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기행] 구산선문의 으뜸, 천년고찰 지리산 실상사(實相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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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기행] 구산선문의 으뜸, 천년고찰 지리산 실상사(實相寺)

by 정산 돌구름 2011. 8. 14.
천년고찰 지리산 실상사(實相寺)..

 

탐방일 : 2011년 8월 13일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입석리

실상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창건은 통일신라 흥덕왕3년(828)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데서 비롯된다.

  선종(禪宗)이 처음 전래된 것은 신라 제36대 혜공왕(惠恭王) 때인데, 발전을 못하다가 도의(道義)와 함께 입당(入唐), 수학하고 귀국한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이 흥덕왕의 초청으로 법을 강론함으로써 구산선문 중 으뜸 사찰로 발전하였다.

  도의는 장흥 가지산(迦智山)에 들어가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곳에 실상사를 세워 많은 제자를 배출, 전국에 포교하였는데

  이들을 실상사파(實相寺派)라 불렀다. 그의 제자로 수철(秀澈), 편운(片雲) 두 대사가 나와 더욱 이 종산(宗山)을 크게 번창시켰다.

  그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어 약200년 동안 승려들은 부속암자인 백장암(百丈庵)에서 기거하다가, 조선 숙종 때에 이르러 300여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숙종26년(1700) 침허조사에 의해 중창 36동의 웅장한 규모의 건물을 세웠다

  당시에는 대적광전, 약사전, 무생전, 십불전, 오백전, 장육전, 원통전, 미타전, 적묵전, 미륵전, 명부전, 만화당, 현묘당, 청심당, 보응당,

  자운당, 탐진당, 정성당, 금당, 향로각, 대동고, 환재각, 종각, 향적소, 만세루, 능허각, 불이문, 천왕문, 해탈문, 조계문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전각과 누각이 고종20년(1883) 스님들을 몰아내고 실상사의 너른 땅을 차지하려 했던 양재묵 일당의 방화로 인해

  대부분 불타고 요사 1채와 전각 3동만이 남았다. 그때 불탄 대적광전은 단층 건물로는 조선에서 제일이라고 부르던 건물이었다 한다.

  웅장했던 실상사 규모를 보여주는 한 예로서 목탑지를 들 수 있다.

  실상사 목탑지는 천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평지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주춧돌이 남아 있는 상태로 보아 규모는 경주 황룡사지의 9층탑지보다 조금 작았던 듯하다.

  건물지의 위치와 심초석이 안치된 방법, 자연석인 초석 등을 종합해보면 원래의 가람과는 별도로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에 장육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실상사에는 보광전, 약사전, 명부전, 극락전, 칠성각, 종각, 천왕문, 화엄학림 학사와 강당, 요사채, 해우소 등의 건물이 있다.

  국보로는 백장암 삼층석탑(제10호)이 있고, 보물은 수철화상능가보월탑(제33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제34호), 실상사 석등(제35호),

  실상사 부도(제36호), 실상사 3층석탑 2기(제37호), 증각대사응료탑(제38호), 증각대사응료탑비(제39호), 백장암 석등(제40호),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제41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제420호), 실상사 약수암 목각탱(제421호)가 있다.

  실상사 위토개량성책은 전북 유형문화재 제88호, 상원주장군 석장승은 민속자료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광전(寶光殿)..

정면과 측면 각3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고종21년(1884)에 월송(月松)스님이 본래의 넓은 금당터 기단 위에 다시 작은 기단을 세웠다.

보광전 주변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본래의 금당이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아미타삼존상과 1981년에 조성한 신중탱, 산신탱과 전북유형문화재 제137호인 실상사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상 중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과 대세지 두 보살입상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 왔다고도 한다.

좌우의 보살입상은 종이로 만들어진 지불(紙佛)로 보살상 1구가 과거 분실되어 남은 1구를 대칭적으로 복원하여 모신 것이다..

 

석등(石燈)..

현재 보물 제3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보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석등으로 높이가 5m나 된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 받침돌과 위 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 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 모양 조각을 얹었으며,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 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현재 보물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는 3층석탑...

보광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두 탑의 수법과 규모는 거의 동일하다.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부가 있으며, 높이는 8.4m이다.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밑면의 받침은 4단이며, 살짝 위로 들려진 네 귀퉁이는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숙종10년(1684) 계오대사(戒悟大師)에 의해 부도전으로 지은 것이다.

정조12년(1788)에 금파 관오대사(錦波寬旿大師)가 중수하였고 이후 1832년에 의암대사가 기봉(奇峰),처윤(處允)스님과 함께 중건하면서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전북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부에는 지불(紙佛)인 아미타여래좌상과 1985년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883년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았던 유일한 건물이다.

정면에는 가늘고 기교를 부려서 전서(篆書)로 쓴 ‘약사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특히 중앙의 꽃문살은 부분적으로 떨어지기는 했으나 채색이 아직도 아름다운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내부에는 창건 당시인 9세기 중엽에 조성된 철제약사여래좌상(보물 제41호)과 1882년 월송(月松)스님이 화주를 하여 조성한

약사후불탱, 1988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

현재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는 철불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 역시 당시의 불상양식을 잘 표현

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고, 정수리 위에는 상투모양의 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귀는 긴 편이며, 목의 삼도(三道)는 겨우 보일 듯이 표현되고 있다. 좁아진 이마, 초승달 모양의 바로 뜬 눈, 다문 입 등의 근엄한 묘사는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도 볼륨감 있게 처리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며, 양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옷 역시 아래로 내려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준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짧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옷주름 표현기법으로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현재의 두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워 넣은 것으로, 1987년 복원할 때 나온 철제 손과 같은 모양이다.

대좌는 흙으로 만들었으나 허물어진 곳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다.

이 불상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작품이라는데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현재 보물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성각은 정면1칸, 측면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32년 남성법(南性法) 스님이 세운 것이다.

정면에는 거암(居巖) 김봉관(金奉官)의 글씨로 ‘칠성각’ 편액을 달았으며, 내부에는 1981년에 조성한 칠성탱을 봉안하였다...

 

명부전은 정면과 측면 각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장육전 동쪽에 있던 길선당의 옛터에 건립된 것을 순조 21년(18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판관상, 인왕상의 명부 권속이 봉안되어 있고,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 조성한 지장시왕탱이 모셔져 있다...

 

옛기와탑(古瓦塔)은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개창한 유서깊은 사찰인 실상사에서 출토된 기와들을 쌓아 놓은 것이다.

실상사가 창건된 당시의 모습과 변천과정을 밝히기 위해 1996년부터 2005년까지 국립무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조선시대 기와들을 모아 이 탑을 만들었다.

범종각(梵鐘閣)정면과 측면 각1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로 1991년에 건립한 것이다.

종각 내부에는 1991년에 조성한 ‘지리산실상사호국범종(智異山實相寺護國梵鐘)’이 걸려 있다.

1967년 실상사에서 파손된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을 발견하였는데, 현재 범종각이 서 있는 자리가 그곳이다.

파손된 범종은 현재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범종각에 봉안된 범종은 이 종을 모델로 하여 새로 조성한 것이다..

 

수철화상능가보월탑(秀澈和尙楞伽寶月塔)..

높이 3m의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1963년1월21일 보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실상사의 제2대 조사인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이다.

신라 진성여왕 7년(893) 입적하였으며,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리었다.

8각 원당을 기본형으로 한 전형적인 묘탑으로 사각 지대석(地臺石)이 지면에 놓이고 그 위에 하대석(下臺石)은 8각으로 3단을 이루었다.

중대석에는 각 우각에 주형이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상대석은 상하 2단인데 하단은 앙련석이고 상단은 특히 높은 탑신 받침이다.

탑신은 낮은 편으로 우주형이 모각된 상면에는 목조건축의 첨차를 조각하였고, 신부 각면에는 문비형(門扉形)과 사천왕(四天王) 입상이

각각 양각되었는데 특히 문비형은 상부가 반원형을 이룬 점이 특이하다.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은 추녀 밑의 반곡(反曲)이 심하고 옥상에는 기와골이 있으나 귀꽃은 없다.

상륜(相輪)은 옥개 정상에 꽃무늬가 조각된 편구형(扁球形) 이륜(二輪)을 얹고 그 위에 보주(寶珠)를 놓았다...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秀澈和尙楞伽寶月塔碑)...

수철화상(秀澈和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어

그 위로 비를 세웠다. 비를 꽂아두는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에 용 두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면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楞伽寶月塔碑)’라는 전각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꾸밈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비의 건립연대는 효공왕(897~912)대로 추정되고,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다.

전체 높이는 약 3m이며, 1963년1월21일 보물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실상사 부도(浮屠)..

입구에서 왼쪽 담장을 따라 절 뒤로 약 500m 정도 걸어가면 만나게 되는 팔각원당형의 고려시대 부도이다.

부도는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으며, 아래 받침돌에는 용틀임과 구름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가운데 받침돌은 아무런 무늬를 새기지 않았고, 위 받침돌에는 연꽃 8잎이 위를 향해 피어 탑신을 받치고 있으며, 각 모서리를 따라

꽃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탑신은 한 면에만 문을 얕게 조각하고 다른 면에는 아무 장식이 없으며,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급하고,

여덟곳의 귀퉁이에는 작은 꽃이 장식되었다. 꼭대기에는 꾸밈이 없는 둥근 돌을 놓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보주가 놓여 있다.

너비에 비해 길쭉해 보여 안정감이 다서 없어 보이지만 정제된 편이다.

약한 석질 탓인지 조각은 간소하고 소박한 편이며, 특히 위 받침돌의 꽃장식 표현은 심하게 닳아 있다.

조성된 연대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고려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현재 보물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각대사응료탑(證覺大師凝蓼塔)..

실상사의 개창조인 홍척국사(洪陟國師)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가 증각(證覺)이고, 부도 이름이 응료(應蓼)여서 ’증각대사응료탑‘으로 불린다.

8각형의 석재를 여러 층 쌓아 기단(基壇)을 조성한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고 위 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비교적 낮은 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을 새겼으며,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전체 높이는 2.42m이다. 현재 보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각대사응료탑비(證覺大師凝蓼塔碑)..

비신(碑身)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하지 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 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비 명칭을 새겨 두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9년에 세운 것이다.

정면에는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이 쓴 천왕문(天王門)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나무로 조성된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천왕문과 연방죽..

 

석장승(石長生)..  1969년12월15일 중요민속자료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한다.

실상사의 이 장승 역시 경계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실상사 초입에는 해탈교를 전후하여 모두 3기의 장승이 서 있다.

세 장승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눈에 뭉툭한 주먹코를 하고 있다.

위 송곳니 두개가 삐져나와 험상궂은 듯하지만 입가의 미소는 순한 심성을 드러내고 있다.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

해탈교를 건너기 직전에 석장승 하나가 있는데, 원래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장승이 하나 더 있었으나 1963년 홍수로 떠내려갔다고 한다.

장승의 몸통에는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수염을 땋아 왼쪽으로 구부리고 벙거지

같은 모자를 썼다. 찌푸린 이맛살과 콧등, 물안경을 쓴 듯 튀어나온 두 눈에 주먹만한 코는 벌름거리는 듯하며, 입술 밖으로 드러난

송곳니는 길게 八자형으로 튀어 나와 매우 해학적인 모습이다..

 

대장군(大將軍)...

해탈교 건너에 있는 석장승은 2기인데, 하나는 해탈교 건너 논두렁에 있고 다른 하나는 큰 고목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나무 밑에 있는 석장승은 몸통에 ‘대장군(大將軍)’이라는 글씨와 받침돌에 ‘옹정삼년을사삼월입동변(雍正三年乙巳三月立東邊)’이라는

각자가 있어 1725년(영조 1)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대장군과 마주보고 있는 장승으로 역시 몸통에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라는 이름과 ‘신해년오월(辛亥年五月)’이라는 각자가 있어

1731년(영조 7)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실상사 해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