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기행] 한국불교의 거목, 태화산 마곡사(麻谷寺)..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공주기행] 한국불교의 거목, 태화산 마곡사(麻谷寺)..

by 정산 돌구름 2012. 7. 19.
한국불교의 거목 공주 태화산 마곡사(麻谷寺)..

 

탐방일 : 2012년 7월 18일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마곡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本寺)로서, 사찰의 창건 및 사찰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마곡사 사적입안(事蹟立案)의 기록으로 신라 선덕여왕9년(640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이 선덕여왕에게서 하사받은

  전(田) 200결로 절을 창건하기 위한 터를 물색하다가 통도사(通度寺)·월정사(月精寺)와 함께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자장이 절을 완공한 뒤 낙성식을 할 때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삼대[麻]와 같이 무성했다’고 하여 ‘마(麻)’자를

  넣어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두번째는 신라의 승 무염(無染)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 절을 지을 때 스승인 마곡보철(麻谷普徹)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과 절을 세우기 전에 이곳에 마씨(麻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창건이후 신라말부터 고려초까지 약200년 동안 폐사가 된 채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던 것을 명종2년(1172년)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왕명을 받고 중창하였다.

  보조가 처음 절을 중창하려고 할 때 도둑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였으나 도둑들은 오히려 국사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보조가 공중으로 몸을 날려 신술(神術)로써 많은 호랑이를 만들어서 도둑에게 달려들게 하였더니 도둑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

  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도둑들에게서 절을 되찾은 보조는 왕에게서 전답 200결을 하사받아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의 건물은 지금의 배가 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그 뒤 60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가 효종2년(1651년)에 각순(覺淳)이 대웅전과 영산전·대적광전 등을 중수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31본산(本山)시대에는 도내 100여 사찰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또한, 이 절은 김구(金九)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한말 명성왕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쓰치다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 김구는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를 가장하며 살았다.

  지금도 대광명전 앞에 김구가 심은 향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라고 쓴 푯말이 꽂혀있다.

  현재 이 절은 충청남도 70여 개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다.

  마곡사는 임진왜란후 중창불사로 많은 전각을 지어 번성하던 정조6년(1782년)에 대법당을 비롯한 1,050여간이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가장 먼저 대법당이 중건되는데, 이 대법당은 본존을 모시는 기능 외에 사찰 전체가 감당해야 할 상당 부분의 예불의식을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도 본존에 따른 불전의 명칭 대신 대법당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그 대법당이 바로 이 대광보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교(極樂橋)를 사이에 두고 대웅전(보물 제801호)과 영산전(보물 제800호), 천장의 무늬가 아름다운 대광보전

  (보물 제802호), 강당으로 사용하는 흥성루, 해탈문·천왕문, 16나한과 2구의 신장을 모신 응진전, 명부전이 있으며, 응진전 맞은편에는

  요사채인 심검당(尋劍堂)이 ㄷ자형으로 크게 자리잡고 있다.

  또 영산전 옆에는 벽안당(碧眼堂)과 매화당(梅花堂)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염화당(拈花堂)·연화당(蓮華堂)·매화당(梅花堂) 등 승려가

  거처하는 요사채가 매우 많다.

  이들 건물 중 영산전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대표할만한 것이다.

  그 현판은 세조가 김시습(金時習)을 만나기 위해서 이 절에 왔다가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면서 남긴 필적이라 한다.

  또, 대웅보전은 1651년에 각순이 중수한 것으로, 현판은 김생(金生)의 글씨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특이한 2층 건물로 조선 중기의

  사원건축 양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며, 건물의 기둥을 안고 한바퀴 돌면 6년을 장수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밖에도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1(보물 제269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6(보물 제270호), 마곡사 오층석탑(보물 제799호), 석가모니

  괘불탱(보물 제1260호), 마곡사 동제 은입사향로(충남 유형문화재 제20호), 마곡사 동종(충남 유형문화재 제62호) 등이 있다.

  이 중 오층석탑은 풍마동다보탑(風磨洞多寶塔)이라고도 하는데,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도 하나 라마교 탑과 비슷하여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탑은 임진왜란 때 무너져 탑 안의 보물들이 도난당한 지 오래이나 1972년에 수리할 때 동제 은입사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전국민의 3일 기근을 막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전설이 있으며, 한국·인도·중국 등 세계에서 3개밖에 없는 귀중한 탑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대광보전 마루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30평 정도의 삿자리가 있는데 이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조선 후기에 이름 없는 앉은뱅이가 이 절을 찾아와서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는 불구를 고치기 위해서 백일기도하는 동안 틈틈이 이 삿자리를 짰다.

  이 삿자리는 참나무를 한 끝에서 잇고 또 이어 한 줄로 완성한 것인데, 그는 이 자리를 짜면서 법당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에게 자신의

  불구를 낫게 해줄 것을 기도하였다. 백일 뒤 일을 다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문을 걸어 나갔다고 한다.

  부속암자로는 심정암·부용암·북가섭암·토굴암·백련암·영은암·대원암·은적암 등이 있다.

  마곡사가 자리 잡은 태화산이 태극형을 띠고 있어 <택리지>, <정감록> 등의 여러 비기(祕記)에서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

  (十勝之地)의 하나로 꼽고 있는데 사찰을 끼고 흘러가는 태화천 역시 태극의 형상으로 휘어지며 흘러간다.

  이 절은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봄 경치가 뛰어나다.

  백련암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특히 빼어나며, 북가섭암의 바위 뒤에 있는 천미장군수(天米將軍水)는 뛰어난 약수이다.

  또 마곡사 앞 냇가 암벽에는 부여 고란사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고란초가 자생하고 있다..

 

 

마곡사주차장과 인근 상가..

 

마곡사 일주문..

 

해탈문(解脫門)..

천왕문과 더불어 마곡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문으로 천왕문보다 앞서 위치하고 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세속이 아닌 해탈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하여 해탈문이라 부르며, 내부에 금강역사상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금강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도리통 3간, 양통 2간으로 어간을 개방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해 산문의 전형적인 평면형을 이루고 있다.

개방된 어간을 제외한 나머지 벽을 모두 판벽으로 구성했음이 특이하며, 양 협간에는 금강역사와 함께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를 모셨다.

초석은 자연석을 활용하였고, 기둥은 원주이며, 주심포식으로 주간에는 초각한 화반을 사용하였다.

공포는 외1출목으로 세 단의 살미를 사용하고 있는데 살미 외단은 모두 앙서형으로 쇠서 위에 연봉과 연화를 초각했고,

내단은 살미를 한 몸으로 초각해 보아지형을 이루도록 했으며, 첨차는 모두 초각을 해 장식했고, 보머리는 봉취형이다.

가구는 무고주5량으로 팔작지붕을 구성하기 위해 측면 주심포 위에서 대들보로 충량을 걸어 외기도리를 받치도록 했다.

해탈문은 공포의 구성과 형태, 가구수법 등 전체적인 건축양식이 조선시대 후기 건축의 전형적인 특성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고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조선 헌종 12년(1846년)에 승려 정순을 화주로 하여

중수되었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해탈문 안에 <태화산마곡사해탈문중수기>가 있어 1910년에 중수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금강역사와 문수동자 및 보현동자는 모두 소조(塑造)이며, 문수와 보현동자는 각각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다..

 

금강역사는 장수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얼굴이 신체에 비해 큰 편이고 험상궂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으나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익살스런 표정을 지니고 있다..

 

천왕문(天王門)..

천왕문은 해탈문을 통과한 바로 다음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정도량을 들어가는 정화의 의미를 지닌 문이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의 신으로 석가모니께 귀의하여 수미산 중턱의 사방을 지키는 불법의 수호신이 되었다.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박공에는 커다란 풍판을 걸었으며, 건물 내외부에는 단청을 해 장엄을 베풀었다.

도리통 3간, 양통 2간으로 어간은 통로로 개방하고 협간에 방위에 맞춰 사천왕상을 모신 전형적인 사천왕문의 평면형식을 지니고 있다.

개방된 어간을 제외한 부분에는 모두 판벽을 두어 해탈문과 동일한 구성을 하고 있다.

막돌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고, 주심포식으로 주간에는 화반을 사용하였으며, 해탈문에 비해 사용된 살미의 수가 한단 적어 간략화되었다.

앙서 아래 초각을 더하여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초각 형식에서 벗어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보머리는 봉취형으로 초각했다.

무고주 5량으로 방주(方柱) 형식의 동자주를 사용하였고, 동자주 상부는 초익공식으로 꾸몄으며, 대공은 초각한 판대공을 사용하였다.

공포의 형식과 가구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으나 전형적인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의 건물로 보인다.

외부 정면 협간에 걸려 있는 '泰華山麻谷寺天王門重修記'에 1910년에 중수하고 단청도 새로 칠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해탈문과 같은 시기에 중수되었고, 건축형식도 거의 유사하지만 해탈문에 비해서는 좀 늦게 건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상은 소조(塑造)로 화관은 화려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상호는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험상궂은 듯 하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극락교.. 북쪽 영역과 남쪽 영역으로 갈려져 있는 마곡사를 연결해 주는 가교...

범종루(梵鐘樓)..

1996년에 건립한 '十자'형 평면의 건물로 극락교 건너 바로 오른편에 위치한다.

루(樓) 아래는 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어 불교 용품과 서적을 판매하는 매점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루 위에는 사방에 석조 난간을 돌렸고 원형초석을 놓은 위에 기둥을 세워 목조 건물을 올렸다.

내외3출목(내외7포)의 다포식 건축으로 살미의 쇠서는 앙서형으로 길게 뻗어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十자'형 평면의 각 면에 합각부가 돌출해 있으며, 지붕의 정점에는 3단의 석재를 겹쳐 올린 절병통을 두었다.

조선 후기 건축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十자'형의 평면과 그에 따른 지붕형태의 변화, 3출목 공포, 길게 뻗은 살미, 기둥과 창방 사이의

낙양각 등으로 범종각은 변화 있고 화려한 외관을 보여준다..

 

범종루 내부에는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의 사보(四寶)를 두었는데, 모두 근래에 조영된 것이다.

범종은 중앙에 위치하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벌어지다 중간 부분부터 수직으로 내려오고 구연부가 약간 오므라든 종신(鐘身)은

전형적인 한국 종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종신에 '佛紀三0二0甲寅年秋 麻谷寺千佛殿 住持楞嚴'이라고 쓴 명문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범종(梵鐘)은 조석 예불 때 사용되는 의식법구로 범종의 소리는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목어(木魚)는 통나무를 깎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고, 그 속을 파서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데 염불과 독경, 예배 등의 의식을 행할 때 쓴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를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큰 입과 눈, 비늘과 지느러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법고(法鼓)는 종과 함께 중요한 의식법구로 조석예불 때 법도에 맞게 울리는 것으로 축생에게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만끽하도록 한다.

운판(雲版)은 금속판을 편편하게 하여 구름모양으로 만든 운형금속판을 말한다.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조석 예불시에 두들기는 것으로 허공에 떠다니는 중생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한다..

 

대광보전(大光寶殿)..

네모지게 다듬은 자연석을 가지런히 쌓아 한 단의 기단을 축조하고 그 위에 건립한 정면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재 마곡사의 교화(敎化)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북원(北院) 영역의 중심 건물로 앞쪽에 넓은 마당을 둔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자연석을 이용해 막돌허튼층 쌓기로 만든 기단은 나지막한 편으로 도리통 5간의 긴 건물과 함께 수평선이 강조된 형상을 이루며

넓은 마당 뒤편을 편안하게 막아주고 있다. 기단 전면 중앙에는 기단과 동일한 재질의 자연석을 이용해 길게 계단을 설치했다.

기단과 계단은 근래에 들어와 개축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기단 앞에는 오래된 괘불대 지주 하나가 짝을 잃은 상태로 남아 있는데, 상당 부분이 땅에 묻힌 든 노출된 키가 낮다.

그 옆에는 새로 조성한 화강암 재질의 괘불대 지주 한 쌍이 서있다...

 

평면은 도리통 5간, 량통 3간으로 도리통과 양통의 비례가 2.152:1에 이를 정도로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정면에는 5간에는 모두 삼분합문을 달았고, 양 측면 전퇴에는 외짝의 여닫이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후면에는 어간과 양쪽 끝 협간에만 두 짝의 창호를 달았다.

대광보전은 본존상 앞 예불공간을 넓게 확보하고, 다양한 예불의식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고자하는 의도에서 본존을 측면에 위치시키고,

기둥배열에 변화를 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둥은 모두 원주로 막돌초석 위에 세웠다..

 

기둥의 대부분은 원목의 휜 상태를 그대로 활용하였으나 기둥 아래 부분을 윗부분보다 굵게 하는 흘림 수법을 두어 안정적인 형태로

만들고, 귓기둥을 평주에 비해 굵은 것으로 하여 건물의 윤곽을 강조하였다. 추녀 아래에는 추녀를 보강하기 위한 활주를 사용하고 있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공포의 구성과 형식은 조선시대 후기 불전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팔작지붕은 별다른 특성이 없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모습이고, 처마는 네 면 모두 겹처마이며, 합각부는 합각널을 사용해 막았다.

바닥은 전체에 우물마루를 들였고, 마루 위에는 참나무로 만든 삿자리가 깔려 있다.

 

'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에 의하면 조선 1782년(정조 6)에 마곡사에 큰 화재가 발생해 대법당을 비롯한 1,050여 間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 후 霽峰 體奎를 化主로 마곡사의 중창이 시작되었고, 화재가 난 3년후인 1785년(정조9)에 이르러 大法堂의 개건을 시작하여,

1788년(정조12)에 이르러 개건과 불화의 단청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현재 대광보전 안에 보관되고 있는 '永世不忘祝願'와 '忠淸右道公州判地西嶺泰華山麻谷寺大光寶殿重創記' 역시 대광보전이 1785년에

개건되었음을 보여준다. '永世不忘祝願'는 1785년에 관찰사 겸 순찰사인 沈豊이 법당 중건을 위해 시주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작성한

것이며, 법당(法堂)은 곧 대광보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불단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영광 불갑사 대웅전처럼 내부 측면에 위치시켰음이 특징이다.

즉 서향한 대광보전의 동쪽 후벽이 아닌 북쪽 측면에 불단을 두어 본존이 측면인 남쪽을 향하도록 하였다...

 

정면 어간에 걸려 있는 ‘大光寶殿’이라 쓴 현판은 표암(豹菴) 강세황이 쓴 것으로 현판 한쪽 모퉁이에 ‘豹菴’이라 쓴 낙관이 찍혀 있다.

약간 흘림체로 쓴 글씨는 유려하면서 힘이 잇는 모습이다.

강세황은 마곡사에서 멀지 않은 풍세에 그의 鄕邸가 있었으므로 마곡사와 어떠한 인연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정면 기둥에는 '淨極光通達 寂照含虛空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雖見諸根動 要以一機抽'라고 쓴 주련을 걸었다..

 

불단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뒤로는 영상회상탱이 걸려 있다.

존인 비로자나불 좌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양 손을 가슴에 모으고 왼손의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 검지로 덮은 지권인을 하고 있다.

수인(手印)도 오른손 검지가 치켜세운 왼손의 검지를 덮어 누르고 있어 독특하다.

이 비로자나불의 조성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약간 긴 듯한 얼굴과 풍만한 두 볼, 곱게 표현된 양손과 옷자락이

낙산사 보살상, 서산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철불, 청양 장곡사의 금동약사여래상과 같은 고려시대 불상과 유사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반면에 풍만한 두 볼의 모습이 상원사 문수동자상(1446년경)과 유사하며 손 모양은 광덕사 천불전의 비로자나불상(1457년경)과 같다고

보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본존상의 후불벽에는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표현한 영산회상탱을 걸었다.

1788년(정조 12)에 조성된 것으로 결가부좌한 석가불을 중심으로 6대 보살, 10대 제자, 벽지불, 용왕과 용녀, 사천왕 등을 그렸다.

18세기 영산회상도의 전형적인 구도로서 제석과 범천, 팔부중이 생략되어 권속이 적은 편이나 전체적인 구도는 복잡한 편에 속한다.

본존불 위에는 가장 복잡한 구성의 아자형 닫집으로 무려 10출목에 이르는 복잡한 구조의 공포, 허주 끝의 연봉과 연꽃, 머름, 허주와

머름을 연결하는 낙양각의 조각 등은 닫집에 의한 장엄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닫집 안에는 여러 색으로 채색한 구름 무늬 조각과

함께 용을 조각함으로서 불전을 화려하게 장엄하고자 하는 의도를 적극 표현하고 있다..

 

대광보전 중단탱(中壇幀)..

본존을 모신 불단 외에 동남쪽 벽면에는 중단에 해당하는 별도의 불단을 마련하고, 그 후벽에 칠성탱을 걸었다.

칠성탱 하단의 양쪽 끝에 나누어 화기를 적었는데 조선 1910년(순종 4)에 조성한 것으로 가로 304cm, 세로 180cm이다.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그 앞 좌우에 일광과 월광보살을 배치하였다.

다시 그 주변으로 상단의 칠여래(七如來)를 비롯해 칠원성군, 28숙(宿), 판관, 사천왕상 등을 배치하였다.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삼각형 구조가 중복된 구도로 사천왕상의 등장은 조선 말기 도상이 혼란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군청색을 많이 사용하고 녹색과 적색이 탁해졌으며, 필치가 날카롭고 딱딱해지는 등 조선 말기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금어(金魚)로 비구(比丘) 선율, 상열, 약효, 기소, 정민, □호 등이 참여하여 그렸다...

 

중단(中壇)의 칠성탱 옆 간 후벽에는 신중탱이, 다시 그 옆의 측면 벽에는 독성탱이 걸려 있다.

신중탱은 가로 147cm, 세로 167cm로 하단 양측에 나누어 화기(畵記)를 적고 있다.

화기에는 '世尊降生二九五一年甲子七月十七日造成于忠南公州郡寺谷面泰華山麻谷寺奉安于尋劍堂大光寶殿'이라 적혀있다.

1924년에 조성한 것으로 금어(金魚)는 比丘 錦湖堂 若效이다.

금호당은 錦湖-普應-日燮으로 이어지는 마곡사 畵僧의 전통을 잇는 중요한 인물로 영산전에도 1910년에 금호당이 그린 신장탱이 있다..

 

대광보전 수월백의관음벽화(水月白衣觀音壁畵)...

기둥을 비롯해 일부 단청이 벗겨지기는 하였으나 대광보전은 건물 내외 전체에 단청을 하여 화려하게 장엄을 하였다.

특히 내부의 단청은 변색이 거의 없이 단청이 잘 남아 있고, 그 다양하고 화려하게 베푼 단청의 무늬는 남방화소라 불리는 마곡사의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전통은 특히 벽면 곳곳에 그려진 벽화에서 잘 나타난다.

일부 지워진 것도 있으나 외벽과 내부 벽 곳곳에는 사천왕과 16나한을 비롯한 인물화와 산수화 등 뛰어난 그림이 남아있다.

특히 후불벽 뒤편의 수월백의관음보살도는 18세기 후반 조선 회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 벽화의 관음보살은 기암괴석 위에 흰 사라와 백의를 입고 안락좌로 앉아 있으며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향하여 합장하고 있다..

 

동종(銅鐘)은 전체 높이 107cm, 종신(鐘身)의 높이 80cm로 크지 않은 종으로 원래 심검당 툇마루에 있었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종신에 “順治十一年甲午春忠淸道安興地獅子山安谷寺大鐘造成”이라는 명문이 있어서 효종 5년에 지금은 폐사가 된 충청도 안곡사에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종의 주조에는 보언, 법현, 민화, 조법 등의 주조장이 참여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종신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넓어지다 중간부터 수직으로 내려오는 한국 종의 전통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종신 상부에는 두 줄로 격자무늬 띠를 두고 각 격자 속에 원을 그린 다음 범어를 새겼으며, 범어 띠 아래 네 곳에 유곽을 두었다.

유곽은 종신의 형태에 따라 사다리꼴을 이루며, 속에 9개의 유두를 돋을새김 했다. 유곽 사이에는 상하로 두광을 지닌 보살상을 새겼다.

구연부에는 연꼿과 보상화를 섞은 덩굴무늬 띠를 돌렸고, 용뉴는 두마리 용으로 이루어졌는데 섬세한 조각으로 이루어졌다. 음통은 없다.

 

5층석탑(五層石塔)..

대광보전 앞마당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이 탑은 고려 말에 원나라를 통해 유입된 라마교탑의 영향을 받은 청동제 상륜부를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 중에는 특이한 조형을 이루고 있다.

기단부는 폭에 비해 높이가 높고, 1층 탑신부의 폭을 기단에 비해 약간 줄이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체감은 매우 적은 편이다.

전체적으로 삼국시대 이래 한국 석탑의 전통과 백제적인 지방색, 그리고 원나라와의 교류 관계 등, 고려시대 말기 석탑의 여러가지

새로운 경향 중의 한 특색을 보여주는 석탑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석탑 안의 유물은 도난을 당하였으며, 1972년 해체수리를 하면서 동제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된 바 있다.

1984년에 보물 제799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탑의 전체 높이는 8.67m이고 청석(靑石)을 이용해 만들었다.

2층의 기단, 5층의 탑신, 그리고 청동제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중층의 불전으로 대광보전의 뒤쪽, 산 위의 비탈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축대 위에 만들어진 앞마당은 매우 좁은 편이다.

내부는 상하층이 통해 하층은 도리통 5간, 양통 4간인데 반해 상층은 도리통과 양통을 줄여 도리통 3간, 양통 3간으로 구성하였다.

하층은 전면 중앙 3간에 3분합, 양쪽 끝 협간에 두짝의 문을 두었으며, 양 측면 전퇴에 외짝문, 후면의 중앙 3간에 각 두짝의 창을 달았다.

상층에는 전면에만 교살 형식의 광창(光窓)을 달아 채광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나머지는 모두 판벽을 설치했다.

하층 내부에는 후면의 고주열에 의지하여 3간 길이로 불단을 마련하였다. 공포는 모두 내외3출목(내외7포)의 다포식으로 동일 구조이다.

기둥은 모두 원주로 외부의 기둥은 비교적 반듯한 부재를 사용하고 있으나 내부의 고주들은 휜 부재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특히 하층에 사용된 2개의 대들보를 비롯해 상층에 사용된 보도 휜 부재를 활용하고 있다.

휜 부재를 적절히 활용하는 조선 후기 건축의 일반적인 모습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이며, 상층은 팔작지붕이며, 하층의 추녀는 그 끝을 강한 곡선으로 조각을 했다.

기와는 특별한 장식용 기와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범자를 새겨 장식한 암막새와 숫막새를 사용했으나 모두 최근에 교체된 것들이다.

바닥 전체에는 우물마루를, 하층 천장은 공포 사이에 순각판을 들인 외에 양 측면 대들보와 공포대 사이 좁은 공간에 우물천장을 들였다.

상층은 대들보 옆면에 의지해 전체에 우물천장을 들였다. 다만 중앙부의 우물천장은 양쪽과 달리 조각한 소란대를 더해 장엄을 더한다.

건물 내외는 전체에 단청을 베풀었으며, 내부의 단청은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외부의 단청은 1985년에 새로 칠한 것이다.

정면의 중앙 세 간에 설치한 삼분합문은 아래에 궁창부를 두고 그 위를 띠살로 구성하였다.

사찰 정면의 창호에 띠살을 들인 예는 많지 않은 편인데, 후대의 개조일 가능성도 있다.

양쪽 끝 협간에는 두짝의 여닫이문을 들였는데 기본적으로는 중앙부의 창호와 같은 형식이나 정자살을 들였음이 다를 뿐이다...

 

건축양식은 조선후기에 속하나 조선후기의 전형적 특성이 발현되기 전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므로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웅보전에 대한 기록이 적어 그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1851년)을 비롯해 현재 내부에

걸려 있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記文을 통해 대웅보전의 연혁을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康熙九年庚戌六月初一日 公山地華山麻谷寺二層大藏殿丹靑記' : 1670년(현종 11)

'忠淸右道公州泰華山麻谷寺大雄殿懸板' 聖上卽祚16年 歲次 己卯正月15日 : 1879년(고종 16)

기문 중 먼저 주목되는 것은 1670년(현종 11)에 쓴 '공산지화산마곡사이층대장전단청기'이다.

건물명이 대장전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분명하게 2층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670년에 이 건물을 단청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 기문이 대웅보전에 보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웅보전은 원래 대장전으로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1670년에 단청을 하였으므로

그 이전부터 존속했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마곡사는 1650년부터 각순에 의한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사격을 갖추었고, 1782년9월6일 발생한

대화재로 법당을 비롯한 1,050여 간의 건물이 소실되어 1785~1788년에 걸쳐 법당, 즉 현재의 대광보전이 중건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대장전은 1650년 각순에 의한 중창 불사로 조영된 후 1782년의 화재 때 대장전은 소실되지 않았고

임시로 법당으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다.

1985년 해체공사 중 ‘康熙二年 癸丑 五月’(1663년), ‘康熙三十四年 乙亥’((1695년), ‘乾隆二十七年 壬午’(1762년) 등의 명문이 적힌 기와가

확인된 점 역시 이 건물이 1782년 대화재에 소실되지 않고 유지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건축양식과 기록 등에 의해 현재의 대웅보전은 1650년 이후 각순의 마곡사 중창불사에 의해 대장전으로 조영된 후 1782년 대화재로

법당이 소실되자 임시 법당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법당, 즉 대광보전의 중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불전으로서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831년에 아래층 중수가 있었으나 언제부터 대웅보전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879년(고종 16)의 '충청우도공주태화산마곡사대웅전현판'에 따르면 적어도 이때부터는 대웅보전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상층 어간에는 ‘大雄寶殿’이라 쓴 현판이 있는데, 신라의 명필 金生이 쓴 글씨로 전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하층 전면 기둥에는 오언절구의 柱聯이 있다. 古佛未生前 / 凝然一相圓 / 釋迦猶未會 / 迦葉豈能傳 / 本來非?白 / 無短亦無長

내부 고주와 포벽 등에는 ‘道善居士兩主過去’ ‘高柱施主許成□’ 등 많은 명문이 있으나 시주자의 명단인 경우도 있고 낙서도 많다..

불단은 하층의 후면 고주열에 의지해 불벽을 구성하고 그 앞에 세 간에 걸쳐 설치했다.

수미단은 높이가 낮은 편이며, 받침부 위에 세 단으로 구성하고 있다.

맨 아래 층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위 두 단에는 각각 꽃을 형상화한 무늬를 조각했다.

본존으로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을 모셨다. 모두 목조좌대위에 모셨으며, 목조좌상으로 금칠을 하였다...

 

삼불(三佛) 뒤에는 후불탱으로 각각 가로 156cm, 세로 270cm 크기의 3폭으로 이루어진 삼세불화를 걸었다.

모두 본존을 중심으로 한 동일한 구도로 석가불화를 중심으로 양쪽의 약사와 아미타불화에 사천왕과 팔부중을 나누어 배치하였고,

각 불화에 협시불이 그려지지 않았으며, 중앙의 석가불화는 8대보살과 벽지불, 10대제자, 제석과 범천, 2신중, 2동자로 구성되었다.

좌측의 약사불화는 약사여래좌상을 중심으로 6대보살, 벽지불, 10대제자, 제석과 범천, 2천왕, 용왕과 용녀, 아자타삿투 왕과 베데히 왕비,

4구의 동자와 동녀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아미타불화는 6대보살, 벽지불, 10대제자, 제석과 범천, 2천왕, 2신중, 2동자로 구성되어 있다.

석가불화와 아미타불화는 하단 양쪽에, 약사불화는 하단 중앙에 각각 화기가 있다.

조선 1905년(광무 9)에 조성된 것으로 정연, 성주, 상현, 유연, 성엽 등의 금어(金魚)가 참여해 그렸다.. 

 

본존을 모신 불단과는 별도로 남쪽 측면 벽에 의지해 중단(中壇)을 마련하고 신장탱을 걸었다.

하단 중앙에 “隆熙四年庚戌六月日新造成神將幀奉安于忠淸南道公州郡泰華山麻谷寺大雄殿……”이라 쓴 화기가 있다.

1910년에 봉주를 비롯해 성주, 봉종, 대흥 등의 승려가 참여해 그린 것이다.

가로 270cm, 세로 156cm 크기로 중앙에 깃털 달린 투구를 쓴 위태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석과 범천을, 주변에 권속을 배치하였다.

획일화된 배치와 인물들의 경직된 표정, 탁한 황토색과 양록색, 군청색의 색채 사용 등에서 조선 말기 불화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 북쪽 측벽에도 별도의 불단을 마련하고 산신탱을 걸었으나 모두 최근에 모신 것이다...

 

대웅보전 바로 옆의 아담한 대향각.. 스님들이 참선하는 선원..

 

대웅보전은 대광보전 옆을 돌아 높은 계단을 올라 다다르게 된다. 정면이 아닌 약간 측면에서 돌아 오르도록 되어 있으므로

대웅보전 앞마당은 좁지만 계단을 오르고, 약간 측면에서 진입하는 과정에서 중층의 건물 전체를 인식할 수 있다.

정면 중앙에 기단과 동일한 재질의 석재로 계단을 만들었다..

 

응진전(應眞殿)..

대광보전 앞마당의 북쪽 끝에 자연석을 이용한 외벌대의 나지막한 기단 위에 도리통 3간, 양통 2간 평면을 지닌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정면에는 어간에 삼분합, 양 협간에 쌍여닫이창을 달았고, 양 측면과 후면은 모두 심벽구조의 회벽으로 막았다.

내부에는 후면과 양 측면 벽에 의지해 'ㄷ자'형의 불단을 두고 석가여래와 나한상을 모셨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모든 주간에 하나씩의 주간포를 두었다. 공포는 외1출목(외3포)으로 내부로는 출목을 두지 않았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내부 바닥에는 전체에 우물마루를 들였고, 천장은 전체에 우물천장을 들였는데 중앙부를 주변에 비해 한 단 높게

만들었으며, 단차를 이용해 주변부 천장의 측면에 창을 달아 수납공간으로 활용하였음이 특징이다.

어간의 창호는 삼분합으로 아래에 궁창부 한 단을 두고 그 상부는 중앙의 것에 교살, 양쪽의 것에 띠살을 구성했다.

양 협간의 창호는 띠살의 쌍여닫이창으로 협간의 중앙이 아닌 어간 쪽으로 치우쳐 창호를 두고 바깥 쪽 여분의 공간은 판벽을 베풀었다.

건물 내외에는 단청을 베풀었으나 외부 단청은 최근에 들어와 새로 칠한 것이다.

정면 기둥에는 '塵點劫前早成佛 爲度衆生現世間 嵬嵬眞相月輪滿 於三界中作導師'라고 쓴 칠언절구의 주련을 걸었다.

응진전은 작은 규모의 전각으로 공포와 창호 및 천장의 구성 등에서 조선시대 말기의 건축적 특성을 보여준다.

현재 전각 안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記文이 걸려 있다.

① '麻谷寺應眞殿新佛粮施主芳名錄' 道光 26年 丙午(憲宗12, 1846年) 2月日

② '公州泰華山麻谷寺羅漢殿重建記' 咸豊 2年 壬子(哲宗3, 1852年)

'공주태화산마곡사나한전중건기'에는 건물이 오래되어 퇴락함에 따라 중건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건축양식과 이 기문으로 보아 현재의 응진전은 1846년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내부의 불단에는 어간 후벽에 의지해 중앙에 석가여래좌상을 모셨다.

수미좌 형식의 대좌 위에 모셔졌으며, 결가부좌한 채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석가여래 좌우에는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의 가섭과 아난 좌상을 협시로 모셨다. 그 바깥으로 좌우에 8軀 씩 16나한을 모셨다.

16나한은 웃고, 울고, 고뇌하는 등 다양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16나한상 바깥 쪽에는 좌우에 각 1구씩 나누어 법천과 제석천을 모셨다..

 

응진전 안에 걸려 있는 마곡사응진전신불량시주방명록으로 미루어 조선 1846년(헌종 12)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마곡사 조사전(祖師殿)..

응진전 영역의 뒤편 산 위로 올라간 곳에 별도로 조성된 대지 위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정면 3간에만 띠살의 쌍여닫이문을 단 감실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초석은 운두가 높은 잘 다듬은 원형초석을 사용하고 있어 건물과 어울리지 않으며, 원주를 사용하고 있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원래는 서쪽의 1간을 온돌방으로 꾸몄었으나 현재는 내부 바닥 전체에 우물마루를 깔았다.

천장은 전체에 우물천장을 들였는데, 격자의 간격이 매우 큰 편에 속한다..

 

내부에는 개산조 자장율사, 그 옆에 범일과 도선국사 등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백범당으로 불리는 백범 김구선생이 은거하면서 수행하던 곳..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내가 오늘 가는 이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백범 김구선생의 은거 기념식수...

연화당(蓮花堂)..

심검당 동쪽 개울가에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최근에 신축한 건물로 정면 11간의 긴 건물이다.

주간을 넓게 설정했고 기둥의 높이도 매우 높은 편이어서 매우 시원스럽고 장대한 느낌을 주는 최근 불사의 경향을 반영한 건물이다.

공포는 주심포식으로 주간에 화반을 사용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신검당과 고방(尋劍堂과 庫房)..

대광보전 앞마당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ㄷ자'형 평면의 요사로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대광보전의 노전이면서 대방의 역할을 한다..

 '一자'형의 평면을 이루면서 대방이 있고, 대방의 전면, 즉 대광보전 앞마당 쪽에는 툇마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툇마루를 없앴다.

대방 북쪽에는 불단을 조성하고 불화를 모신 1간의 인법당(因法堂)이 있으며, 남쪽 끝에는 넓은 부엌을 두었다.

이 '一자'형의 건물 동편으로 남쪽과 북쪽에 각각 익사를 두어 전체가 'ㄷ자'형을 이루도록 했다.

마당 쪽 정면만 몰익공식의 초각을 한 초익공식으로 하여 격을 높였고, 나머지 부분은 민도리집 구조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북쪽 익사 끝은 맞배, 남쪽 익사 끝은 팔작지붕으로 처리했다...

마당 쪽 전면에 ‘泰華山麻谷寺’, ‘麻谷寺’, ‘尋劍堂’이라 쓴 세 개의 현판이 있다. ‘尋劍堂’이라 쓴 현판은 정조 연간에 청백리로 유명했던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이 쓴 것이며, ‘麻谷寺’라 쓴 현판은 근대의 서화가인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이 쓴 것이다.

심검당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으나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다. 다만 '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에 1797년(정조 21)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심검당 안에 걸린 記文 편액에 1856(철종 7) 2월에 중수된 사실과 1909년에 번와공사가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심검당 북쪽 뒤편으로는 담장으로 구획된 영역 속에 누각 형식의 고방이 있다.

누마루 위에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누 아래까지 막아 창고로 사용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정면 4간, 측면 1간 규모의 민도리집으로 홑처마에 맞배기와지붕이며, 박공부는 풍판을 달지 않고 개방시켜 가구가 노출되도록 하였다.심검당 북편에는 굴뚝이 있는데 흙과 기와를 쌓아 만들었는데 매우 큰 규모로 아래에 비해 상부를 많이 줄였고, 기와지붕을 올렸다.

굴뚝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크고 대담한 조형으로 마곡사 요사 영역 조형의 특성을 이루고 있다.

북쪽 편에 장독대가 있고 양 익사에는 각각 크고 작은 방을 두었다..

 

조사당 옆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별도의 영역에 최근에 지은 성보박물관이 있다..

 

성보박물관 건너편으로는 나무데크 옆 삭발바위..

 

백범 김구선생의 삭발터이다..

 

명부전(冥府殿)..

원통전을 중심으로 하는 수행 영역인 남원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명부전의 성격상 교화영역에 포함되어야 할 건물이나 이 건물을 지을 당시 북원영역에 마땅한 터가 없었는지 북원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명부전 주변으로 담장이 있는데, 원통전을 중심으로 하는 영역과는 별도로 담장 북쪽이 열려 있어서 명부전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기단은 작은 크기의 막돌을 이용해 쌓았고,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2간으로 조선 후기 명부전의 일반적인 규모를 따르고 있다.

정면 3간은 모두 띠살의 삼분합문을 달았으며, 양 측면과 후면에는 벽을 쳐서 감실형의 평면을 만들었다.

주간포는 주심포에서 초익공이 생략된 모습으로 조선 말기인 19세기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익공식과 다포식이 혼합된 공포 구성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처마의 반곡이 강한 편에 속하며, 합각부는 매우 작은 편이며, 용마룰 양쪽 끝에는 용두(龍頭)를 두었다.

바닥에는 전체에 장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중앙부만 우물천장을 설치하고 주변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으로 만들었다.

건물 내외에 단청을 베풀었으나 탈락이 심한 편이며, 채색과 무늬는 옹색한 모습이다. 정면 어간에는 ‘冥府殿’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고,

기둥에는 “地藏大聖誓願力 / 葉盡衆生放及間 / 十殿照律地獄空 / 恒沙衆生宏昔海”라고 쓴 주련을 걸었다.

전체적 건축양식은 조선말기 이후의 수법을 보이며, 장마루는 20세기에 들어와 외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많이 들이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건물 내부에 '명부전창건기'편액이 걸려 있는데, 소화14년, 즉 1939년에 창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부에는 후면과 양 측면 벽에 의지해 'ㄷ자'형으로 불단을 만들고 지장보살을 비롯한 시왕상을 모셨다.

후벽 중앙에 수미좌 형식의 좌대를 위에 결가부좌한 지장보살상(목조)을 모시고 그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입상을 협시로 모셨다..

 

그 좌우에는 다시 시왕상을 나누어 모시고, 그 바깥 쪽에 판관과 녹사, 금강역사상을 모셨다.

지장보살상을 비롯한 시왕상 뒤 벽면에는 지장보살도를 비롯해 각 시왕에 해당하는 불화를 걸었다

명부전 앞에 위치한 매화당(梅花堂)..

스님들의 요사 겸 수행공간으로 사용하는 건물로 영산전 앞마당을 등지고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앞마당에 면해 5간 규모의 대방을 두었고, 그 앞쪽 영산전 앞마당 쪽에 툇마루를 두었다.

대방 북쪽으로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익사를 두고 여기에 작은 방들을 배열하여 스님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굵은 원주를 사용하였으며, 이익공식으로 초익공은 앙서형의 쇠서 위에 연화를, 이익공은 복잡한 형태의 앙서형을 초각했다.

영산전 앞마당 쪽 대방이 있는 부분은 팔작지붕이며, 익사 끝은 맞배지붕으로 하고 박공에 풍판을 달았다.

영산전 앞마당에 면한 전면에는 ‘梅花堂’이라 쓴 현판이 있고 그 한편에 ‘佛紀二五二八年 友松 閔孝植 書刻’이라 새겨져 있다..

영산전(靈山殿)

마곡천 남쪽, 수행 영역의 중심 불전으로 동쪽으로 비탈진 지형에 맞추어 동향을 하고 있다.

현재는 영산전의 기둥이상 해체보수공사 중이다..

정면 어간의 현판은 세조가 1465년에서 1487년 사이에 마곡사에 들렀다가 내린 친필이라 한다.

‘靈山殿’이라 쓴 현판 한쪽에는 ‘세조대왕어필’이라 쓴 방서가 있다.

곡루에는 세조가 마곡사에 올 때 타고 왔던 세조대왕연(충남 민속자료 14호)이 보관되어 세조가 마곡사에 들렀던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 연은 세조가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고자 마곡사에 왔다가 매월당이 없자 ‘김시습이 나를 버렸으니 가마를 타고 갈 수 없다.’고 하여

두고 간 것이라 한다. 그러나 글씨체가 17세기 궁궐과 사찰의 편액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힘 있고 반듯하게 쓰인 것으로 보아 영산전을

중건할 당시인 1650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흥성루(興聖樓)..

담장으로 구획된 남원의 중심건물인 영산전 앞마당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물이다.

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로 누각 형식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나 영산전 앞마당이 비교적 평지에 가까운 지형이고 그 앞의 한 단 낮게

조성된 대지는 해탈문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해당하므로 단층 형식으로 지었다.

정면 5간, 측면 3간의 초익공식 맞배지붕 건물로 영산전 쪽 마당을 향해 개방시켰고, 전면에는 5간 모두 두짝의 판문과 회벽으로 막았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흥성루는 조선시대 후기 1844년(헌종 10)에 중수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흥성루는 18세기말이나 19세기 초에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의 보수로 인해 기둥과 보 등 많은 부재들이 반듯한

형상으로 변형되는 등 원형이 상당히 바뀌어 고풍스러운 맛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