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기행] 호구산 용문사(龍門寺)와 백련암(白蓮庵), 염불암(念佛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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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기행] 호구산 용문사(龍門寺)와 백련암(白蓮庵), 염불암(念佛庵)

by 정산 돌구름 2009. 12. 27.
남해 호구산 용문사(龍門寺)와 백련암(白蓮庵), 염불암(念佛庵)..

 

탐방일 : 2009년 12월 26일

소재지 :  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호구산

용문사 소개

  신라 애장왕3년(802) 창건된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이 절 승려들이 승병으로 참여하여 왜군과 싸웠는데, 이 때 절이 불에 타 없어졌으며

  현종2년(1661) 학진(學進)이 인근 보광사(普光寺)를 옮겨와 중창하였다. 보광사는 원효가 세운 사찰이었으나 이곳으로 옮길 때에는

  폐사 직전의 상태였다고 한다. 용연(龍淵) 위쪽에 터를 잡았다고 해서 용문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임진왜란 이후 호국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숙종 때 나라를 지키는 절이라며 수국사(守國寺)로 지정하였다.

  또, 이때 왕실의 축원당(祝願堂)으로 삼았다. 1703년과 1735년, 1819년, 1857년, 1970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천왕각·명부전·칠성각·봉서루·산신각·요사 등이 있다.

  산내 암자로는 1751년(영조 27)에 세운 백련암(白蓮庵)과 염불암(念佛庵)이 남아 있다.

  1974년 경남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과 측면 각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처마밑에 용두(龍頭)를 조각해 넣었다.

  용문사 천왕각용문사 명부전은 1985년에 각각 경남문화재자료 제150호,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백련암은 용성과 성철 등 고승들이 수도하던 곳으로 경봉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유물로는 용문사 석불촌은집책판이 각각 경남유형문화재 제138호, 제172호로 지정되었다.

  이 중 용문사석불은 높이 약 81cm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절을 중창하기 위해 땅을 파다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촌은집책판은 조선 인조 때 학자인 유희경(劉希慶)의 시집 <촌은집(村隱集)>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밖에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사용하던 대포 삼혈포(三穴包)와 숙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연옥등(蓮玉燈) 2개, 촛대, 번(幡), 수국사 금패

  (禁牌) 등이 있었으나 연옥등과 촛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훔쳐갔다고 한다. 절 입구 일주문 오른쪽 언덕에 9기의 부도가 있다.

 

 

용문사로 오르는 길...

 

새로 단장한 용문사 일주문...

 

오르는 길목...

 

지장대도장...

 

입구의 부도전... 경남유형문화재 제425호로 지정되어있다..

제작시기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스님들의 사리묘탑으로 석종형 부도와 항아리 모양에 옥개석을 올려 놓은 부도군..

통일신라말부터 유행한 팔각원당형의 부도처럼 화려함은 없지만, 자연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자연미가 엿보인다..

 

천왕문왚 전경...

 

천왕문 앞의 조그만 비각...

 

그 안에는 오래된 목비가 모셔져 있다..

 

천왕문과 천왕각...

 

천왕각(天王閣)...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물로서 봉서루 아래 절 입구에 자리한다.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로 1202년에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건물은 상량문에 따르면 1702년(숙종 28)에 지은 것이다..

 

천왕각 안에는 사천왕인 동방 지국천왕, 서방 광목천왕, 남방 증장천왕, 북방은 다문천왕으로 각각 비파, 용, 칼, 창을 들고 있다.

다문천왕의 경우 대체로 왼쪽 손바닥에 보탑(寶塔)을 올려놓고 있는 예가 많은데 용문사 천왕각의 다문천왕은 창을 잡고 있다.. 

 

다른 절의 경우 마귀를 밟고 있는 형상이지만 이곳의 사천왕은 부정한 양반이나 관리를 밟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봉서루(鳳棲樓)...

범종루 옆에 자리한 봉서루는 누각이자 출입문 역할을 하며, 맞배지붕에 앞면 7칸, 옆면 4칸의 규모를 하고 있고 근래에 지었다.

대웅전 쪽에서 바라보면 단층이지만 절 입구 천왕문 쪽에서 올라오면서 보면 중층(重層), 곧 2층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지 가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각의 형식이기도 하다.

봉서루 내부에는 특별한 시설은 없고, 실내 법회나 강의가 열릴 때 집회 장소로 활용된다...

 

경남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로써 허튼층쌓기로 만든 높다란 축대 위에 자리하낟.

10개의 계단을 통해 올라가도록 되어 있는데, 규모는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이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기둥은 대체로 낮고 가운데 부분이 다소 볼록하게 나온 배흘림 기둥을 하고 있다.

처마를 받치면서 아울러 장식을 겸하도록 되어 있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多包)식으로,

앞면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2구씩 공포를 배치하였다.

처마 밑의 가운데 칸인 외부 어칸(御間)에는 양쪽에 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공포 부분에는 연꽃무늬 장식을 하였다..

겹처마를 설치하였는데 외부로 뺀 덧서까래가 길어서 전체적으로 지붕이 휘어진 상태로 위로 들려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처마 네 모서리에는 추녀를 받치는 기둥인 활주(活柱)가 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여래삼존상과 후불탱, 그리고 신중탱과 동종이 있다.

 

17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웅전안의 금동 삼존불좌상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셨다.

이 삼존불상은 전체적으로 불신(佛身)의 비례가 알맞게 균형 잡혀 있고, 은은한 미소를 띤 상호(相好)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석가불좌상은 머리카락을 나발(螺髮)로 하였고, 이마와 머리 끝에 각각 육계를 표현하였는데, 조선 중기에 흔히 나타나는 형식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두 어깨는 둥글게 곡선을 그리며 내려와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고 있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불의(佛衣)는 양쪽 어깨를 덮는 통견(通肩)이며, 가슴 아래에 내의인 승가리(僧伽梨)가 보이는데, 옷을 저매는 끈의 형태가 17세기 중반

이후에 나타나는 나비형 매듭이 아니라 두 줄을 겹치게 하여 대각선 표현이 나타나는 것이 주목된다.

불의는 길게 내려와 두 발을 덮고, 두손으로 표현하고 있는 수인(手印)은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짓고 있는데,

석가여래이면서 아미타수인을 하는 것은 조선시대 불상에서 더러 나타나는 형식이다.

석가여래상을 좌우에서 협시(脇侍)하고 있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전체적인 크기 및 보관의 형태 등에서 서로 비슷하지만,

손에 들고 있는 지물(持物), 그리고 손의 위치에서 다소 차이가 난다.

보관의 경우 극락조(極樂鳥)가 주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모습이 서로 거의 같다.

손의 모습은 문수보살이 지물을 들지 않고 두 손으로 수인을 짓고 있는데 비하여 보현보살은 두 손으로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두 손의 위치가 반대인 것은 가운데 석가여래상을 양쪽으로 협시하고 있는 시각적 안정감을 고려한 것이다. 

 

대웅전 공포(栱包)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多包)식으로, 앞면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2구씩 공포를 배치하였다.

처마 밑의 가운데 칸인 외부 어칸(御間)에는 양쪽에 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공포 부분에는 연꽃무늬 장식을 하였다.

공포는 지붕의 무게를 분산하거나 집중시켜 구조적으로 안정된 기능을 하고 있다.

건물의 웅장한 멋을 내며, 그 공작이 섬세하고 화려하여 장식적인 기능을 한다.

대웅전 안에 대들보에 귀면과 단청이 되어있으며, 용머리를 조각하여 붙여 더욱 화려하게 장엄을 하고 있다..

 

칠성각(七星閣)은 근래에 지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3단으로 야트막하게 쌓은 화강암 축대 위에 기단부를 놓고 세워졌으며, 포작(包作)은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 있다.

안에는 치성광여래탱을 비롯하여 산신탱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칠성각의 산신탱...

 

용화전(龍華殿)은 명부전 뒤에 자리하며, 기와지붕에 시멘트 건물로 근래에 지었다.

정면과 측면 각 1칸씩의 자그마한 규모이며, 안에는 통일신라 또는 고려시대의 석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편액은 근대의 고승 구하 천보(九河 天輔) 스님의 행처체 글씨다..

 

용화전에 봉안된 석불상은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약 300년 전에 경내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개분이 하얗게 되어 있어 본래의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없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원만한 편이지만 눈과 입이 작고 코가 큼직하여 다소 형식화된 면이 보인다.

긴 상체에 넓은 무릎 등은 부피감이 풍부하고 탄력적인 것이 눈에 띤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는데, 띠의 주름 무늬가 자연스러워 불상의 특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왼손은 배에 대고 병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대었는데 연꽃 가지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불상은 예로부터 미륵보살로 알려져 용화전에 봉안되었다..

 

용문사의 거대한 구시통...

 

괘불석주(掛佛石柱)...

대웅전 앞에 좌우 양쪽으로 각각 2기가 한 조를 이루는 괘불대(掛佛臺)가 있다.

괘불대란 야외 법회 등을 열 때 전각 안이 아닌 바깥에 거는 커다란 불화인 괘불을 걸기 위한 시설물을 말한다.

현재 남아있는 괘불대는 조선 중기의 것이 가장 오래 되었는데, 대체로 2기가 1조를 이루어 양쪽으로 간격을 둔 채 2조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용문사 괘불대는 밖에서 바라볼 때, 네 면을 고르게 다듬었는데 안쪽 면은 직각이지만 바깥쪽 면은 아래가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들게 하여 마치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맨 윗부분은 둥글게 곡선으로 마감하였다. 2기가 서로 마주보는 면에는 구멍을 아래 위로 각각 2개를 뚫어 이곳에 괘불을 받치는

버팀목을 끼울 수 있도록 하였다. 형식으로 볼 때 조선시대 중후기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뒤편에서 바라본 용문사.. 

 

백련암으로 가는 길..

 

백련암(白蓮庵)은 조선 영조27년(1751) 홍찬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이 백련암은 용성스님, 석우스님, 성철스님(1955년 하안거)등 현대 고승들의 발자취가 서린 도량이기도 하다...

 

보광전(普光殿)은 정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는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보광전이란 마갈타국 보리도량의 곁에 있다는 보광명전에서 유래했는데, 이곳에서 부처님이 화엄경을 3차례 설하였다고 한다..

 

아미타삼존불은 고려후기때 만들어진 것으로 동으로 주조된 250cm, 210cm 크기의 불상이다.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으며, 뒤편에 아미타불화가 걸려있는데 특이하게 연꽃을 들고 있다..

 

백련암 사액(白蓮庵 寺額)은 요사에 걸려 있다.. 

보광전과 요사채에 걸린 편액은 경봉스님의 선필이다..

 

뒤편의 염불암..

 

염불암은 조선 숙종35년(1709) 각찬스님이 창건하였다...

 

지금의 대웅전은 1990년 자안스님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에는 역시 석가모니삼존불...

 

아름다운 꽃살문양으로 장식되었고, 내부 공포위에는 청룡과 황룡, 코끼리, 호랑이 등이 조각되어있다..

 

염불암 아래에 500년 된 은행나무가 서있다.. 

 

주차장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