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2년 7월 28일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용문산 백운봉)
○ 사나사(舍那寺)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태조6년(923년) 고려 태조의 국정을 자문한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이 제자 융천(融闡)과 함께 세웠다고 전한다.
<봉은사본말사지>에 의하면 창건 당시 비로자나불상과 5층석탑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공민왕16년(1367년) 태고화상 보우(普愚)가 다시 140여칸 규모로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
그 후 1698년 덕조(德照)가 다시 지었으며, 1907년 의병과 관군이 싸우던 중에 모두 불에 탔다.
1909년과 1937년 법당과 조사전을 지으면서 사세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6.25전쟁이 일어나 다시 사찰이 불타버렸다.
1993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적광전(大寂光殿)과 정면 3칸, 측면 2칸의 미타전을 새로 지었다.
문화재로는 원증국사석종(경기도유형문화재 제72호), 원증국사석종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73호)가 있고, 대적광전 앞마당에 삼층석탑,
오른쪽에는 석조미륵여래입상이 서있다. 절에 들어오는 길목에는 수도산 봉은사의 일주문이 옮겨 세워져 있다.
대적광전(大寂光殿)..
정면과 측면 각 3간으로 내9외5포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1982년 5월에 주지로 부임한 포운당 태공선사에 의해 1990년 7월에
착공하여 1993년 2월에 완공하였으며, 기존의 대웅전 터에서 북쪽으로 약 4m 쯤 물려 세웠다.
옛 대웅전은 동쪽으로 옮겨 서향시켜 지장전으로 삼았다.
기단은 화강석을 다듬은 장대석을 쌓아 높직하게 만들었으며, 정면 중앙에는 역시 장대석을 이용해 만든 계단이 있다.
계단 좌우에는 소맷돌을 설치하였으며, 기단 윗면은 장방형의 판석을 깔아 마감하였다.
복련을 새긴 원형초석에 원주기둥을 사용하였고, 어간을 협간에 비해 넓게 설정하였으며, 측면은 전후의 툇간을 좁게 설정하였다.
내부에는 후면 쪽에 고주 두 개를 두었고 이에 의지하여 불벽과 불단을 설치하였다...
규모에 비해 출목수가 적은 편이나 살미의 쇠서를 길게 뽑았고 내외살미에는 연꽃과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포벽에는 여래좌상을 그렸다.
정면에는 어간에 6분합문, 협간에 4분합문을 설치하였고 양 측면에는 전퇴에 출입을 위한 외여닫이문을 들였다.
창호는 아래에 궁창부 2단을 둔 빗꽃살로 모두 동일하게 만들었으나 어간과 협간의 꽃 무늬를 다르게 하여 변화를 주었다.
측면과 후면에는 심벽구조의 벽을 들였으며, 7폭의 심우도와 함께 꽃을 그렸다.
정면 어간에는 ‘大寂光殿’이라 쓴 현판을 걸었는데, 比丘 太定이 쓴 글씨이다. 또한 각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주련을 걸어놓았다.
灋身遍滿百億界(법신편만백억계) 부처님이 온 세계에 가득하시니/ 普放金色照人天(보방금색조인천) 금색 빛 온 세계에 두루 비치네
處處稱揚佛功德(처처칭양불공덕) 곳곳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니/衆生有苦悉除滅(중생유고실제멸) 중생이 지닌 모든 고통 사라지네
내부 바닥에는 전체에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우물천장이다. 어간의 후면에 설치한 고주에 의지하여 불벽과 함께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 위에는 본존으로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시고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좌상을 협시로 봉안하였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높이 4.5척,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좌상 높이 3.8척이다..
불단 상부에는 亞자형 평면을 한 중층의 닫집을 설치하였다.
닫집은 허주와 연봉, 낙양각, 많은 출목을 지닌 공포, 내부의 용과 극락조 및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엄을 베풀었다.
협간 후벽에는 각각 꽃과 관음보살을 벽화로 그렸으며, 양측면 중앙에는 각각 불단을 마련하고 지장시왕탱과 신중탱을 모셨다...
후면 쪽 툇간 벽에는 각각 영단과 사나사의 중창주인 태고보우선사의 영정을 모셨다.
태고보우선사의 영정은 선사의 좌상을 그린 것으로 향우측 상단에 ‘傳法初祖太古禪師’라는 화제를 써 놓았다..
지장시왕탱은 1993년 대적광전의 창건과 함께 그려 봉안한 것으로 중앙에 지장보살의 좌상을 그리고 좌우를 3단으로 나누어
대칭의 구도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시왕을 비롯한 권속들을 그렸다.
하단 중앙에 화기란을 마련하고 '佛紀二五三七年二月十三日', '화공 하정 박정원 배을희' 등의 화기를 적었다...
신중탱은 상단 좌우에 제석천과 범천을 그리고 하단 중앙에 동진보살을 배치하였으며, 그 좌우에 신중들을 대칭의 구도로 배치하였다.
1993년 대적광전의 창건과 함께 그려 봉안한 것으로 하단 중앙에 화기란을 마련하고
'불기二五三七年二月十三日', '화공 하정 정원 배을희' 등의 화기를 적었다..
최근에 조성한 극락전(極樂殿)..
불교에서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당우로써 극락보전·무량수전·무량전·보광명전·아미타전이라고도 한다..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봉안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관하여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비추어 끝없는 힘을 얻게 하는 보살이다.
후불탱화로는 주로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가 봉안하고, 극락의 구품연화대를 묘사한 극락구품탱과 아미타탱화를 봉안하기도 한다..
사나사 극락전은 삼존불과 뒤편으로 천불이 모셔져 있다..
1999년에 창건된 삼성각(三聖閣)..
대광보전 뒤편 축대를 쌓아 한 단 높게 조성된 대지 위에 남향하고 있는데, 사나사 사역의 가장 뒤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막돌로 쌓은 나지막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과 원주를 사용하였으며, 3량가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연등천장으로, 정면에는 세 간 모두에 각각 두 짝의 여닫이문을 달았다.
아래에 궁창이 한 단 있는 띠살창호이며, 양측면과 후면은 심벽의 벽을 쳤다..
내부에는 후면의 벽에 기대어 단을 마련하고 어간에 산신탱을, 양 협간에는 칠성탱과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산신탱은 1964년에, 독성탱은 1965년에 조성되었으며, 천태각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독성을 그렸다.
좌우에 화기란을 마련하여 '佛紀二千九百九十二年 金魚 靈峯 炳昊' 등의 화기를 적었다.
칠성탱 역시 1965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의 화면을 상중하 3단의 대칭으로 구성하였다.
치성광여래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비롯하여 칠원성군과 칠여래, 남극노인성 등을 그렸다.
역시 좌우에 화기란을 마련하여 '佛紀二千九百九十二年 金魚 靈峯 炳昊 茶角'등의 화기를 적었다..
삼성각 바로 옆의 조사전(祖師殿).. 문이 굳게 닫혀있다..
당사대공덕주영월신씨송덕비(當寺大功德主寧越辛氏頌德碑)..
사나사 중건불사 대공덕주의 공적을 찬양하는 송덕비로 1973년에 조성하였으며, 장방형의 대좌와 비신,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 정면에는 종서로 ‘當寺大功德主寧越辛氏頌德碑’라고 쓴 비명을 적었고 후면에 비문을 적었다.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當 舍那寺는 지금으로부터 千五百余年前 新羅 景明王 十五年에 創建된 절이며 其間 數次에 걸쳐 再建 또는 保修를 거듭하여 오든 차
一九五0年 六.二五動亂으로 法堂과 요사가 全燒된 것을 서울 東大門區 龍頭洞에 居住하는 咸命基 先生 令婦人이신 寧越辛氏가 再建하고
일신수보한 功績이 커서 頌德碑를 세웟음 / 佛紀二千五百十七年甲寅四月七日 / 住持 閔秉周 / 子 咸玟周 敬成 仁成 / 孫 英祚 英祐 英夏' ..
함씨각(咸氏閣)..
1956년 당시 주지 김두준이 서울 용두동에 거주하는 함문성 단월의 도움으로 조영한 1간의 작은 전각이다.
민도리식,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자연석 외벌대로 낮게 조성하였으며, 막돌초석과 원주를 사용하였다.
정면에는 6분합문을 달았는데, 하부에 궁창을 한 단 둔 띠살의 창호이며, 측면과 후면은 모두 심벽구조의 벽을 쳤다.
모로단청을 하였으며, 내부에는 후면 벽에 의지하여 一자형의 단을 마련하고 함씨 조상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사나사 원증국사석종비(圓證國師石鐘碑)
1978년10월10일에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된 고려 말의 고승 원증국사(1301~1382)의 묘탑비로써, 함씨각 오른쪽에 있다.
원증국사는 고려 말의 고승 보우(普愚)로 13세 때에 회암사에서 광지선사(廣智禪師)에 의해 출가하고, 충숙왕 12년(1325년) 선과(選科)에
급제하였으나 세상을 등지고 감로사에서 고행을 하다가 후일 삼각산 중흥사 동봉에 절을 짓고 태고사(太古寺)라 하였다.
충목왕 2년(1346년) 원나라에 가서 청공(淸珙)의 법을 이어 받아 임제종(臨濟宗)의 19대 법손(法孫)이 되었다.
충목왕 4년(1348년) 귀국하여 왕사·국사가 되었으며, 우왕(禑王) 때 사나사(舍那寺)를 중건하고 소설암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자연암반으로 된 지대석을 파서 비신(碑身)을 끼워 세웠는데 비신 양옆에 장방형 기둥을 세워 비를 보강하였다.
두 개의 화강암 석주 사이에 검은색 판석을 끼워 만든 형식이다. 위에는 밑이 둥근 반구형의 옥개석을 얹어 비신을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비는 1379년에 세워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와 근본적으로 유사한 것이나 보다 간략화된 형식임을 알수 있다.
옥개석은 가옥의 지붕 형식을 모방하였으나 세련되지 못하고, 그나마도 한쪽은 떨어져 나갔다.
비신은 균열이 일고 일부는 파손되었으며, 석주도 한쪽은 파손이 심하다.
전체높이 1.67m, 나비 1m이며, 6·25전쟁 때 파손되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다만, 비문(碑文)은 정도전이 지었고 글씨는 재림사 주지인 선사 훤문이 썼으며 우왕 12년(1386) 문인 달심(達心)이 세웠다는 사항들을
대개 알 수 있다. 이 비와 관련해서는 조선 영조 49년(1773년)에 양평군내의 당산계원(堂山契員)이 원증국사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새겼다는 다음과 같은 비기(碑記)가 전한다.
'朝鮮京畿差道楊根郡境內 堂上佛養我國壽上有彌智山之舍那寺 爲永世借佛之朝圓證國師道場也
(조선경기차도양근군경내 당상불양아국수 상유미지산지사나사 위영세차불지조원증국사도량야)'..
사나사 원증국사석종..
1978년10월10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된 고려말 고승 원증국사의 묘탑(墓塔)으로 사나사 부도, 원증국사 부도라고도 한다.
원증국사가 소설암에서 입적한 이듬해 다비를 하니 사리가 무수히 나왔다.
왕은 그를 원증국사로 책봉하고, 제자 달심(達心)이 사리를 모아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이 탑은 화강암으로 건조한 석종형(石鍾形)의 부도로서 4각기단 위에 탑신(塔身)과 탑정(塔頂)을 얹었다.
탑신은 표면에 아무런 조각이 없고 상하는 수평을 이루었으며, 탑정에는 화염문(火焰紋)을 조각한 낮은 보주(寶珠)가 얹혀 있다.
대석은 1매석으로 가로·세로 각각 1.1m이며, 탑신의 지름 1m, 전체 높이는 2.75m이다. 탑신과 접하는 곳에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양평용천리삼층석탑
대적광전 앞마당 동쪽에 축대를 쌓아 한 단 높게 마련된 대지 위에 서있으며, 전체 높이 1.8m로 상륜부 일부가 파손되었다.
1983년9월19일에 경기도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데, 탑의 원래 위치가 이곳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축대는 새로 조성된 것이며, 탑은 기단과 3층의 탑신 및 일부가 파손된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상면에 많은 경사를 준 갑석으로만 구성된 매우 약화된 형식이다.
상층기단은 우주와 탱주를 새겨 각 면을 2간으로 만든 면석과 역시 상면에 경사를 많이 준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갑석 위에는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탑신받침을 만들었다. 탑신부는 각각 별석으로 구성된 각층의 탑신석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은 1층에 비해 2층에서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탑신석에는 우주를 새겼으며, 옥개석에는 반곡된 지붕면을 새겼다.
옥개석 아래에는 3단의 나지막한 층급받침과 물끊기를 두었고,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만 남아있을 뿐 상부는 소실되었다.
전체적으로 신라 탑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나 규모가 작은 편이며, 기단의 구성이 생략적이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3단으로 구성되어
약화된 점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들어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하한은 고려 중기 이후로 내려오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범종각(梵鐘閣)..
대적광전 앞의 마당을 가로막고 선 범종각은 2005년에 신축하였으며, 화강석판을 붙인 기단위에 원형초석을 설치한 후 원기둥을 세웠다.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초익공식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무고주5량이며, 사방에 계자난간을 설치하고 낙양각을 붙여 건물을 꾸몄다.
범종각 안에는 범종을 비롯하여 법고와 운판, 목어의 사물을 걸었다..
미륵입상(彌勒立像)..
대적광전 서쪽에는 1977년에 조성한 미륵불 입상이 남향으로 서있다. 방형의 기단 정면에는 조성기를 적어 놓았다
미륵불상은 연화대좌 위에 서 있으며, 통견의 법의를 입고 오른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올려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고 있다.
왼손은 앞으로 내려 역시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고 머리가 큰 편에 속하는데 어린이 같이 해맑은 미소가 인상적이다...
사나사 경내...
대웅전 앞마당 서쪽에는 민도리식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요사가 동향하고 있다...
원래의 일주문보다 더 아래쪽에 새롭게 일주문을 조성하였다..
함왕혈(咸王穴)..
삼한 초기 함왕 주악이 태어난 곳이라고 전해진다.
먼 옛날 이 인근에 살던 함씨 무리들이 그들을 이끌 지도자가 없자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함왕혈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그들은 그 아이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성을 쌓고 번창일로를 걷던 함씨 일족들은 외부의 침입을 받아 성이 무너지고 왕이 죽자 결국 망하게 되었다. 후에 성을 쌓을 때 왕이
태어난 함왕혈을 밖에 두고 성을 쌓아서 나라가 망했음을 알게 된 후손들이 바위에 보호책을 치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러하지만, 실제로는 통일신라 말기의 강력한 호족세력이었던 함규 장군이 함왕이라는 이야기가 지배적이다.
양근(양평) 함씨의 시조인 함규 장군은 이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지만 결국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여 개국공신이 된 인물이다
함왕혈..
함왕성은 용문산 남서쪽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당시 전략적인 요충지였으며, 함씨 대왕성 또는 함공성으로 불렸다.
함왕성은 길이가 2만 9,058척(약 8,800m)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현재는 석축의 일부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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