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기행] 용문산 용문사(龍門寺)와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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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기행] 용문산 용문사(龍門寺)와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

by 정산 돌구름 2012. 7. 30.
양평 용문산 용문사(龍門寺)와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

 

탐방일 : 2012년 7월 28일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용문산

용문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본사인 봉선사(奉先寺)에 속해 있으며, 신라 신덕왕2년(913년)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

  고려 우왕 때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다. 태조4년(1395년) 조안화상이 중창하였으며,

  세종29년(1447년) 수양대군이 어머니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원찰로 삼으면서 보전을 다시 지었다.

  세조3년(1457년) 왕명으로 중수하는 등 중 ·개수를 거듭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07년(융희 1)에 왜군의 병화로 전건물이 소실된 것을 당시의 주지 취운(翠雲)이 소규모로 재건하여 유지해 오던 중 그마저

  6·25전쟁 때 파괴되어 3칸의 대웅전관음전·산령각(山靈閣)·종각·요사(寮舍) 등만 남게 되었다.

  1982년부터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조선 전기의 정지국사(正智國師)부도 및 정지국사탑비가 있는데, 부도와 탑비는 함께 보물 제5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경내에 수령이 1,100년이 넘는 은행나무는 마의태자가 심었다고 전해지며 현재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문사 일주문..

사찰에 들어서는 첫 문이라는 뜻으로, 용문사 일주문은 1986년 조성한 것이며 단청은 박정원이 한 것이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에는 삼존불상을 보시고 있는데 팔작지붕에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건물로 최근에 지었다..

 

용문사의 대웅전은 1983년 이종걸 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단청은 박정원이 했다고 한다...

 

'대웅전(大雄殿)' 편액은 서울 봉은사에 걸려 있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근래에 번각(飜刻)한 것이다..

 

중앙의 불단에 석가삼존불을 모시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1984년에 봉안한 것이다.. 

 

3면의 벽에 작은 천불(千佛)을 가득 봉안했다..

 

벽면에 신중탱과 천수관음 불화, 그리고 동종이 있다...

 

대웅전과 지장전 사이의 불단...

 

지장전(地藏殿)...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기와는 보기 드물게 청기와로 올렸는데, 1993년 최기영씨가 건축, 단청은 박정원씨가 하였다..

 

'지장전(地藏殿)' 편액은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로, 1973년에 쓴 것이며, '용문산용문사' 글씨도 그의 작품이다..

외부에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있는 내용을 벽화로 그렸다..

 

안에는 불단이 마련되어 있으나 불상은 없다..

 

불화로는 후불탱과 시왕탱 10폭이 있다..

 

향 좌측에는 스님들의 영정이 있다..

 

 

관음전(觀音殿)..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용문사 관음전은 1912년에 건립되었으며 관음보살상과 천수천안 관세음보살탱화 등을 봉안하고 있다..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木彫觀音菩薩坐像)..

관음전 안에는 관음보살좌상과 후불탱이 있는데, 관음상은 조선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는 나무로 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리본처럼 묶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다.

원만한 얼굴에는 눈·코·입이 작게 표현되어 있으며, 상체는 뒤로 약간 젖혀져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어,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귀족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보살상이다.

가슴과 양 무릎 사이의 구슬장식, 왼쪽 가슴에 있는 금으로 된 삼각형의 장식 등에서 전형적인 14세기의 보살상 양식을 볼 수 있다.

포항 장륙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이나 대구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보다는 신체의 표현이 덜 경직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이들 작품보다는 시대가 약간 뒤지는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고려 후기 보살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전체적인 표현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깔끔한 것이

조선시대 초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나타내주고 있는 듯 하여 조형성(造形性)에서도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개금은 근래에 한 것이며, 크기는 무릎 너비 41㎝, 앉은 높이 76㎝이다..

 

범종각(梵鐘閣)..

다른 시찰과 달리 범종만을 봉안하고 있는데, 1986년 주지스님이셨던 종걸스님이 조성하셨으며 단청은 박정원씨가 하였다고 한다..

 

범종각에서 본 대웅전..

 

지장전과 대웅전..

 

삼성각(三聖閣)...

1985년 조성한 것이며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삼성각(三聖閣)' 편액은 봉선사 월운(月雲)스님의 글씨다..

 

안에는 1985년에 조성한 칠성탱·독성탱·산신탱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칠성탱만 조성되어 있다...

 

삼성각 뒤편으로는 산령각과 동성각이 있다..

 

최근에 조성한 산령각..

 

안에는 산신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최근에 조성한 독성각..

 

역시 독성상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삼성각에서 바라본 산령각과 독성각..

 

1989년 조성한 용문사의 삼층석탑...

 

대웅전과 종무소..

 

요사채인 미지원(彌智院)..

 

용문사 사적비...

 

부도군...  용문사를 거쳐 간 스님들의 사리탑....

 

용문사 안내도..

 

정지국사 부도(正智國師 浮屠)..

절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지점에 정지국사 부도가 있고 거기에서 다시 약 30m 아래 쪽에 비가 있다.

부도 및 비가 함께 보물 제5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는 맨 위에 있는 상륜부 외에는 비교적 잘 남아있는 편으로 지대석과 하대석이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나 상대석과 탑신부가 팔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형식도 맨 아래서부터 장대석 위에 하대석·중대석·옥개석·상륜부로 된 구성을 하고 있는데, 각 부분은 대체로 완전하게 남아있지만

상륜부만은 일부 결실되고 둥근 앙련석(仰蓮石)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사이에 유행했던 팔각원당형 부도의 걸작에 비해서는 작품성이 다소 뒤지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부도로서는

나름대로 단아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작품으로 정지국사의 입적 3년 뒤인 1398년(태조 7)에 세워졌으며, 크기는 높이 215㎝다.

정지국사는 고려말 조선초의 스님으로 중국의 구법승이었는데, 공민왕 5년(1356년)에 귀국하여 면산을 다니면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당시 나옹 혜근과 무학 자초가 국사가 되어 있었으나 그는 이를 싫어해 숨어서 살다가 태조 4년(1395년) 7월7일에 입적하였다.

시호가 정지국사이고 미지산의 용문사에 태조가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정지국사 부도비(正智國師 浮屠碑)..

부도와 함께 보물 제5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지국사 비는 머릿돌 없는 직사각형의 단순한 모양인데, 그러나 윗부분 양쪽 모서리를

마치 종이 끝이 접혀진 듯한, 이른바 모죽임 형태로 하였기 때문에 결국 그 마름모꼴 부분이 비액(碑額)의 구실을 하게끔 만들었다...

 

비액의 전서(篆書)는 4㎝ 정도의 크기이며, 비문의 글씨는 1.5㎝ 안팎의 해서(楷書)로 조선초의 문인인 권근(權近)이 지었다고 한다..

비면의 글씨가 새겨진 주위로 가는 선이 그려져 있고 그 안으로 비문이 있는데, 전부 20행에 각 행마다 44자로 쓰여 있다.

비측(碑側)에는 아무 기록이 없고 뒷면인 비음(碑陰) 부분에 조성자의 명단이 적혀 있다...

 

1962년12월3일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용문사의 은행나무...

 

추정수령 1100년인 노거수로 나무높이 62m, 가슴높이 줄기둘레 14m, 가지퍼짐은 동쪽 14.1m, 서쪽 13m, 남쪽 12m, 북쪽 16.4m이다.

용문사 경내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이며, 줄기 아랫부분에 큰혹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의 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우람하고 당당한 위엄을 풍기는 대표적인 명목이라 할 수 있다...

 

이 나무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세자였던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하고,

또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가 자라는 동안 많은 전쟁과 화재가 있었으나 이 나무만은 그 화를 면했다고 한다..

 

사천왕전(四天王殿)이 불탄 뒤부터는 이 나무를 천왕목(天王木)으로 삼고 있다고 하는데, 이 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소리를 내어 그 변고를 알렸다고 할 정도로 신령스런 나무로 인식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 세종(世宗) 때는 정삼품(正三品)보다 더 높은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받은 명목(名木)이다. 

 

또, 옛날 어느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을 때 톱자리에서 피가 쏟아지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일어났기 때문에

중지하였다 하며 또한 나라에 큰변이 있을 때 소리를 내었다고 하는데 고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는 커다란 가지가 1개 부러졌고

8.15해방과 6.25사변때에도 이 나무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