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기행] 단속사지와 동·서삼층석탑, 그리고 정당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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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기행] 단속사지와 동·서삼층석탑, 그리고 정당매..

by 정산 돌구름 2013. 4. 29.
산청 단속사지와 동·서삼층석탑, 그리고 정당매..

 

탐방일 : 2013년 4월 28일(일)

소재지 :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333번지

단속사지(斷俗寺址) 소개

  현재 절터에는 동,서 3층석탑과 당간지주가 원위치에 있다.

  주변에는 금당지를 비롯하여 강당지 등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신라시대의 가람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동·서 3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비례미와 균형미가 잘 조화되어 안정감이 있고, 또한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여 우아하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이 같은 쌍탑 가람형식이 경주를 떠나 지방의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비롯한 석물들이 출토되고, 주변 민가의 담장이나 집안에 많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단속사에는 신충이 그린 경덕왕 초상화와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없다.

  또한 단속사에는 두 개의 탑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법랑(法瑯)에 이어 선종을 익힌 명필 탄연(坦然)의 비인데, 부서진 것을

  수습하여 동국대학교 박물관과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각각 소장하고 있다.

  단속사(斷俗寺)가 창건된 시기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748년(경덕왕 7년)에 이순(李純)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또하나는 763년(경덕왕 22년) 신충(信忠)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1568년(선조 1년)에 시련을 겪게 되는데 당시 유생(儒生)들이 사찰을 훼손하였다고 전해진다.

  그후 정유재란으로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는 단속사지동삼층석탑과 서삼층석탑이 남아있고, 그외 사찰의 흔적으로는 터만 남아있다..

 

 

 

단속사지 동 삼층석탑(斷俗寺址 東 三層石塔)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72호로 지정되었다..

 

 

 

 

보물 제73호 단속사지 서 삼층석탑(斷俗寺址 西 三層石塔)...

 

 

 

 

 

단속사지 당간지주...

 

 

 

정당매(政堂梅)..

신라시대 창건된 사찰인 단속사지에 있는 매화나무이다.

고려말 이 고장 출신의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수령은 약 600년이며 높이는 8m, 둘레는 1.5m이다.

강회백이 벼슬길에 나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는데 이 벼슬이름을 따서 정당매라고 부르게 되었다.

강회백이 고향에 들러 정당매를 보면서 지은 시가 전하고 있다.

특히 정당매는 통정의 손자 강희안(姜希顔)에 의해 심은 내력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는 매화나무다.

그의 저서 ‘양화소록’(養花小錄)의 ‘매화’ 편에 ‘우리 선조 통정(通亭`할아버지 강회백)이 어려서 지리산 단속사에서 책을 읽었다.

그때 절 마당 앞에 손수 매화 한 그루를 심어 놓고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천지의 기운이 돌아가고 또 오니/ 하늘의 뜻을 납전매(臘前梅`세한에 피는 매화)에서 보는구나/

바로 큰 솥 가득 맛있는 국을 끊이는데/ 하염없이 산속을 향해 졌다가 또 피는구나

공이 과거에 합격한 뒤에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에까지 이르렀다. 조정에 있을 때 옳고 그름을 분간하여 바로잡고

조화로써 서로 돕고 구제한 일이 매우 많아서 당시 사람들이 시참(詩讖`시를 쓴 것이 뒷날 뜻밖에 들어맞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속사의 스님이 공의 덕과 재주를 사랑하고, 깨끗하고 높은 인격을 흠모하여 매년 뿌리에 흙을 북돋아 주고 가꾸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계속 전해져 정당매(政堂梅)라고 부른다..

산청에는 어느 군에도 없는 정당매, 원정매, 남명매 등 이른바 ‘산청 3매’가 있다.

정당매는 여말 통정 강회백(姜淮伯), 원정매는 원정(元正) 하즙(河楫), 남명매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손수 심은 매화나무다.

따라서 짧게는 400여 년 길게는 600여 년 동안 산청을 지켜온 고매(古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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