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2년 10월 1일
○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 무성서원 소개
통일신라 말 학자였던 최치원(崔致遠)이 태산군수로 군민의 칭송을 받다가 합천군수로 떠나게 되니 지방 유림의 공의로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생사당(生祠堂 생존해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창건하여 태산사(泰山祠)라 부른 것이 시초였다.
고려 말에 쇠약해졌다가 성종14년(1483년)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그뒤 신잠(申潛)이 태인현감으로 부임, 7년동안 선정을 베풀다 강원도 간성군수로 이임하니 명종4년(1549년) 생사당을 짓고 태산사에
배향하였으며, 인조8년(1630년) 정극인·안세림(安世琳)·정언충(鄭彦忠)·김약묵(金若默), 숙종1년(1675년) 김관(金灌)을 추가 배향하였다.
숙종22년(1696년)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병합한 뒤 ‘무성(武城)’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개편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 서원은 고종5년(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그 뒤 계속적인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우(祠宇)·현가루(絃歌樓)·명륜당·장수재·흥학재·고사 등이 있다.
사우에는 최치원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신잠·정극인·안세림·정언충·김약묵·김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사우는 1884년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과 측면 3칸에 홑처마 맞배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현가루는 중층 팔작기와집으로 되어 있으며, 1층 바닥은 흙으로, 2층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28년(순조 28)에 중건하였다.
정면 5칸과 측면 3칸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기와이다.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의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인 각 4칸의 장수재와 흥학재는
숙종 때 건립되었다가 그 뒤 중수한 것으로, 유생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매년 2월 중정(中丁)과 8월 중정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 <기범연의 기범연의(箕範衍義)> 1책 등 40여 종의 전적이 있다. 이 서원은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어 있다.
홍살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현가루...
중층 팔작기와집이며, 1층 바닥은 흙으로, 2층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강수재...
그 앞으로 두개의 비각..
진사 최영대 영세불망비...
최영대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영솔장으로 활약했던 최경선장군의 친형으로 동생이 죽자 그 시신을 거두어 고부에 안치했다고 한다.
그 후 1930년 지금의 칠보면 축현리 조왕곡으로 옮겨온 것이다..
조선말기 사회사업가였던 정문술 중수의조비가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28년(순조 28)에 중건하였다...
정면 5칸과 측면 3칸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기와이다.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의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뒤편으로 들면 태산사..
무성서원은 통일신라 말기 유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지금의 칠보ㆍ태인ㆍ산내ㆍ산외 일대를 돌보는 태산군수로 재임하며 쌓은 공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성종 때 건립된 태산사에서 시작됐다..
태산사는 숙종 22년(1696년)에 무성서원으로 사액됐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도내에서는 유일하게 화를 면했다.
무성서원은 특히 을사늑약(1905년) 이듬해 지역 출신의 최익현ㆍ임병찬 선생이 일제에 항거하고자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뒤편에서 바라본 서원..
태산사의 은행나무..
좌측 두개의 비각..
통정대부 전비서감승 신영희 불망비(通政大夫 前秘書監丞 申瑢熙 不忘碑)..
신용희는 재야유생 의병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이현(利現), 호는 운호(雲湖)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이천수창의소 의병진을 조직하는 데 주도적으로 활약하였다.
의병진을 강화하기 위해 음죽, 죽산 등지에서 화포군 300여 명을 모집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이를 계기로 이천수창의소 지도부 조직의 우군장을 담당하였고, 이현전투로 인해 흩어진 병사를 규합하고, 의병진 재정비에 힘썼다.
남한산성에 근거하여 일본군과 대치하였으며 지속적인 의병투쟁을 결의했으나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상황이 어려워져 김하락의 제의에
따라 영남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던 1906년 6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거한 최익현 의병진에 가담하였으나 순창까지 진격한
뒤 의진이 곧바로 와해되어 항전이 종료되었다..
그 뒤 기삼연이 1907년 9월 전남 영광의 수록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설치하고 의진을 조직, 창의대장이 되자 여기에
참가해 항전을 벌여 나갔으며 1907년 9월 10일 장성(長城)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이던 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 옆의 또다른 비각..
비문의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담장 너머의 서원..
서원의 전경..
나서는 길목의 문화역사체험관..
길가의 거목..
연방죽 너머로 1998년 11월에 건립된 태산선비문화사료관...
부지면적은 2,512m², 건물면적은 205m²로 1층 규모의 작은 전시관이며 전시실·수장고·사무실·시청각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읍시 북면·칠보면·태인면·옹동면·산내면·산외면을 ‘태산선비문화권’이라 하는데 이 지역은 신라시대 때 태산(泰山)이라 불렸던 곳으로,
선비정신을 담고 있는 문화유적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유학자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부임한 이래 선비기질의 유풍이 계승되어 조선시대에 정극인, 송세림, 김약묵, 신잠,
이항 등의 유학적 선비인맥이 형성되었다.
이 지역에는 최치원, 정극인, 신잠 등을 향사하는 무성서원을 비롯한 서원과 송산사, 시산사 등의 사당이 현존하며,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있을 때 들렀다는 피향정(披香亭)을 비롯한 수많은 누정이 산재되어 있다.
보물 제1181호 ‘태인 고현동 향약’의 고장이자,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문학으로 불우헌 정극인이 지은 상춘곡(賞春曲)의 산실이기도 하다.
또 예로부터 고현팔경(古縣八景)이라 하여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본 관은 태산선비문화권의 중심지인 칠보면을 중심으로 한 선비문화와 유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갖가지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태산선비문화에 대한 설명을 비롯해 사진자료를 곁들인 선비문화·민속문화 설명판이 설치되었고, 탁본·그림·문서·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무성서원의 모형도 있다.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성황산 자락, 동진강이 마을 앞을 휘감아 흐르는 원촌마을 입구에 자리하며,
사료관 바로 앞으로는 정극인의 동상과 상춘곡 가사비가 세워져 있다...
관광부(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문화마을로 지정된 원촌마을 내에는 유교문화의 산실인 무성서원과 송정(전북도문화재자료 제133호)을 비롯한 후송정·한정 등 정자 10여 개, 필양사·송산사·시산사·영모당 등의 사당, 무성리 석불입상(전북도유형문화재 제157호),
무성리 삼층석탑(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8호) 등의 문화재가 즐비하다...
원촌마을 입구의 영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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