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기행] 태산선비문화권의 시산사, 송정, 영모당, 송산사, 필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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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기행] 태산선비문화권의 시산사, 송정, 영모당, 송산사, 필양사

by 정산 돌구름 2012. 10. 3.
[정읍기행] 태산선비문화권의 시산사, 송정, 영모당, 송산사, 필양사..

 

탐방일 : 2012년 10월 1일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시산사(詩山祠) 소개

  1906년(光10年) 무성 창의(武城 倡義)의 맹주(盟主)인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을 추모하여 1907년 태산사(台山祠  七寶國民學校)를

  세웠는데 왜정(倭政)의 탄압으로 헐리우고 1975년 다시 시산사(詩山祠)를 세우고 최면암과 국헌 김기술(菊軒 金箕述), 화개헌 김직술

  (和介軒 金直述)을 추배(追配)하였다.
  최익현(1832∼1906)은 관 경주(慶州), 자 찬겸(讚謙), 호 면암(勉庵)이다. 이항노(李恒老)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판서에

  이르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항소하다가 제주도로 귀양가기도 했다.

  을사조약 후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하여 순창에서 체포되어 대마도로 잡혀가 단식한 끝에 순절했다.

  김기술(1849∼1929)은 관 도강(道康), 자 정범(正範), 호 국헌(菊軒)이다. 고현내에서 출생하여 최면암의 문인으로 무성 창의에 참가했다.

  김직술(金直述)은 호 화개헌(和介軒), 관 도강(道康), 최익현의 창의에 적극 참여하여 재정을 담당하여 정읍, 순창, 임실 등지로 다니면서

  모금(募金)하여 뒷받침을 다했고 그 뒤에 연화동(蓮花洞) 제각(齊閣)에서 후배 양성에 온 힘을 다했다.

 

 

 

 

 

 

 

 

 

 

송산사(松山祠)

  1788년(正祖 12年) 창건하여 김대립(金大立), 김응빈(金應贇), 김정(金濎), 김감(金堪), 김급(金汲), 송치중(宋致中)을 향사(享祠)하였는데

  1868년(高宗 5年 戊辰)에 정부의 영에 의하여 헐렸다가 1954년 송산(松山, 詩山里)에서 성황산(城隍山) 동편에 중건하였다.
  김대립(金大立)은 관 도강(道康), 자 신부(信夫), 호 월봉 또는 쌍백당(月峰 雙柏堂) 김관(金灌)의 아버지다. 일찍 이일제의 문인으로

  덕행이 있어 사포서 별제(別提)를 제수받았다. 그리고 향리 성황산 동쪽에 호호정(浩浩亭)을 세워 문우(文友)들과 학문을 강론하는데

  때마침 정여립이 그 근처에 정자를 지었기 때문에 호호정을 헐어 버렸다. 임진란때 김복억, 김후진 등과 창의하였으며 광해군 폭정에

  출세를 단념하고 종제(從弟) 김응빈과 결사회적(結社晦跡)하니 이른바 7광(七狂)중 한분이다.

  김응빈(金應贇 1553∼1632)은 자 겸언(兼彦), 호(號) 오무재(悟無齋) 또는 월림(悟無齊, 月林), 관 도강(道康)이다. 복억(福億)의 둘째 아들,

  김약묵의 손(孫)이다. 제용감(濟用監) 봉사를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고 광해폭정에는 종형 김대립과 같이 결사회적(結社晦跡)했다.

  김정(金濎 1587∼1632)은 자 여심(如尋), 호 췌세(贅世), 관 도강(道康) 판관(判官) 김응길(金應吉)의 큰 아들이다. 어려서는 삼종숙인

  김대립의 문하에 있었으나 뒤에 김장생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에 정진하여 후진교육에 힘썼다.

  친상에 시묘하였고 광해군 폐모에 항소하였으나 뜻을 못이루고 결사회적인 7광중의 한사람이다. 조봉대부 동몽교관,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

  김감(金堪)은 호 부휴재(浮休齋), 관 안동(安東), 벼슬이 세마(洗馬)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폐모에 이상향(李尙嚮), 김정(金濎)과 더불어

  항소하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와서 결사회적하였다.

  김급(金汲 1591∼1643)은 관 도강(道康), 자 군인(君引), 호 만오재(晩悟齋), 1591년8월15일 태인에서 출생 일찍이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벼슬이 선교랑 사포서 별제에 올랐으나 광해난정때 큰형 김정과 항소하다 여의치 못하여 송정에 회적하고 세칭 7광이 되었다.

  1643년(仁祖 21年) 5월 21일에 돌아가다.

  송치중(宋致中)은 관 여산(礪山), 호 호암(壺菴), 태학관에 있을 때 광해난정이 나자 이상향(李尙響), 김정(金濎)과 항소하고 마침내

  태학관을 퇴학한 후 송정(松亭)의 7광이 되었다. 뒤에 인조반정에서 벼슬이 첨정(僉正)에 이르고 고을의 수령(首領)을 지내기도 했다.

 

 

 

 

 

 

 

송정(松亭)

1990년6월30일 전북도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광해군 때 폐모사건(廢母事件)에 항소한 세속 7광(七狂) 10현(賢)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곳에 모여 음풍영월(吟風詠月)하며

어지러운 세상에 벼슬을 버리고 세월을 보내던 곳이라 한다.

이들 후손들이 영당(影堂)을 세우고 7광도(七狂圖)와 10현도(十賢圖)를 봉안하고 조상의 높은 기상과 우국(憂國)의 뜻을 기리며

춘.추(春秋) 중정(中丁)에 제사(祭祀)를 지낸다.
7광(七狂)이라 함은 월봉(月峰) 김대립(金大立), 오무재(悟無齋) 김응빈(金應賓), 부휴제(浮休齊) 김 감(金 堪), 호암(壺巖) 송치중(宋致中),

난곡(蘭谷) 송민고(宋民古), 천묵(天默) 이상형(李尙馨), 관산(觀山) 이탁(李倬)을 칭하며 그들을 기린다.
10현(賢)이라 함은 칠광 가운데 김응빈, 김 감, 송치중, 송민고, 이탁 외에 명천(鳴川) 김관(金灌) 췌세(贅世), 김정(金濎) 만오재(晩悟齋)

김급(金汲), 월오(月悟) 김우직(金友直), 월담(月潭) 양몽우(梁夢禹)를 가리킨다.
송정(松亭)은 무성리(武城里) 성황산(城隍山) 동쪽에 있으며, 광해(光海) 때 세칭 7광(七狂)과 10현(賢)이 모여서 놀던 곳이다.

영모당(永慕堂)은 일명 송정 영당이라고도 하며 송정십현도가 모셔져 있다. 1898년 건립되었다.

송정중수기... 태산은 산과 물이 좋은 곳이다. 칠보산이 둘러있고 오계천이 돌아 흐르는 곳에 정자가 있으니 그 이름이 송정이다.
옛 신유년에 호남의 10현이 있었으니 조정이 혼탁하고 윤기가 문란하니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강령(三綱五倫)을 일으킬 뜻을

갖고 서로 마음을 같 이하여 시를 읊고 강론을 통하며 함께 계를 조직하여 그림을 그려 세상에 전하니 이를 십현이라한다.
정자 이름을 송정이라 함은 솔의 절개를 비유함이다. 십현의 사적은 옛날 사람이 기록하여 알 수 있지만, 정자의 건축이 그 당시였는지

그 뒷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터를 정하고 자손이 그림을 모앙하다가 순조 때 계유년의 계문서를 보면 선인들이 남긴

글에 갑신년에 정자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45년 무진년에 우리 선조 도정공이 일곱집의 힘을 합하여 중수하니 3칸의 집에 8칸

마루가 지어졌다. 기해년에 집안 할아버지 춘우정 선생과 백부 화계헌공이 그림이 없어질까 걱정하고 자기 집에 모시면서 여러 사람과

의논하고 협력을 얻어 정자 위에 한 칸을 더 세우고 그림을 모시었다.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 문과 담을 쌓았다. 나의 아우 환상이 유사로

김환진 송영조 두 사람과 상의하여 중문과 축대와 정문길과 담장, 그리고 집처마를 고치고 주위에 화초 나무를 심고 돌을 쌓고 흙을 돋아

경치가 새로워졌다. 병인년에 여러 사람이 나에게 청하였다. 강령과 윤기가 퇴폐함이 오늘과 같이 심한바가 없어 우리 동지들은 도덕을

닦고 우의를 더하여 선조들의 선덕을 더 빛나게 함이 이 정자가 오래가고 더욱 새로워질 것이다.  무진 7월에 십대손 김환풍 근기
송정중수기.. 광해 임금때 왕권이 해이되어 인권이 박탈되면서 장안의 변란이 극도에 이르니 명망있는 사람과 충절하는 선비가 모두들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숨게 되었다. 태산(지금의 七寶)의 송정(松亭)의 여러 선비들이 그러했다. 그 이름과 이력이 자상하게 마을 입구

비에 기록되어 있다. 앞의 7광은 스스로 칭한 것인데 뒤에 이른 10명은 후세 사람들이 십현이라 말했다. 모든 어진 사람은 태어나고 사는

것은 다르나 그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기강을 세운 것은 같은 바이다. 그 중에 육율과 달음의 고절로 화창함도 같다. 이 정자가 여러번

황폐 하였으나 지난 무술년에 두 칸을 수리하고 그림을 잘 모시고 계축년에는 문과 벽을 수선하여 겨울에도 거처하게 되었다.

이 일에는 송병권, 김직술, 김방훈 여러분과 우리 아저씨 평 술씨가 힘썼으니, 이는 중일단사(中一端事)를 이음이다. 저 무성한 수십그루

소나무의 맑은 바람소리는 그 절개를 자랑하면서 그때 그분들의 주위를 돌면서 손으로 어루만지는 현상이 상연하다. 지금 풍속이 퇴폐

하고 강상(三綱五倫)이 땅에 떨어져 세상의 환란이 옛날보다 천백곱이 되니 여러 어진이가 지금 있어라도 어찌할 것인. 자손된 사람

으로 휴식하며 모 양할 따름이다. 송영조와 친구 김환각이 말하기를 이 정자가 세운 지 오래되어 삼백년이 넘 었으니 자손들은 감회를

가지고 있으며 그 마음으로 술 마시고 함께 시를 지어 뒷날의 자료 로 아니 할까. 나도 그리할 것이다. 중수유사 김영돈, 김환종, 송영조.

 

 

 

 

 

 

 

 

 

 

 

 

 

 

 

필양사(泌陽祠)

1910년 일본 황제(日皇)의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하고 그것 때문에 군산 감옥(群山監獄)에서 순절한 춘우정 김영상(春雨亭 金永相)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기 위하여 1945년 김환풍(金煥豊) 안항섭(安恒燮) 등이 유림(儒林)의 발의로 창건하여 향사(享祠)하였다.

김영상은 도강인(道康人) 자(字)는 승여(昇如) 호(號)는 춘우정(春雨亭)이니 1836년(憲宗 2年 丙申) 3월 고부군 수금면 산북리(지금 정읍 

정우면)에서 출생하여 1851년(철종 2년)에 칠보면 무성리의 옛집으로 이사했다.

김경흠의 아들로 소휘면(蘇煇冕)의 문하에서 수학을 했고 당대의 거유(巨儒) 기정진(奇正鎭), 전간제 송병준(宋秉濬)과도 교유했다.

최익현의 창의에 참여했고 한일합병후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한 것이 화가 되어 군사감옥으로 호송하던 중 사창진에서 의대(衣帶)에

절명사(絶命詞)를 써서 전하고 몸을 강물에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단식하고 순절하였다.

1978년6월30일 지방인사들의 발의로 창사진 나루터인 김제군 청하면 동지산리에 춘우정 투수 순절 추모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