 측면의 칸수가 더 많은 것이 특징이다.

기단은 길게 다듬어 만든 장대석을 7단을 쌓았다. 맨위층의 갑석 한단은 앞으로 조금 나오게 해서 하부 여섯 단의 기단과 구분하였다.

초석은 자연석 주초를 사용하고, 대웅전 정면열 평주와 우주의 초석들은 기둥이 올려지는 자리에 주좌를 둥근 형태로 돋음하여 놓았다.

주좌는 주초윗면에 기둥을 받치는 부분을 약간 높게 자리새긴 자리를 일러 주좌라고 한다... 

 

고려시대 초석은 정교한 가공을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양을  취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남아있는 목조건축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대웅전의 기둥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신전건축물의 기둥에서 보이는 엔타시스기법(고전건축에 사용된 기둥)과 그 맥을 같이한다.

기둥의 아랫부분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기둥의 지름이 커지다가 기둥높이의 1/3지점에서 다시 기둥의 지름은 좁아진 형태를 띠는데,

이를 일러 배흘림기둥이라고 한다. 건물을 보다 안정감있게 보이게 하려는 시각적 효과를 고려한 것이다.

현존건축물 중에 강릉 객사문 기둥에 이어 두번째로 배흘림기법(위 아래는 좁고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형태)이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의 창호는 정면3칸에 각 칸마다 세짝의 빗살문을, 측면 양쪽 모두 홀출입문을 달아두었다. 

대웅전의 공포는 기둥위에만 짜여져있는 주심포 형식이며, 반자(천장)를 꾸미지 않고 서까래가 드러나는 연등천장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기하학적인 화반과 보아지(들보를 받는 첨자처럼 생긴 나무)의 구성에서 부드러운 곡선부재 솟을 합장재와 우미량에서

한국 목조 건축미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전달해주고 있다...

 

대웅전의 편액은 '圓譚' 이라는 관지와 '眞性', '圓譚' 이라는 백문, 주문의 도서 2과가 있다.

고려 목조건축의 우아미를 잘 간직한 이 대웅전에는 1970년대 말까지 義昌君 李珖 의 글씨로 알려진 고격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원담스님은 수덕사 경내에 '冥府殿', '圓通寶殿', '梵鐘閣', '普光堂', '蘭若'(예서), '黃河精樓', '德崇叢林' 등 많은 行草 편액 및

주련 글씨를 爛漫하게 남기고 있다...

 

대웅전 삼존불은 만행산(萬行山) 풍국사에서 조상된 불상을 1938년 남원 귀정사(歸政寺)에서  만공스님이 이운해왔다고 전한다.

풍곡사는 현존하지 않고, 귀정사는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현재는 복원되었다.

삼세불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의미를 융합시켜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이 공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공간적 개념의 삼세불은 사바세계의 석가모니불, 극락정토 세계의 아미타불, 유리광정토 세계의 약사불을 나타낸다..

시간적 개념으로서의 삼세불은 현세의 석가모니불, 과거불인 약사여래불을, 미래불인 아미타불을 의미한다.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좌측에는 약사여래를, 우측에는 아미타불을 봉안했으며, 삼존양측으로는 보살입상을 배치했다.

불(佛)이란 범어의 Buddha(佛陀)의 약칭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각(覺)해서 진리를 깨달은 이를 부처 또는 여래라고 부른다.

본존불 불신의 높이는 187cm이고, 어깨폭은 81cm, 대좌높이는 23cm, 대좌폭은 118cm이다. 

통견으로 결가부좌했으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군의의 띠매듭은 가슴아래 배윗부분에서 보이고 있다.

대의의 의문은 전면에서는 U자형으로 내려오다가 결가부좌한 다리중앙의 아래로 옴자형을 그리며 부채꼴로 퍼진 형태를 보여준다.

석가모니불만 모란문양이 조형된 육각의 좌대와 앙련의 연화대좌위에 봉안되었고, 약사불과 아미타불은 수미단위에 조성되었다.

약사여래불좌상의 높이는 152cm, 어깨폭은 72cm로 통견을 하고 있고 중품하생인의 수인을 맺고 있으며 결가부좌했다.

약사불 역시 석가모니불과 같이 만공스님이 남원 귀정사에서 이운해 온 불상으로 석가모니불의 우측에 봉안되어 있다.

약사여래의 오른손바닥위에는 아주 작은 약합이 올려져 있는데, 약합의 크기와 위치로 인해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우견 위에서 내려오는 법의는 배 왼편 안쪽으로 넘겨지고 다시 결가부좌한 다리 중앙부분에서 발목위로 부채꼴 모양을 그리며 내려온다.

아미타불좌상의 높이는 147cm, 어깨폭은 72cm로 결가부좌하였으며 중품하생인의 수인을 맺고 있다.

삼세여래를 협시하고 있는 두구의 보살입상은 문수와 보현보살인데 조선시대 후기 조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복련의 연화대좌 위에 봉안되었으며, 보살의 보관만 높고 화려하게 장엄되었을 뿐이다.

영락도 무릎 아래로 단순하고 소박하게 내려져 있으며 천의도 두툼한 의습선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 후불탱(大雄殿 後佛幀)

본존불 뒤의 후불탱은 화면중앙에 석가불을 모시고 그 좌우로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신 불화이다.

사후에는 극락왕생을 생존에는 무병장수를 염원하며 봉안했다. 조선시대 종파의 통폐합으로 인해 삼세불화는 삼불회 형식으로 변형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는 법화신앙의 복합성을 보여주는 화면배치로 한폭에 영산회와 약사회 아미타회 모두 그려넣는다.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가모니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문수·보현·관음·세지보살이 있고 십대제자가 둘러선 영산회를 화면 중앙에

배치하였다. 보이는 화면의 오른쪽 약사회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시립하는 약사여래좌상을 그렸으며 왼쪽화면에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배치된 아미타회를 조성하였다.

삼세불 모두 두광과 신광에 연주문을 넣어 그렸으며 석가모니불만 편단우견의 의습이고 약사불과 아미타불은 통견이다.

조각과는 달리 평면에 그려지는 부처의 의문(衣紋)은 보살의 장식적인 화려함이 보인다.

화면 하단부에는 탑을 들고 있는 사천왕이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고 화면 곳곳에는 아주 작은 크기로 성중(聖衆)이 묘사되어 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이 불화는 금어(金魚)비구로 금호 약효(錦湖 若效), 목우(牧雨)스님 등이  참가하여 그린 것으로

만공스님 증명으로 1908년(융희 2) 6월에 봉안된 것이다...

 

수덕사 삼층석탑 (三層石塔)..

1983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03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은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하고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한 고려초기의 석탑이다...

 

2층의 기단으로 상층기단은 4개의 돌로 면석을 조립하였고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표현해 놓았다.

지붕돌과 몸돌은 각각 한 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1층은 5개의 옥개받침을 갖고 있으나, 탑신2층과 3층은 각 3개의 옥개받침을 갖고 있다.

석탑 상륜부에는 3층의 지붕돌과 한돌로 만들어진 노반이 있으며, 수레바퀴 모양의 보륜과 보개가 남아있다.

지붕돌은 끝이 올라가 있으며 파손된 귀퉁이 부분이 보인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탑의 높이는 410 cm이다...

 

명부전(冥府殿)..

수덕사 명부전은 1968년에 원담스님이 건립하였으며 맞배지붕이며 정면3칸 측면2칸의 주심포집이다.

외부 벽의 벽화는 사찰 법당 벽화에서 흔히 마주치게 되는 심우도이다.

소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에 가서는 소를 타고 집에 돌아와서 모두 놓고 일원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일러주는 내용을 묘사한다...

 

명부전은 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자는 것)을 기원하며 영가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전각이다.

모든 중생이 성불할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으며,

창호가 있는 전각 전면을 제외한 내부 세 벽면에는 유명계(幽冥界 지하의 세계인 유명계 또는 명토(冥土)라 하는 곳은 염마왕(閻魔王)이

다스리는곳)를 보여주는 시왕도가 후불탱과 함께 목조로 부조되어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 지장보살좌상과 목각시왕탱(地藏菩薩坐像과 木刻十王幀)

수덕사 명부전의 지장보살좌상은 왼손 바닥에는 보주를 올려 놓았으며 오른손 엄지와 가운데손가락사이에 석장을 끼워 잡고 있다.

지장보살상은 민머리에 통견으로 중품중생인을 결하였고 결가부좌하였다.

의습은 대웅전의 본존불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후대에 조성된 지장보살이 모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각안의 불단은 상대·중대·하대의 3단을 이루고 있으며, 팔각대좌위에 지장보살좌상을 봉안해 놓았다.

유명계를 관장하는 시왕 가운데 도산지옥을 다스리는 진광대왕(秦廣大王)이 첫번째 왕으로 죽은 사람의 첫 칠일을 관장하는 명관이다.

도산지옥에서 중생들의 망어죄(妄語罪)를 다스리는데 업의 경중을 다는 저울인 업칭(業秤)에 죄업을 달아 그 무게만큼의 벌을 내린다.

망자가 죽은지 14일이 되면 나하(奈何)라는 큰강을 건너게 되는데, 그 강의 초입에 관청을 세우고 망자의 도하를 감시하고 있어

초강(初江)대왕이라고 부르며, 화탕지옥(火湯地獄)을 관장하는데 옥졸이 죄인을 끊는 물에 집어넣고 있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송제(宋帝)대왕은 한빙지옥(寒氷地獄)을 맡는 3번째 왕으로 사후(死後) 21일을 주관하며, 사음(邪淫)의 일을 다스린다.

얼음산에 갇힌 망자들의 모습과 사자의 인솔에 따라 지옥으로 끌려오는 죄인망자들이 묘사되어 있다.

4번째왕인 오관(五官)대왕은 검수지옥(劍樹地獄)에서 다섯가지 형벌을 주관하는 왕으로 죽은 사람의 네 번째 칠일까지 맡는다.

옥졸에게 번쩍들어 올려져 검산에 내동댕이 쳐지는 장면과 검산에 떨어진 죄인들을 독사가 휘감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지옥의 대표주자인 염라대왕(閻羅大王)은 다섯번째 왕이다.

제6왕은 변성(變成)대왕으로 업칭(業秤)과 업경(業鏡)에 의해 재판을 받고도 죄가 남은 사람이 있으면 지옥에 보내 벌을 받게 한다.

태산(泰山)대왕은 대애지옥(碓磑地獄)을 다스리며 사후(死後) 일곱 번째 칠일, 즉 49일을 관장하는 왕이다.

염라대왕의 서기역할을 맡아보며 기록에 의하여 선악의 경중에 따라 망자들이 다음생에서 어떤 몸을 받고 태어나게 될지를 결정한다.

평등(平等)대왕은 8번째 왕인데, 사후의 백일째 일을 관장한다. 톱에 의해 몸이 잘리는 거해지옥(鋸解地獄)을 다스리기도 하며,

팔한팔열(八寒八熱)지옥을 관장한다. 죄복의 업을 공평하게 다스린다하여 평등대왕이라고 한다.

제9왕인 도시(都市)대왕은 사후의 일주기를 관장하는 왕이다.

열명의 대왕중 마지막 왕이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으로 죽은 사람의 3주기의 일을 관장하며, 중생의 어리석음과 번뇌를 다스린다.

죽은 후에 여러왕을 만나 죄값을 치른 뒤 마지막으로 마주치게 되는 열번째 왕은 망자가 다시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를 최종 결정한다..

 

염화실(拈花室)..

대웅전을 기준하여 동편 명부전의 뒤쪽으로 경사진 부지를 이용해 정면3칸 측면2칸으로 1998년에 지어졌다.

수덕사의  방장스님께서 거처하는 곳으로 공포는 외1출목의 이익공이고 겹처마의 팔작지붕집이다.

염화실의 기단은 외벌대 화강암으로 장대석을 설치하였으며 초석은 자연석을 이용, 덤벙주초로 한 뒤 원기둥을 세웠다.

정면3칸은 이분합문의 창호를 달았고 디딤돌을 놓았다..

 

요사채 청련당과 백련당 (寮舍 淸漣堂, 白蓮堂)..

대웅전을 오르기 전 바로 좌우측에는 백련당과 청련당이 있다.

강원의 학인스님들과 절의 소임을 맡아보시는 스님들이 거처하시는 요사인 것이다.

대웅전에서 보았을때 좌청룡우백호를 상징한다고 한다.

백련당은 1926년 만공스님이 초창하였고 1993년 법장스님이 개창하였으며,

청련당은 1974년 견성암 건물을 축소 이전하여 건립한 것으로 처음에는 일자형 건물이었으나 1997년 'ㄴ'자형으로 개축하였다.

청련당 건물 아래 식당을 신축하여 후원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백련당과 청련당의 현판글씨는 만공스님의 제자(題字)이다...

 

청련당...

 

백련당..

 

백련당...

 

관음전..

 

2006년 상량식을 거행하여 불사한 관음전..

 

관음전 옆의 개산조 대덕지명법사비..

 

관음전 앞..

 

금강보탑(金剛寶塔)..

금강보탑은 성역화 중창불사 중 조인정사를 해체하면서 전탑좌대가 발견된 그 자리에 2000년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3층석탑인 금강보탑 기단부의 면석에는 문수, 보현, 관음보살 등을 부조해 보살의 자비를 상징하고 사천왕상은 이를 지켜주는 의미로

함께 부조되어 있으며, 기단부의 귀부분에는 사자상을 조각하여 세웠다.

탑신좌대에는 앙련과 복련을 돋을새김으로 표현했으며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 한 개의 돌로 조성되었고 지붕돌받침은 4개이다.

탑의 상륜부는 금강저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석탑의 높이는 950 cm 이다.

 

금강보탑 안에는 1988년 원담스님(방장)이 스리랑카를 예방하고 종정으로부터 증정받은 부처님진신사리 3과를 친견법회후 봉안했다.

또 소불상 천불과 금강보탑의 외형을 본뜬 999개의 모형탑을 봉안하여 여래천불천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발견된 전탑자리는 전문가의 고증을 받았고 이에, 탑명칭을 금강보탑이라고 하였다...

 

금강(金剛)이란 불괴신(不壞信)의 불·법·승 삼보와 계체(戒體)를 상징한다.

남북통일과 민족화합을 염원하며 건립된  금강보탑은 2000년 7월 다음과 같은 발원문을 남겼다.

국태민안과 세계평화를 위해 청풍납자 속성정각하여 광도중생하고 박복자(薄福者) 복덕구족(福德具足)하여 고통받는이 모두

이고득락(離苦得樂) 할 것을 발원한다고..

 

서선당..

 

승가대학...

 

관음바위 관음보살상 (觀音岩 觀音菩薩像)..

대웅전 서쪽 정혜사 산길로 오르기 전 관음보살이 현현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관음바위와 관음보살입상이 있다.

관음보살이 현신하여 수덕사가 창건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져오는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이야기가 회자된다..

 

 

 

 

이니보탑(二尼寶塔)..

환희대는 만공선사께서 창건하시고 일엽선사와 경희 효상좌께서 만년에 주석하였던 곳으로 그 법제자들이 수선정진하는 도량이다.

일엽선사께서 입적하신 후 손상좌 월송, 정진 두스님이 힘을 합하여 기념도량을 정비하고 원통보전을 건립하였다.

원통보전은 덕숭총림 초대방장이신 혜암선사께서 증명하시고 2대방장이신 벽초선서께서 터를 잡으시고 3대방장이신 원담선사께서

불사를 직접 진두지휘하여 도편수 장영근거사가 건축하였다. 이 모든 선사들의 법은과 시주해주신 은혜불사를 이룩하신 월송, 정진

두 스님을 이니(二尼)로 하여 기리고자 경내에 다보탑을 세우고 이니보탑(二尼寶塔)으로 명명하였다..

 

 

 

 

 

 

 

이응로화백이 새긴 수덕여관 현판..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구한말까지 손님이 거처하던 곳..

 

수덕사 선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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