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기행] 순창 강천산 강천사(剛泉寺)와 삼인대(三印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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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기행] 순창 강천산 강천사(剛泉寺)와 삼인대(三印臺)..

by 정산 돌구름 2012. 7. 15.
[순창기행] 순창 강천산 강천사(剛泉寺)와 삼인대(三印臺)..

 

탐방일 : 2012년 7월 15일

소재지 : 전북 순창군 팔덕면 쌍계리

강천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로 신라 진성여왕1년(887년)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혹은 조선 성종13년(1482년)에 작성된 『강천사모연문』에 보면 신령(信靈)이 광덕산(廣德山) 가운데서 명승지를 골라 초암을 짓고

  지낸 것에서부터 유래한다고 나와 있다.

  중숙왕3년(1316년) 덕현(德賢)이 5층석탑과 12개 암자를 창건하여 사세를 확장하였으며, 성종13년(1482년) 중조(中照)가 신말주의

  부인 설씨의 시주를 얻어 중창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이 절과 12개의 부속암자가 전소되었으며, 선조 37년(1604년) 태능(太能)이

  중창하여 강천사만은 이전의 면모를 갖추었다.

  1855년 금용당(金容堂)이 중창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보광전(普光殿)·첨성각(瞻星閣)·칠성각의 당우들이 불타버렸다.

  그후 주지 김장엽이 1959년에 첨성각을, 1977년 관음전을, 그리고 이듬해 보광전을 신축한 뒤 비구니의 수도도량으로 전승되고 있다.

  1992년 보광전을 대웅전으로 바꾸었고, 1997년 첨성각을 헐고 복원하였다.

  역사적으로 이 절에는 비구승보다 비구니들이 많이 머물렀는데, 그 까닭은 창건자 도선이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이 있어야 빈찰

  (貧刹)이 부찰(富刹)로 바뀌고 도량이 정화된다.”고 한 예언에 따라 절을 유지하여 왔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에 있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92호인 오층석탑과 금강문(金剛門), 전북 유형문화재 제27호인 삼인대

  (三印臺) 등이 있으며, 오층석탑은 1316년(충숙왕 3) 덕현이 중창할 때 건립한 탑이다.

  이 탑 북쪽 약 1m 지점에는 중대석(中臺石)과 보주(寶珠)만이 남아 있는 석등이다.

  금강문은 1316년 덕현이 절 주위의 풍치가 금강산과 비슷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전한다.

  자연암석으로 된 사각문으로 높이 8m, 너비 4m이다.

  또한, 이 절에는 천년 묵은 지네가 인간으로 변신하려다가 법당에서 피우는 향내음이 너무 독해서 인간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앙갚음으로 요괴가 되어 매일 밤 승려 한 사람씩을 죽였다는 전설과 거지, 승려, 그리고 돈에 얽힌 전설 등이 전해진다.

 

 

강천사 일주문인 강천문..

 

대웅전은 1961년에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 위에 팔작지붕으로 만든 목조건물이다.

원형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을 하고 있으며 주심포형식으로 세웠다.

편액에는 ‘대웅전’이라 써 있으며, 주련은 3기가 걸려 있다..

 

내외부에는 단청이 칠해져 있고, 외부 벽화에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내부의 천장은 목조 구조가 들어나 보이는 연등천장이고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창호는 교살창이며 중앙칸은 3분합이고 좌우의 협칸은 각각 2분합으로 되어 있다. 

닫집은 조성되어 있지 않고 수미단 위에 석가삼존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불상은 석가삼존불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고, 좌우의 협시보살은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다.

두 보살상의 지물은 지장보살상이 육환장을 들고 있으며, 관음보살상이 연꽃봉오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불화는 석가삼존불좌상의 뒤쪽에 후불탱이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로는 지장시왕탱, 산신탱, 칠성탱, 신중탱이 모셔져 있다.

내부의 의식구로는 범종과 법고가 모셔져 있다..

 

석가삼존불, 그리고 영산후불탱을 비롯해서...

 

지장탱·산신탱(1993년), 칠성탱, 신중탱(1962년) 및 범종 2구가 있다. 다른 사찰과는 다르게 아미타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강천사오층석탑..

전북 유형문화재 제92호로서 1316년(충숙왕 3)에 덕현(德玄) 스님이 세운 것이다.

후보(候補)한 방형의 대석 위에 초층 탑신을 직접 세운 석탑으로,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초층 탑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었고 그 위에는 왼쪽 부분이 심하게 파손된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옥개석은 상당히 높은 3단의 층급받침을 갖추고 있고, 처마는 직각을 이루며 옥개석의 윗면에는 1단의 낮은 탑신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2층과 3층 탑신도 우주가 모각되었지만 초층 탑신에 비해 급격히 축약된 모습이다.

층급받침 역시 3단으로 구성되었지만 1층의 그것보다 더 높고, 옥개석 상부에는 1단의 탑신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4층 탑신석은 3층 탑신석에 비해 높고 우주가 모각되지 않았으므로 또 왼쪽 부분이 治石되지 않은 점에서 후보된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는 현재 노반이 결실된 채 복발과 보륜이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이 석탑은 현재 원형을 잃었지만 원래는 5층이었고,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었으며, 옥개석에 높은 3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또 초층에 비해 2층 이상이 급격히 축약하는 점 등에서

신라 일반형 석탑 양식을 기본으로 부분적으로 백제 석탑 양식을 반영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괘불대에 괘불을 걸어 꽂아두는 것이 괘불석주인데,  2개의 돌덩이가 한조로 나란히 두 조가 있다.

석탑이 있는 대웅전 앞마당에는 명문이 새겨진 괘불대 3기가 있는데, 이 가운데 하나에는‘ 乾隆八歲十五’로 되어 있어

1700년대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심우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이고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선방으로서 앞마루를 덧내었고, 덤벙주초 위에 원형기둥을 하고 있으며 주심포 형식의 목조건물이다.

편액은 ‘심우당’이고, 주련은 없으며, 외부에 단청을 칠하고 있다..

 

세심당(洗心堂)

1975년에 건립한 건물로서, 정면과 측면 각3칸의 풍판을 단 맞배지붕으로, 원형 주초 위에 원형 기둥을 받치고 주심포 형식을 하고 있다.

편액은 ‘세심당’이라 붙어 있으며, 주련은 걸려 있지 않고 단청이 칠해져 있다..

 

 

 

순창 삼인대(三印臺)..

1973년6월23일 전북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강천사(剛泉寺) 앞 내를 건너 남쪽에 있는 정면 1칸의 비각이다...

 

비각 안에는 높이 157㎝, 너비 80㎝, 두께 23㎝의 삼인대 비(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영조20년(1744년) 4월에 세운 것으로 홍여통(洪汝通), 윤행겸(尹行謙), 유춘항(遊春恒) 등 군의 선비들이 발기하여 대학자인

이재 (李縡)가 비문을 짓고, 민우수(閔遇洙)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가 전서(篆書)를 썼다...

 

연산군12년(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한 후 중종반정을 주도하고 성공한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신수근 일파가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하고, 이어 신수근의 딸 신씨를 폐비시키고 윤여필의 딸인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새 왕비 장경왕후는 왕후가 된 지 10년 만에 사망하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유옥(柳沃) 등 세 사람이 비밀리에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 이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삼인대는 지난 1963·1977·1987·1991년에 보수(단청)하고 주변에 철책을 세워 보호·관리하고 있으며

1978년에는 삼인대 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 음각하여 비각 옆에 새로운 비석을 세웠다.

1994년 지역의 향토인과 후손들에 의해 삼인문화선양회가 구성되어 1995년부터 매년 8월 삼인문화축제를 이곳에서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