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경 4박5일, 제3일 - 2. 지상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궁궐 자금성(紫禁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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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중국

중국 북경 4박5일, 제3일 - 2. 지상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궁궐 자금성(紫禁城)

by 정산 돌구름 2013. 4. 12.
중국 북경 4박5일, 제3일 - 2. 지상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궁궐, 자금성(紫禁城)

 

 

여행일정 : 3일차(4월 7일, 일) 천안문광장~자금성~인력거투어~왕부정거리~천단공원~금면왕조쇼

  06:00 기상후 인근 산책 / 07:00 호텔 조식 / 08:00 호텔 출발

  08:35 천안문광장 / 09:20~10:50 자금성 / 11:00~11:30 인력거 투어 / 11:40~12:25 점심식사(현지식)

  12:45~14:00 왕부정거리 / 14:10~15:10 동인당 / 15:25~16:20 천단공원 / 16:50~18:40 금면왕조쇼

  18:50~20:10 전신맛사지 및 저녁식사(삼원정) / 20:40 호텔 투숙

 

여행개요

 1) 샹그리라호텔

   아침 6시 기상하여 호텔 인근을 산책하고 7시에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호텔을 나선다.(08:00)

 2) 천안문광장

   8시35분, 전용버스를 타고 천안문광장에 도착한다. 엄청난 인파가 천안문광장에 운집해 있다.

   세계 최대광장 천안문(총면적 40만m²)은 명청시대 궁정광장이었고, 1919년 5.4운동이래 중국현대사를 대표하는 무대이다.

   중국을 상징하는 문화의 광장 천안문은 중국인들도 가장 방문하고 싶어하는 2대 명소로 꼽히고 있다 한다

 3) 자금성 관광

   천안문광장에서 자금성으로 들어선다.

   자금성은 중국 황제 권력의 상징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이다.

   명/청대 정치의 중심지이자 황제의 거처였던 자금성은 고대의 사상과 기술을 건축에 융화한 중국 건축박물관이다.

 4) 인력거 투어

   자금성을 빠져나와 베이징 시차하이스포츠스쿨 옆에서 인력거 투어를 한다.(11시~11시30분)

   직접 사람이 끌어주는 인력거를 타고 북경골목(후퉁)을 구경하며, 북경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다.

 5) 점심식사

   인력거 투어를 마치고 11시40분,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 한다.

 6) 왕부정거리

   14시45분 왕부정거리에 도착하여 거리를 둘러보고 15시에 출발한다.

   왕부정거리는 서울 명동과 같은 곳으로 백화점과 다양한 상점을 구경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야시장에서는  한국에서 맛보기 힘든 전갈, 열대과일, 지네, 메뚜기 등의 이색적인 간식거리를 맛 볼 수 있어

   인기가 높다.

 7) 동인당 쇼핑

   인근의 동인당에 들려 14시10분부터 1시간여 머무른다.

 8) 천단공원 관광

   동인당에서 나와 15시25분, 북경 4대 문화유산중 하나인 천단공원을 관광한다.

   천단공원은 하늘에 풍년을 빌기 위해 1420년 명대의 영락제가 건설했다.

   이곳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은 지니엔뎬(幾年殿)으로 오곡이 풍성하기를 빌던 곳이다.

   높이 38m, 지름 32.7m의 원형 목조 건축물로 제례용치고는 꽤 큰 규모다. 3층으로 이루어진 푸른 지붕은 ‘유리기와’라

   불리며, 하늘을 상징하는데, 명대에는 아래부터 자주색, 황색, 푸른색의 세 가지 색으로 이뤄져 있었다고 한다.

 9) 금면왕조쇼

   16시20분, 천단공원을 출발 금면왕조쇼를 공연하는 극장에 도착한다.(16:50)

   금면왕조쇼는 17시30분부터 18시30분까지 1시간 공연되고 사진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중국내 최정상급 감독, 음악 제작자, 의상 제작자 및 200여명의 우수한 배우들이 펼치는 뮤지컬이다.

   중국 고대 신화속의 두 남녀의 낭만적인 사랑을 주제로 황금가면 여왕과 파란 가면 왕의 전쟁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

   특히, 몽환적이면서 웅장한 분위기 속에서 펼쳐지는 춤과 연기, 화려한 의상, 입체적인 무대장치 등이 압권이다.

 10) 전신맛사지 및 저녁식사

   인근의 삼원정에서 전신맛사지를 하고 같은 건물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된장국이 시원하다.

 11) 샹그리라호텔 투숙

   저녁식사를 하고 20시40분, 호텔에 도착한다. 저녁에 술한잔하고 잠자리에 든다...

 

자금성(紫禁城, 쯔진청)..

자주색의 금지된 성이란 의미를 가진 중국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궁궐 자금성은 오랫동안 일반인들이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궁궐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황제, 황후, 고위 관리와 궁녀, 내시, 시종, 외국 사절단 정도가 전부였다.

지금은 자금성을 ‘고궁박물원’이라고 부르며, 자그마치 5세기 넘게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황제의 공간은 박물관으로

옷을 갈아 입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자금성은 명과 청나라 두 왕조시대, 거대한 나라 중국의 중심지였으며, 중국인들은 이곳을 세상의 중심이자 신성한 장소로

생각했다.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넓은 공간에 수많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는데 건축물 하나하나가 중국 고대사상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자금성은 과거 중국왕조가 얼마나 눈부신 문화를 이루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는지 잘 보여 주는 문화유산이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톈안먼(天安門) 성벽은 길고 높아 보인다.

거대한 문을 지나 조금 이동하면 500년 넘게 절대 권력의 중심지였던 거대한 궁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중국 황제들이 살았던 궁궐, 자금성이다.

자금성에 살았던 중국 황제들은 하늘의 아들이란 의미로 ‘천자(天子)’라고 불렸다고 한다.

명 제3대 황제 영락제는 황제가 된 지 4년째인 1406년, 수도를 남쪽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거대한 궁궐을 짓게 했다.

약 100만명이 14년에 걸쳐 건설한 끝에 모습을 드러낸 자금성은 이전까지의 어떤 궁궐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웅장했다.

전체면적 72만㎡, 건축면적만도 15만㎡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로 길이 960m, 폭 750m인 직사각형 공간에 수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고, 방의 개수도 약 9000개나 될 정도였다.

자금성은 도시 속에 지어진 하나의 도시로, 면적만 보면 마을 정도의 규모이지만 동서남북으로 설치된 폭 50m의 해자

(성 주위에 둘러 판 못)와 10m 높이의 성벽을 보면, 완벽한 하나의 도시로 보인다.

자금성 건설에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자금성의 건축재료는 여러 곳에서 가져왔는데, 돌은 가까운 팡산 채석장에서, 벽돌은 산둥지방에서 가져왔다.

이 두지역에서 자금성까지는 수십, 수백 km에 불과하지만, 대리석과 나무는 쑤저우와 윈난성 등 2,000km가 넘게 떨어진

곳에서 가져와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자금성의 방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 건설될 당시의 소문을 믿고 있다고 한다.

예를들면 방의 개수가 9,999개라고 믿고 있는데, 실제로 자금성에 있는 방은 모두 8,886개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더

믿고 있다.

자금성은 거대한 건축박물관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박물관이며, 종합 문화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 영락제 때 첫

건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낡아졌지만 청나라 때 고치고 새로 지으면서 명나라 때의 모습을 그대로 만들어 놓았다.

기본구조는 물론이고 자재와 장식 등 모든 것을 명나라 때의 건축을 바탕으로 지었다.

자금성에는 건축물 외에도 천자인 황제가 머물렀던 자금성의 공간들에는 하나같이 깊은 뜻이 숨어있다.

자금성이란 이름은 중국의 천문학(우주관)에서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던 북극성과 관련이 있다.

우주 중심인 북극성을 진한 자주색으로 알고있던 중국의 권력자와 천문학자들이 하늘의 아들인 천자가 머무는 궁궐의 색을

자주색으로 지정한 것이다. 

또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화려한 물품들이 가득해 황제들의 생활모습과 옛 중국의 화려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황제가 국사를 볼 때 사용했던 책상과 의자, 수많은 보석, 서예, 미술품, 공예품은 물론이고 궁궐의 벽과 바닥을 장식한 돌조각

하나까지도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천안문을 지나 자금성으로 들어선다..

 

뒤돌아 본 천안문...

단문(端門)..

단문성루는 명 영락18년(1420년) 오문(午門)과 함께 건설되었고,

천안문과는 건축적으로 거의 동일하며 성루에는 황제의 주요 의장용품을 보관하였다..

 

천안문과 오문사이에 이쓴 단문은 진시황에게서 유래된 것으로 진시황제는 궁성의 대문앞에 또다른 문을 건설하여

궁을 출입하는 이들이 예를 갖추는 곳으로 삼았다.

자금성도 이에 따라 단문을 세웠고 문무백관을 비롯한 모든 사람은 이곳을 통과할 때 의관을 단정히 고쳐 입어야 했으며,

그래서 단문을 예문(禮門)이라고도 불렀다...

 

단문은 정면 9칸으로 성루 돈대(墩臺) 밑에는 출입구인 문동이 5개 있으며,

그중 중앙이 제일 커 황제가 황궁을 출입할 때 사용하는 황제전용 통로이다.

그 좌우는 종실의 왕공과 정3품이상의 관원이, 바깥쪽은 4품이하의 사람들이 출입하였다...

 

명청의 황제들이 순시나 사냥, 제사 등으로 출궁할 때 행렬이 준비되면 단문의 동종(銅鐘)을 울려 황권의 지고무상한 위엄을

알렸다. 황제가 궁을 나설 때에는 예악(禮樂)을 울렸으며, 어도(御道) 양쪽으로 의장행렬이 천안문까지 일직선상으로 도열

하였다고 한다. 황제가 회궁할 때에도 환관과 비빈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가 완료되면 단문의 동종을 울렸다고 한다..

 

오문(午門)..

 

자금성 정문에 해당하는 오문은 명 영락18년(1420년)에 단문과 함께 세워졌으며,

수차례에 걸친 화재로 청 순치4년(1647년) 중건된 이후 가경6년(1801년) 보수하였다.

오문은 동,서,북 삼면의 성대가 서로 연결되어 방형의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오문은 자금성의 정남방향에 있는 남쪽 대문이며, 하부 12m돈대까지 포함하여 총 높이가 37.95m이다.

중앙의 문루는 정면9칸(60.05m), 측면5칸(25m)의 황색 유리기와의 중첨무전정(重檐無殿頂) 건물이다..

 

북쪽 돈대 위 중앙에는 황색 기와 이중처마의 9칸 문루가 있고, 좌우로 종루(鐘樓)와 고루(鼓樓)가 있다.

동,서 돈대 위에는 각 13칸의 긴 건물인 동, 서 안시루(雁翅樓)가 있고, 그 끝에는 이중처마 사각형 누각인 궐정(闕廷)이 있다.

 

자금성에는 남쪽의 오문, 북쪽의 신무문, 동쪽의 동화문, 서쪽의 서화문이 있다.

오문에는 다섯 개의 문동이 있고, 어로문(御路門)으로 불리는 중앙의 문은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으며, 황제 외에는 황후가

시집올 때 한번, 보화전에서 황제의 접전으로 치러지는 전시(殿試)에 1,2,3등 합격자들이 벼슬에 오를 때 한번만 사용이

가능하였다고한다.

좌문인 동문(東門)은 문무대신들이, 우문인 서문(西門)은 종친들이 사용하였다고한다.

곁문인 동,서 액문(掖門)은 평소에는 열지 않고 황제가 태화전에서 중요한 의식을 거행할 때 문무백관들이 이 액문으로 출입

하였다. 황제 외에는 말이나 가마를 타고 오문을 출입할 수 없으므로 걸어서 출입하였다..

 

오문 위에는 5개의 누각이 솟아있어 그 기세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펼친 모양을 닮았다하여

오봉루(五鳳樓)라고도 불렸다.

중앙 성루 양쪽에는 종루와 고루가 있는데, 황제가 천단(天壇), 지단(地壇), 사직단(社稷壇)에 제사를 지내러갈 때 종을

울리고, 태묘(太廟)에 제사를 지내러갈 때는 북을 쳤으며, 나라의 큰 의식을 거행할 때는 종과 북을 동시에 울렸다고 한다...

 

5개의 누각중 중앙에 자리한 누각에는 옥좌(玉座)가 마련되어 있고, 오문 앞 광장은 약 3천평이다.

오문에서는 황제의 참석하에 입춘에는 춘병(春餠), 단오에는 양고(凉糕), 중양절(重陽節 9월9일)에는 화고(花糕)를 하사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또한, 출병과 개선의식, 전쟁포로 접수의식, 조서발표, 반삭전례(頒朔典禮 음력 10월1일에 발표하는 다음해

달력의 공표의식)가 치러졌던 곳이다... 

 

 

 

 

오문의 붉은 대문에는 동정(銅釘)과 도깨비 얼굴 모양의 초도(椒圖)가 장식되어 있다.

초도(椒圖)란 용의 아홉번째 아들을 이르는 말로써 초도는 남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사용된다. 얼굴이 마치 후추나무와 같이 맵고 흉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문은 정면에서 보면 3개 같지만 뒷면에서 보면 동,서 돈대 하부에 곁문인 액문이 있어 5개가 보인다..

 

태화문(太和門)광장..

 

태화문 광장은 동서 200m, 남북 120m 크기로 약 7,900여평 넓이의 광장을 흐르는 금수하(金水河)가 있고,

그 위에 백옥석으로 만든 5개의 금수교가 있다.

광장의 양쪽으로 회랑(回廊)이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는데 동, 서 조방(朝房)이라 부른다.

또한, 협화문(協和門)과 희화문(熙和門)이 동,서로 마주보고 서있다..

 

 

태화문 광장을 가로지르는 너비 5m, 깊이 10m의 금수하(金水河)는 태액지(太液池)의 상류에서 수로를 따라 자금성 해자에

연결되고, 지하수로를 통해 서북쪽 수로로 나와 서쪽 성벽을 따라가다가 오문과 태화문 사이를 지나 지하수로를 따라 자금성

밖으로 나가게 된다. 천안문 앞의 금수하와 구별하기 위해 내금수하(內金水河)라 부르기도 한다..

 

금수하는 자금성을 세울 때 물을 배수하고 화재진압에 필요한 물을 공급받기 위하여 필요하였으며,

용(황제)은 물이 있어야 힘을 쓴다는 전설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금수교는 금수하를 가로지르는 5개의 백옥석 다리로써 유교의 다섯가지 덕목인 온화, 양순, 공손, 검소, 겸양이나

오행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상징한다..

 

금수교를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옥으로 만든 허리띠와 같다고 하여 옥대교(玉帶橋)라고도 한다.

천안문 앞에 있는 다리인 외금수교와 구별하기 위해 내금수교라고 부른다.

이곳 역시 중앙의 다리는 어로교(御路橋)로 황제만이 사용하였다.

폭 6m, 길이 23.5m인 어로교의 난간장식은 용무늬이고 다른 난간은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명대에 태화문에서는 어문청정(御門聽政), 즉 이곳에 옥좌를 설치하여 신하들을 접견하고 주청을 들었으며,

법령을 공포하는 등 정무를 처리하기도 하였다.

청대 초에는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가 후대와 와서 어문청정의 장소를 건청문(乾淸門)으로 바꾸었다.

청 순치1년(1643년) 이곳에서 대사면령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자금성의 외조..

3대전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과 그 좌우에서 3대전을 보필하고 있는 무영전(武英殿)과 문화전(文華殿)을 일컫어

외조(外朝)라고 하였는데, 이 구역에서는 주로 국가적인 행사와 의식이 행하여졌다.

태화문(太和門)은 자금성 내 최대의 궁문이며, 외조의 정문이다.

명 영락18년(1420년) 세워졌고, 당시에는 봉천문(奉天門)이었으나, 가정41년(1562년) 황극문(皇極門)으로 개칭하였다가

청 순치2년(1645년)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정면9칸, 측면3칸, 2중 구조의 팔작지붕으로 대리석 기초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좌우로 동쪽에 소덕문(昭德門), 서쪽에 정도문(貞度門)이 있다.

광서14년(1888년) 정도문 화재시 태화문과 소덕문도 함께 타 다음에 3문이 함께 중건되었다...

 

태화문 내의 동무(東廡)에는 4개의 고방이 있는데, 단고(緞庫 비단을 거두고 보관하는 업무 전담), 갑고(甲庫 투구, 창, 칼,

깃발 등의 기물을 수집, 보관, 보급 전담), 북안고(北鞍庫 황제용 안장, 고삐, 우산, 군막 등을 수집, 보관, 보급 전담),

남안고(南鞍庫 관용 말안장, 고삐, 비옷 등의 물품을 조사 수집, 지급 전담)가 있다.

태화문 내의 서무(西廡)에는 5개의 고방이 있는데, 은고(銀庫 금과 은, 주화제작, 보물, 옥기, 산호, 수석, 옥돌 등의 원석,

호박, 금은제 그릇 등을 수집, 보관), 피고(皮庫 여우, 담비, 원숭이 등의 가죽 및 직물, 비단, 모직물, 융단, 상아, 돗자리 등을

수집, 보관), 자고(瓷庫 금은 및 구리 그릇, 법랑, 사기그릇 등을 수집, 보관), 의고(依庫 푸른 여우털, 붉은 표범, 누런 담비

가죽으로 만든 의복류, 조복, 도포, 예복 등을 조달, 보관, 공급), 차고(茶庫 인삼, 찻잎, 향지, 붉은 갓끈, 안료 등의 물품 조달,

보관)가 있다..

 

좌우의 소덕문(昭德門)과 정도문(貞度門)..

황제를 배알하기 위해 신하들이 반드시 지나가는 문이다.

황궁내의 황제용 기물을 저장하고 있는 여러 고방과 연결되어 있기에 밤낮으로 병사들이 순찰하였다...

 

 

 

 

 

 

 

 

 

 

 

 

 

 

 

 

 

 

 

 

 

 

 

황제의 공식 업무 공간, 태화전(太和殿)..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자금성은 질서정연한 대칭구조로 되어있고, 기능에 따라 크게 외조(와이차오)와 내정(네이팅)으로

나뉘어있다.

외조는 황제가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고, 내정은 황제와 황후, 빈과 상궁들이 사용했던 사적인 공간이다.

자금성의 중심 출입문인 남쪽 오문(우먼)에서 보면 앞쪽에 외조가, 뒤쪽에 해당하는 북쪽에 내정이 자리 잡고 있다.

낮에 일하고 밤에 휴식을 취한다는 전형적인 중국 궁궐 건축양식의 맥을 이은 것이다.

외조는 황제의 공식 집무실인 태화전과 방문객을 만나거나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중화전, 황제의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

이자 연회장이었던 보화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조의 중심은 자금성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태화전이다.

태화전은 황제가 중요한 나랏일을 결정하고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던 장소이다.

황제 즉위식, 탄생 축하행사, 결혼식, 국가의 칙령발표, 외국 사신접대 및 조공 등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주로 이곳에서 열렸고,

군대가 전쟁터에 나갈 때 행사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태화전은 그 자체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길이 64m, 폭 37m, 높이 27m에 달하는 중국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로, 온통 흰 돌로 이루어진 넓은 마당에 세워져 있다.

또한, 황제만 다녔던 길을 따라 폭 3m, 길이 16m에 이르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건물 안과 밖도 용과 봉황, 사자, 기린, 말,

물고기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천하제일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다.

그중 가장 멋진 곳은 황제가 국사를 볼 때 앉았던 옥좌(의자)이다.

금박으로 장식된 7폭짜리 병풍과 의자, 향을 피우던 도자기와 기둥 등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태화전은 여느 건축물과 다르게 3단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3단 기단은 오직 하늘의 아들인 황제가 머무는 곳에만 사용되었다.

기단에 장식된 동물 조각과 문양도 아름답고, 목조건물의 약점인 화재에 대비하여 궁궐 안에 ‘금수하(진쉐이허)’라는 인공하천

(호수)을 만들어 물을 저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황제와 황후의 공간, 내정..

황제와 황후, 빈과 상궁 들이 사용하던 내정은 건청궁(치안칭궁)과 교태전(자오타이뎬), 곤녕궁(쿤닝궁)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정은 이 3개의 건물들 주변에 대칭으로 많은 건물이 세워져 있어, 공적인 공간인 외조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내정의 중심건물은 건청궁으로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 초기까지 황제의 침실이자 휴식공간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건청궁은 청나라 옹정황제가 양심전(양신뎬)이란 곳에 새로운 침실을 마련하고 태화전에 이어 보조 직무실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오직 황제와 황후만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옹정황제 이후부터 건청궁은 황제의 서재이자 고위관리들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고, 때론 외국왕실의 손님을 맞는 곳이자

연회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부 모습이 태화전과 비슷한데, 역시 금박병풍과 옥좌를 비롯하여 천장과

기둥, 여러가지 물건들이 모두 화려하다.

건청궁 옥좌 뒤에는 ‘正大光明’이란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는데, 이 액자는 초기 청나라 황제였던 순치 황제가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정대광명’은 바른 것을 밝힌다는 뜻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기본 원리가 바른 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건물 입구에 걸려 있는 ‘건청궁(乾淸宮)’이란 현판도 순치황제가 직접 쓴 것으로 한자와 만주어가 함께 쓰여 있어 황실의

주인이 만주족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시였다고한다.

건청궁 뒤쪽에 있는 교태전은 명나라 초기에 황후가 살던 곳이자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소였다.

건륭황제 때는 황제의 직무실로 사용했고, 이후에는 나라의 옥새를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교태전 역시 무척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데, 옥좌 뒤에는 커다란 병풍과 건륭황제가 강희황제를 공경하여 직접 썼다는

‘무위(無爲)’라는 액자가 걸려있다. 그리고 교태전 뒤쪽에는 황후가 사용했던 곤녕궁이 있다..

 

중화전(中和殿)..

베이징 고궁 자금성에서 국가적인 행사와 의식을 치렀던 공간인 외조(外朝)에 있는 건물로, 태화전, 보화전과 함께

삼대전(三大殿) 중 태화전 바로 뒤에 있는 폭 28m의 정방형 건물이다.

외조의 건축물 중 역할이 가장 미미했던 전각으로 태화전에서 치러지는 국가 주요 행사에 참가하기 전 황제가 휴식을 취하거나

천단(天坛), 지단(地坛), 선농단으로 제사를 떠나기 전에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농기구를 살피는 일 등을 하던 곳이었다.

청 말기 제11대 황제 광서제는 1898년 강유위(康有爲)ㆍ양계초(梁啟超) 등의 주도하에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본받아

변법자강책을 받아들여 무술(戊戌) 변법을 시작하였으나 보수적인 관료들이 반발과 최고사령관이었던 영록(榮禄)의 도움을

받은 서태후(西太后)가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와 광서제를 이곳에 유폐하고 다시 섭정을 시작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 건물이

유명하게 되었다..

 

 

 

 

보화전(保和殿)..

쯔진청(紫禁城)에서 국가적인 행사와 의식이 치러졌던 공간인 외조(外朝)에 있는 건물로,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과

함께 삼대전(三大殿) 중의 하나로 영락 18년(1420) 완공된 높이 약 30m, 폭 약 50m의 규모의 전각이다..

보화(保和)라는 용어는 역경에서 나온 말로 우주간 만물의 화목을 유지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보화전은 완공 후 몇 차례의 화재로 인한 소실이 있었고 명초에는 근신전(谨身殿), 명 가정 41년(1562) 건극전(建极殿)으로

바뀌었다 청나라 순치 2년(1645) 현재의 명칭인 보화전으로 개칭되었다..

 

보화전의 면적은 폭이 9칸, 깊이가 4칸으로 면적은 1,240㎡이며 전각 내 특수 기법을 활용하여 전면의 기둥을 없앰으로써

넓은 내부공간의 확보가 가능케 하였다. 전각 내 중앙에 보좌(宝座)가 있으며 보좌 위쪽 건륭제가 군왕으로써 천하의 최고

준칙을 세운다는 의미의 ‘황건유극(皇建有极)’이라고 히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명대에는 국가적 행사 전에 황제가 항상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었으며, 청대에는 매년 마지막 날인 제석(除夕)이나 정월 15일

황제가 이곳에서 소수민족의 왕이나 대신에게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청초 후삼궁(后三宫)이 수리되기 전 순치제, 강희제는 이곳에서 거주하였으며, 순치제의 결혼식도 이곳에서 진행되었으나

건륭 54년(1789년) 이후 전시(殿试)의 고정 장소가 되었다. 뒤편에는 용이 여의주를 쫒아 구름사이로 승천하는 모양을

정교하게 새긴 길이17m, 폭3m, 무게250톤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이 있다..

 

 

 

 

 

 

 

 

 

 

 

 

 

 

 

답도(踏道)..

밟는 길이란 뜻이지만 실제로 이길을 밟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마를 탄 황제가 그 위로 지나가는 길이다..

 

 

 

건청궁(乾清宫 , Palace of Heavenly Purity)..

자금성에서 황제가 정무 이외에 황후나 궁녀들과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개인적인 공간인 내정(內廷)의 후삼궁(后三宫 : 乾清宫,

交泰殿, 坤宁宫) 중의 하나인 정전(正殿)으로 명 영락(永乐) 18년(1420년) 완공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청 가경(嘉庆) 3년(1798)에 중건된 것이다.

대청 보좌 위쪽으로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고 쓰인 편액이 있으며, 편액 뒤편으로 다음 황제를 지명하는 전위조서

(传位诏书)가 감추어져 있었다.

건청궁의 대청 규모는 넓이가 9칸, 폭이 5칸, 높이가 20m로 그리 작지 않으나 인체 크기에 비례하도록 척도를 조정하여 건축

함으로써 생활하기에 좋은 분위기로 명대에 황제와 황후의 침궁(寝宫)으로 활용되어 황후도 같이 거주하였다.

또한 명대 건청궁은 상하 2개 층으로 나누어진 접견실 9칸이 있어 황후나 비빈들이 사용하였고 매일 밤 황제의 침소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비록 황제의 거처가 미로식 궁전 내에 있고 경비가 삼엄하지만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가정(嘉靖) 연간에 궁녀들이 가정제를 살해하려다 실패했던 사건인 임인궁변(壬寅宫变) 이후 가정제는 서원

(西苑)으로 거처를 옮기고 다시는 건청궁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하였으며, 만력(万历) 48년(1620년) 8월 정귀비(郑贵妃)

가 광종(光宗)의 약에 독을 타 즉위 29일 만에 사망케 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홍환안(红丸案), 태창제(泰昌帝의) 비 이선시

(李选侍)를 인수전(仁寿殿)으로 쫒아낸 사건인 이궁안(移宫案) 등이 모두 건청궁에서 발생하였다.

청대에 들어서는 건청궁을 중수하고 옹정제는 즉위 후 침소를 양심전(养心殿)으로 옮김으로써 건청궁은 내정의 전례(典礼)

활동과 관원 및 외국사신 접견장소로 활용되어 광서 32년(1906년) 광서제는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 양국 사신을

접견한 바 있다.

또한 건청궁은 청 황제의 사후 시신을 안치하던 곳으로 순치제는 양심전, 강희제는 창춘원(畅春园), 옹정제는 원명원(圆明园),

함풍제는 피서산장(避暑山庄)에서 사망하였으나 시신은 모두 이곳에 안치하고 장례의식을 거행한 후 경산(景山) 내의 관덕전

(观德殿)으로 옮겼다가 마지막으로 황릉에 장사지냈다.

건청궁과 곤녕궁(坤宁宫)은 황제와 황후의 침궁(寝宫)으로 구별되는 데 주역(周易)에 따르면 건(乾)은 천(天)을, 곤(坤)은

지(地)를 상징하여 건청궁 앞에는 좌우양쪽으로 일정문(日精门), 월화문(月华门)이 있다.

대에는 2차에 걸친 황제의 천수연(千叟宴)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는데 1차 강희 61년(1722)과 2차 건륭 50년(1785)으로

두 번째의 규모가 성대하여 3,000여 60세 이상의 대신, 관리, 군사, 일반백성 및 장인 등의 노인들이 건륭제의 75세 연회에

참가하였으며, 연회시 건륭제는 일품대신(一品大臣)과 90세 이상의 노인을 황제 앞으로 불러 술을 하사하고 각각에 과장

(拐杖 : 지팡이) 및 기타 선물을 나누어 주었으며 연회 중 참가자들이 3,400여 수의 시를 지어 바쳤던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