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기행] 호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 관어공원과 현충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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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기행] 호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 관어공원과 현충탑..

by 정산 돌구름 2012. 8. 3.
[담양기행] 호국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 관어공원과 현충탑..

 

 

탐방일 : 2012년 8월 2일

소재지 : 전남 담양군 담양읍 삼만리

탐방지 소개

  <담양 호국사(護國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

  2008년4월11일 전남도문화재자료 제267호로 지정된 조선 후기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다. 복장물의 발원문을 통해 현종1년(1660년)

  5월15일 담양 용구산 회적암(晦迹庵)에서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고,  조각승은 응혜(應惠)와 해기(海機)이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螺髮; 소라 모양의 부처의 머리카락)에 계주(구슬 머리장식)가 선명하다.

  얼굴은 턱 부분이 약간 좁은 사각형으로, 이목구비가 비교적 선명한 편이며 평온한 느낌을 준다. 이마 중앙에 백호(白毫)가 돌출해 있고,

  눈썹은 가늘게 뻗어 있으며, 일자형의 눈은 정면 아래쪽을 향하고 있고, 코는 뭉툭하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인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가슴 중앙에 깊은 ‘U’자형 주름이 져 있으며 내의자락의 띠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발이 왼발 위로 올라오는 길상좌로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수인(手印)은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에 가깝다..

 

관어공원 표지석..

 

호국사 극락보전...

 

2011년 점안식과 회향불사를 가졌었다..

 

호국사 목조아미타야래좌상...

 

 

 

 

 

 

범종각...

 

극락보전 옆 칠성각...

 

사..

 

호국사 경내풍경.. 

 

반대편의 모습..

 

호국사 표지판은 여성회관앞 도로가에..

 

관어공원 내의 현충탑..

아름다운 담양읍 전경과 메타쉐콰이어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군민의 쉼터인 관어공원에 조국을 위해 신명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담양군충혼탑건립위원회에서 이 탑을 세워 1992년6월6일 현충일에 제막식을 가졌다...

 

탑의 형상은 12개의 대나무 기둥모양이 21m 높이로 연립 구성되어 12개 읍면의 총화와 약동으로 발전하는 21세기의 담양을 조성하고

있으며, 상단부의 비천하는 여신상은 영령의 명복과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2009년 5월, 담양군보훈단체협의회에서는 6.25당시 조국과 민족을 수호하다 순국한 730위 영령과 보훈대상자중 사망하신 315위의

영령을 충혼당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관어정(觀魚亭)...

원래 관어공원 터에는 조선시대 담양부사가 백성을 위해 토신인 사(社)와 곡신인 직(稷)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직단이 있던 자리이다..

 

1857년 당시 담양부사 황종림(黃鍾林)이 지역민의 양로와 교육을 목적으로 남에는 남희정(南喜亭)을 북에는 관어대(觀魚臺)을

건립하였으나 일제시대에는 사직단 대신에 신사(神社)가 자리잡은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후 충렬사, 경찰충혼비 등이 자리잡고 1967년 폐허된 관어대를 중수하고 관어정이라 하였다.

1969.5.8 공원으로 지정되고, 1980.4.17 관어공원으로 명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수정중수비와 공적비..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본관은 신평(新平). 호는 고하(古下). 어렸을때 이름은 옥윤(玉潤)이며, 전남 담양 출생. 송훈의 넷째아들로 어머니는 양씨(梁氏)이다.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한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 이후 30여 년 간『동아일보』를 이끌었다.

어려서 기삼연·김직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1907년 창평(昌平)의 영학숙에 들어가 고광준·김성수 등과 영어 등 신학문을 배우다가

김성수와 함께 가족들 몰래 일본으로 갔다.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와 긴조(錦城)중학을 거쳐 1910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그해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충격을 받고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도일, 메이지(明治)대학 법과에 입학한 후 유학생친목회 총무,

호남유학생 회장 등으로 항일운동을 벌인 한편, 김병로 등과 유학생회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펴내기도 하였다.

최남선·장덕수·현상윤·조만식·신익희·김준연·조소앙 등과 사귀면서, 1915년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이듬해 김성수가 중앙중학교를

인수하자 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데 주력하였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피체되어 1년 반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여 같은 해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 이후 30여 년간 사장·고문·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동아일보>를 민족의 대변지로 이끌었다.

1936년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신문은 무기정간, 자신은 사임하였다.

그 사이 하와이에서의 범태평양회의에 신흥우와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일제에 대한 협력을

거부, 회피하여 오던 중 1945년8월10일 총독부로부터 정권인수의 교섭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8·15광복 후 여운형 등이 주동이 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맞서 우익세력을 규합,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수석총무가 되었다. 미군정

적극 협력하면서 뒤이어 환국한 이승만 및 임시정부 지도자들과 함께 정부수립에 힘쓰는 한편 속간된 <동아일보>사장에 취임하였다.

그해 12월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안이 전해지자, 반탁을 강력히 주장하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견해를 달리하다가,

한현우에게 암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경찰 충혼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조국을 지키기 위해 많은 전투에서 적과 교전중 장렬하게 순직한 경찰관들의 넋을 추모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의

역사적 발자취를 후세에 남겨 영령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경찰충혼비를 건립한 것이다..

 

우측 충혼비는 1949.2.28. 월산면 바심재전투에서 순직한 경찰관 33명을 추모하기 위해 1950.2.28. 건립한 것이고,

좌측 충혼비는 1950년 6.25를 전후 담양지역 전투에서 무장공비와 교전중 순직한 경찰관 91명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담양경찰서 전정에 세워져 있던 추모비를 1952.7.30 관어공원 현위치로 이정하였다..

 

역대 부사들의 불망비와 선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