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경 4박5일, 제2일 - 2. 명나라 만력제와 그 황후가 묻혀있는 정릉(定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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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중국

중국 북경 4박5일, 제2일 - 2. 명나라 만력제와 그 황후가 묻혀있는 정릉(定陵)..

by 정산 돌구름 2013. 4. 11.

중국 북경 4박5일, 제2일 - 2. 명나라 만력제와 그 황후가 묻혀있는 정릉(定陵)..

 

 

2일차(4월 6일, 토) : 만리장성~명13릉(정릉)~올림픽주경기장~더플레이스~전신맛사지

  06:30 기상후  / 06:40 호텔 조식 / 07:30 호텔 출발 / 09:20 만리장성 도착 / 만리장성 관광 / 12:30 출발

  13:05~14:00 점심식사(현지식) / 14:45 명13릉(정릉)도착 후 관광 / 16:05 정릉 출발 / 17:45 올림픽 주경기장

  18:10~18:45 저녁식사(태가촌) / 19:20~20:40 전신맛사지 / 21:15 더플레이스 / 21:35 호텔 투숙 
 

여행개요

 1) 샹그리라호텔

   아침 6시30분 기상하여 7시에 1층 뷔페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2) 만리장성 관광

   7시30분, 호텔을 출발하여 만리장성 케이블카 승강장에 도착한다.(09:20)

   만리장성은 세계 7대 건축물, 8대 불가사의로 꼽히며, 달에서도 보인다고 하는 인류 최대의 문화유산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곳이다. 마치 용이 춤추는 듯한 만리장성은 보는 각도에 따라 색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한사람이 길을 잃어 예정시간보다 1시간여 소요되어 중국장성박물관 외관을 둘러보았다.

 3) 점심식사

   12시30분, 만리장성 관광을 마치고 13시5분 현지식으로 늦은 점심식사를 한다.

 4) 명13릉(정릉) 관광

   14시에 식당을 출발하여 14시45분, 명13릉의 하나인 정릉에 도착한다.

   명13릉의 하나인 정릉을 발굴, 지하궁전을 발견하였는데 관곽외에 금,은,진주,보석,복식,옥기 등 보물 3,000여점의 보물이

   출토되어 정릉의 비밀이 밝혀졌다.

   1959년10월에 정릉박물관이 설립되었고, 이때부터 명13릉은 북경지역의 유명한 관광명소로 되었다.

 5) 올림픽 주경기장 외관 관광

   16시5분, 정릉을 출발하여 17시45분, 올림픽 주경기장에 도착하여 경기장 외관을 둘러본다.

   나뭇가지를 얽어 만든 새둥지와 같다고하여 냐오차오라고 불리는 북경 2008 올림픽 주경기장이다.

 6) 석식 후 전신맛사지

   18시10분, 경기장 건너편에 있는 태가촌에서 현지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차로 이동하여 19시20분, 전신맛사지를 받는다.

 7) 더플레이스(The Place, 世貿天階) 관광

   전신맛사지를 마치고 21시15분, 더플레이스에서 잠시 야경을 보고 호텔로 출발한다.

   더플레이스(The Place)는 사무공간과 고급브랜드 상점들이 즐비한 쇼핑광장이다.

   여수Expo도 이곳을 참조하여 설치하였다고 한다.

 8) 샹그리라호텔 투숙

   21시35분, 호텔에 들어와 저녁에 가족들과 함께 술 한 잔하고 잠자리에 든다..

 

 

명13릉(明十三陵)은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를 비롯하여 숭정제까지 총 16명의 황제 중, 명 십삼릉에 묻힌 황제는 13명이다.

홍무제는 난징에 있는 효릉(孝陵)에 묻혔고, 2대 건문제는 정난의 변으로 생사가 불가능한 채로 실종되었다.

7경태제는 탈문의 변으로 퇴위하여 사후 베이징 서교 금산에 묻혔지만 명 십삼릉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3명의 황제를 제외한 16명의 황제와 각각의 황후들이 묻혀있다.

또한 황제로 추존 된 흥종(興宗)과 예종(睿宗)의 묘 또한 명 십삼릉에 포함되지 않는다.

 

장릉(長陵)은 3대 성조 영락제(成祖 永樂帝 1402~1424)와 인효문황후 서씨(仁孝文皇后 徐氏),

헌릉(獻陵)은 4대 인종 홍희제(洪熙帝 1424∼1425)와 성효소황후 장씨(誠孝昭皇后 張氏),

경릉(景陵)은 5대 선종 선덕제(宣德帝 1425~1435)효공장황후 손씨(孝恭章皇后 孫氏),

유릉(裕陵)은 6대와 7대를 지낸 영종 정통제(正統帝 1435~1449), 천순제(天順帝 1457~1464)효장예황후 전씨

                  (孝莊睿皇后 錢氏), 효숙황태후 주씨(孝肅皇太后 周氏),

무릉(茂陵)은 8대 헌종 성화제(成化帝 1464~1487)효정순황후 왕씨(孝貞純皇后 王氏), 효목황후 기씨(孝穆皇后 紀氏),

                  효혜황후 소씨(孝惠皇后 邵氏),

태릉(泰陵)은 9대 효종 홍치제(弘治帝 1487~1504) 효성경황후 장씨(孝成敬皇后 張氏),

강릉(康陵)은 10대 무종 정덕제(正德帝 1506~1521)효정의황후 하씨 (孝靜毅皇后 夏氏),

영릉(永陵)은 11대 세종 가정제(嘉靖帝 1521~1566)효결숙황후 진씨(孝潔肅皇后 陳氏), 효열황후 방씨(孝烈皇后 方氏),

                  효각황태후 두씨(孝恪皇太后 杜氏),

소릉(昭陵)은 12대 목종 융경제(隆慶帝 1566~1572)효의장황후 이씨(孝懿莊皇后 李氏), 효안황후 진씨(孝安皇后 陳氏),

                  효정황태후 이씨(孝定皇太后 李氏),

정릉(定陵)은 13대 신종 만력제(神宗 萬曆帝 1572~1620)와 효단현황후 왕씨(孝端顯皇后 王氏),

                  효정황태후 왕씨(孝靖皇太后 李氏),

경릉(慶陵)은 14대 광종 태창제(泰昌帝 1620)효원정황후 곽씨(孝元貞皇后 郭氏), 효화황태후 왕씨(孝和貞皇后 王氏),

                  효순황태후 유씨(孝純皇太后 劉氏),

덕릉(德陵)은 15대 희종 천계제(喜宗 天啓帝 1620~1627)효애철황후 장씨(孝哀哲皇后 張氏),

사릉(思陵)은 16대 의종 숭정제(崇禎帝 1627∼1644)효절열황후주씨(孝節烈皇后 周氏), 공숙황귀비전씨(恭淑皇貴妃 田氏)

 

중국 북경 북쪽 약 40km 지점에 있는 창평구(昌平縣) 천수산 아래에 조성된 명(明)나라 때 13제(帝)의 능묘군이다.

그밖에 황후 23명, 태자 2명, 소실 30명 등의 묘가 있다.

영락제 이후의 황제 13대의 능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통칭되고 있다.

이 중 정릉은 발굴되어 내부 지하궁전도 공개되고, 명십삼릉은 난징의 명효릉과 함께 200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명조 개국 황제 주원장(朱元璋)은 도읍을 난징(南京)에 건설했는데, 그의 사후에 난징의 자금산(紫金山)에 있는 명효릉

(明孝陵)주원장과 황후 마씨(马氏)의 합장릉묘로 장사를 치렀다.

주원장의 장손자인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은 연왕 주체에게 정난지변을 통해 왕위를 찬탈당했기 때문에 능묘가 없다.

대종 경태제 주기옥도 황제였으나 폐위되어 정식 황제로 인정되지 않고 경태릉(景泰陵)으로 불렸으며, 현재 베이징 근처에

묻혀 있다.

중국의 주요 문화보호지역으로 지정돼 개방하는 곳은 명나라 3대 황제와 황후를 합장한 장릉(長陵),

13대 황제와 2명의 황후가 함께 묻힌 정릉(定陵), 그리고 목종 융경제의 소릉(昭陵) 뿐이다.

가장 규모가 큰 능은 장릉으로, 남쪽 끝의 백석패방(白石牌坊)에서 능문(陵門)까지 7km에 이르는 길에는 거대한 석인(石人)과

석수(石獸)가 서 있다.

장릉발굴의 예비조사로서 정릉이 1956~1958년에 발굴되었으며, 땅속 깊숙이 전전(前殿)·중전·좌우배전(左右配殿)이 있고,

후전(後殿)에는 황제·황후의 관(棺)이 놓여 있었다.

출토된 호화로운 금은 그릇 등의 부장품은 앞뜰의 전시실에 전시되고, 지하묘실은 정릉박물관으로서 공개되고 있다.

만력제(萬曆帝, 1563.9.4~1620.8.8)는 명나라의 제13대 황제이다.

휘는 익균(翊鈞), 묘호는 신종(神宗)으로 융경제의 3남으로, 1572년부터 1620년까지 48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역대 명 황제들의 통치기간 중 가장 길며, 명나라가 건국된 지 200년쯤 지나고 왕조가 서서히 몰락해가는 시기였다.

유왕 주재후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큰형과 둘째 형이 모두 죽자 유왕세자(裕王世子)에 봉해졌다.

1567년 아버지가 황위에 오르자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1572년에는 10살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만력제는 정치를 잘 알지 못했던 등극 초기에는 모든 일을 재상 장거정(張居正)에게 맡겼다.

오랫동안 그의 스승이었던 인연 때문이었으며, 장거정의 교육 방식은 너무 엄격해 어린 만력제의 숨통을 조이기 일쑤였다.

공론을 줄이고 명실상부, 기강 확립, 명령 복종, 군비 확충 등을 중시한 그는 ‘철혈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심없이,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국사를 처리했으며 개혁에도 열심이었다.

덕분에 명나라는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지만 만력제가 제위에 오른 지 10년째 되던 해 장거정이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기를 펴지 못했던 반대파들은 입을 모아 장거정의 비리를 들추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거정을 편들었던 만력제도 그의 재산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장거정의 가산을 몰수했다.

1584년, 장거정비리사건 이후 정치판에 관한 환멸을 느낀 것인지, 30년간 여러가지 구실로 업무를 거부, 나라가 깊은 수렁에

빠져갔다

그는 나라에 아무리 위급한 일이 생겨도 동전 한 닢 내놓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갔다.

반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여 황제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늘어 갔으나 국고는 점점 줄어들었다.

황제가 돈을 밝히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치부에만 열성을 보였으며, 거기다 술과 여자까지 밝혔다.

만력제가 죽은 뒤로 3명의 황제가 대를 이었으나 이미 만력제 때 뒤숭숭해진 민심은 이자성의 난을 불러왔고,

그가 죽은 지 24년째 되던 해 명나라는 멸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고 썼다.

평판이 매우 좋지 못한 군주이지만 임진왜란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매우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친 편이다.

물론 현명하다고 할 수 없는 어리석은 패착의 연속이긴 했지만 그 적극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당대와 후대 중국인들에게서는 만력제를 가리켜 ‘고려의 천자’ 또는 ‘조선의 황제’라고 일컫기까지 했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대한 호감이 생겨난 배경도 이때 만력제가 보여준 적극적인 우호정책 탓이 매우 크다.

그런 영향으로 조선에서는 송시열이 제자인 권상하에게 만력제와 숭정제의 제사를 지낼 사당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만동묘(萬東廟)이다. 만동묘는 도산서원과 함께 조선의 4대 서원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지시할 때 헐려버리고 지금은 묘정비만 존재하고 있다..

 

 

 

 

 

 

 

 

 

 

 

 

황제가 걸었던 길...

 

 

능은전(裬恩殿) 유지.. 능은전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정릉의 명루.. 

 

 

 

스우궁(Shi wu gong, 石五供)..

밍러우바오딩(明楼宝顶) 전면에 위치하며, 황제, 황태후, 황후와 비빈, 공주 등의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다.

세 종류의 다섯가지 물건을 올린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상·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아랫부분은 공석(供席)으로서, 두개의 커다란 돌이 불좌를 이루고 있다.

제단 위에는 향로 하나가 있고, 양쪽 끝에 화병이 하나씩 놓여 있다..

 

명루 옆으로 올라가면 1956년 5월, 발굴 당시 최초로 작업이 진행되었던 출구...

황릉의 외곽성벽이 일부가 무너지면서 수도문(隧道門)이라고 씌어진 비석이 발견되어 파 들어가자

“이 돌에서 금강장까지 전방 16장(53m), 깊이 3장5척(11.5m) 아래(此石至金剛墻前皮十六丈深三丈五尺)”라는 비석이 또 발굴되어

이를 따라 지하궁전의 입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황릉 위에 복토를 하고 그 위에 나무로 은폐를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인 사슴뿔 모양의 녹각백(鹿角柏)의 모습이다...

   

 

현궁(玄宮)..

궁궐 중에서 북쪽에 위치해 있는 궁으로 과거의 궁궐 구조는 북쪽에 임금의 침소와 왕비의 거처가 있었다..

현궁은 임금이 휴식을 취하면서 깊은 생각을 하는 휴식처, 또는 맨 북쪽의 왕비가 거처하는 장소를 지칭하기도 한다..

또, 임금의 관을 묻은 광중(壙中)으로 현궁은 죽은 임금이 거처하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녹각백(鹿角柏)을 지나 명루에 서면 27m 깊이의 지하궁전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일설에 의하면 만력제는 자신의 능의 소재를 비밀로 유지하기 위해 작업에 동원된 사람들을 모두 살해했다고 한다.

발굴 당시, 암호 같은 비석의 내용을 해독하여 황릉의 입구를 찾아냈지만 대리석 문이 안에서 잠겨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괴정약시(拐釘鑰匙 방향을 바꾸는 열쇠)로 힘들게 문을 열었을 때 밀폐보관되어 있던 유골과 많은 소장품들이 파손되거나 증발했다고..

지상 박물관에는 발굴 과정과 발굴 직후 황릉 내부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지하궁전에서 나온 3000여 부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출토된 부장품 중 황제와 황후의 면관(冕冠), 오사익선관, 금관, 봉관 등은 처음 발굴된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지하궁전은 길이 87m, 최대폭 47m로 전전(前殿), 중전(中殿), 좌배전(左配殿), 우배전(右配殿),

후전(後殿)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전의 황제와 황후의 보좌에는 용과 봉황이 각각 조각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영원의 불’을 지피던 기름항아리가 놓여있다.

좌·우배전은 만력제의 황후와 비가 있던 곳이고 후전은 시신과 부장품이 놓여 있던 곳이다...

 

 

좌우배전과 후전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발굴됐으며,

지금은 새로 만들어진 황제와 황후 비의 관만 소장품 상자와 함께 빈 채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신종 만력제 능비..

 

 

만력제의 정릉은 결국 살아서는 자신의 궁전으로, 죽어서는 자신의 무덤으로 사용되어 그의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공간이다..

 

 

 

 

 

 

 

명13릉 중에서도 정릉은 이자성의 난 때 농민군의 공격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라고 한다.

능문, 능은문은 중일전쟁 때 파괴됐고, 1586년 건립된 능은전은 1644년 이자성의 농민군에 의해 소각됐다가

건륭제 때(1785~1787년)에 축소 개축되었으나 1913년에 발생한 화재로 다시 소실됐다.

그 때의 흔적인지 남아 있는 명루의 축대도 검게 그을린 것처럼 변색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