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제22구간(소백산) 칼바람의 소백산 비로봉을 넘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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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백두대간

백두대간 제22구간(소백산) 칼바람의 소백산 비로봉을 넘어서다

by 정산 돌구름 2010. 2. 13.

백두대간 제22구간(소백산), 칼바람의 소백산 비로봉을 넘어서다..

(죽령 ~ 연화봉 ~ 비로봉 ~ 국망봉 ~ 마당치 ~ 고치령)


○ 일시 : 2008. 2. 2(토) - 00:00 출발

○ 기상 : 맑음(바람이 없었고 약간의 추위)

○ 구간 : 24.83km(접속구간 5.0km 포함, 29.83km) - 경북 영주, 충북 단양

 죽령 ~ 6.25km ~ 천문대 ~ 4.43km ~ 비로봉 ~ 3.08km ~ 국망봉 ~ 8.27km ~ 마당치 ~ 2.8km ~ 고치령

○ 소요시간 : 8시간 15분(대간구간)

  죽령(04:50)~전망대(05:30)~제2연화봉(06:00)~연화봉(06:40)~제1연화봉(07:13)~비로봉(07:55~08:00)~초암사

  갈림길(08:55)~국망봉(09:00)~상월봉(09:22)~늦은맥이 고개(09:45~10:25, 점심)~연화동 갈림길(11:20)~마당치

  (12:32)~형제봉갈림길(12:55)~고치령(13:30)

  ※ 접속구간 : 고치령(13:35) ~ 좌석리(14:30)

○ 주요봉우리 : 죽령(693m), 연화봉(1,383m), 제1연화봉(1,394m), 비로봉(1,439.5m), 국망봉(1,420.8m) 상월봉(1,394m)

○ 산행팀 : 광주아침산악회(26명) - 회비 50,000원

○ 교통

  엔날레(00:00)~88고속~중앙고속~동명휴게소~풍기IC~5번국도~죽령(04:35)

  좌석리(17:00~25)~931번~5번~풍기온천(17:55~19:20)~풍기IC~중앙고속~화원IC~88도로~죽산휴게소~비엔날레

           (23:10)

○ 구간소개

  이번 구간은 소백산구간중 「죽령~고치령」으로써 2년 전에 나사모와의 첫 산행에서 함께 한 구간이다.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서해를 향해 머리를 돌려 내륙으로 달리다가 한껏 가쁜 숨을 몰아쉬는 곳이 바로 소백의 연봉들이다.

  옛날 영남 좌도의 크고 작은 고을들은 모두 그 소백산에 기대어 죽령으로 한양 길을 열었다.

  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에 「죽죽」이 처음으로 이 고갯길을 닦은 이래 오늘날까지 변함없는 길로써 사용되고 있으니

  고갯길이 열린지 무려 1천8백년이 넘었다.

  죽령은 한때 백제가 점령하기도 하였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땅이었다가 진흥왕의 영토가 된 삼국 결사쟁패의 접경이었다.

  고려시대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우왕 8년(1382년)과 9년에 각각 왜구가 죽령을 넘어왔다는 기록이「고려사」에 남았다.

  풍기에서 죽령이 시작되는 곳은 수철리(水鐵里)다. 

  희방사는 또한 「월인석보」로 유명한 절이다. 「월인석보」는「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삼고 「석보상절」을 주석으로

  보태 세조 5년(1459년) 에 간행한, 훈민정음 이후 첫 불경언해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희방사판 「월인석보」는 한국전쟁 무렵 미군에 의해 절과 함께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죽령 고갯마루는 충북과 경북이 서로 손 흔들고 헤어져 제 갈 길을 가는 곳이다.

 

 

  소백산(小白山)..

  격암 남사고(南師古)가 그야말로 「사람이 살 만한 산」이라 하여 넙죽 절하고 갔다는 바로 그 소백산이다.

  죽령은 한때 백제가 점령하고, 또 고구려 광개토왕의 땅이었다가 종당에는 진흥왕의 영토가 된 삼국 결사쟁패의 접경이었다. 또한 죽령과 조령 이남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고향이었으니 거기서 견훤의 흉을 보다가는 찬물 한 사발도 못얻어 마신다.

   4.5km에 이르는 죽령 터널을 빠져 나온 중앙선이 희방사역에 닿아 잠시 벅찬 숨을 고르며 쉬었다 가는 곳이기도 하다.

  수철리의 마을 이름 또한 희방사 연기설화에서 묻어 나왔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두운(杜雲)이란 스님이 살았다.

  하루는 두운이 소백산 호랑이의 목구멍에 걸린 비녀를 뽑아주자 호랑이는 그 보답으로 젊고 아리따운 처녀 하나를 물어왔다.

  처녀는 서라벌 계림호장 유석(兪碩)의 딸이었다. 출가승의 몸이라 처녀와 의남매의 인연을 맺은 두운이 유석에게 딸을 돌려

  보내자 유석은 두운을 위하여 절을 짓고 기쁨을 얻은 자리라 하여「희방사(喜方寺)」라 했다.

  또한 산문 밖에 무쇠다리를 놓았으나 훗날 다리는 없어지고 수철리란 이름만 남았다 한다.

  풍기 유림회관의 노인들은 한결같이 옛날 죽령에 김유신과 죽지랑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희방사 들머리 길섶 언덕에는「모죽지랑가」시비가 있다. 죽지는 진덕여왕 대의 재상 술종(述宗)의 아들이다.

  술종이 삭주(춘천)의 도독사로 부임하는 길에 죽령(삼국유사의 죽지령)에서 한 거사(居士, 해동고승 원측법사라는 설도 있다)

  를 만나 서로 정겹게 사귀고 헤어진 후, 삭주에서 꿈을 꾸었다.

  죽령의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이었으니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술종이 죽령에 사람을 보내 알아 본 즉 거사가 죽은 날이 바로 꿈을 꾼 날이었다.

  이에 술종은 거사가 자기 집에 환생하였음을 굳게 믿었다. 마침내 아들이 태어나 이름을 죽지라 불렀다.

  효소왕 때 화랑 득오(得烏)는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후세에 남겼다.

  득오가 문관인 익선(益宣)에게 징발되어 고생할 적에 상관이었던 죽지를 그리며 지은 노래라 한다.

  풍기 사람들 역시 죽지가 살아 있을 적에 이 고장 여인들이 부르던 노래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고 한다.

  가는 봄이 그리워 / 모든 것이 서러워 우네 / 아담한 얼굴에 / 주름살지는 것을 잠시 사이나마 만나 뵙게 되었으면 /

  님이여 그리운 마음으로 가시는 길 / 쑥대마을에 자고 갈 밤 있으실까.

  비안개 속의 장승, 그리고 주막... 옛날부터 죽령길은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라 했다.

  산길 60리는 잰 걸음으로 군말없이 걸어도 하룻길이다.

  죽령 고갯마루는 충북과 경북의 경계로 서로 손 흔들고 헤어져 제 갈 길을 가는 곳이다.

 「소백대장부」와「소백여장부」한 쌍과 좌우로 크고 작은 장승들이 고갯마루 오가는 행인들을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다.

  성난 듯, 울부짖는 듯, 기어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그러면서도 슬쩍 웃음을 참는 장승 특유의 짓궂은 표정이 사뭇 싱그럽다.

  소백대장부는 경북에서, 소백여장부는 충북에서 올라와 죽령 장승 부부가 되었단다.

  국보 제198호 「신라적성비」또한 이곳에 있다. 「사람이 살 만한 산」, 소백이 굽어보고 있다.

산행후기

  이번주 구간은 죽령~고치령 구간으로써 2년전에 나사모와의 첫 산행에서 함께 한 구간이다.

  목포에서 올라와 금요일 밤에 출발하는 토요산행... 참으로 벅차다.

  자정에 비엔날레를 출발...4시35분에 죽령휴게소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렸지만 들머리가 보이질 않는다. 

 

04:50, 죽령 출발

어둠속 죽령주막 앞에 주차하고 버스에서 내려서면 커다란 죽령 표지석이 반긴다..

 

어둠이 짙어 위치를 분간할 수가 없다. 주위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굳게 닫힌 채 밤의 적막만이 감돈다. 

 

들머리를 찾고 어둠속에서 단체로 사진촬영을 한다. 

 

들머리를 찾아 50여m를 내려가니 죽령 이정표 「천문대6.8km/비로봉11.5km/국망봉14.6km」와 「소백산국립공원」

안내판에서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죽령매표소가 나온다..

 

제2연화봉까지 시멘트길이다. 계속되는 시멘트 포장인지라 제설작업은 잘 되어 있었다.

쉴새없이 올라온지라 추위도 잊은 채 땀방울이 솟는다.

「죽령휴게소2km/비로봉9.8km/연화봉5.0km/ 국망봉12.9km」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순한 길을 따라 간다.

우측 원두막 쉼터도 보이고 차츰 고도를 높이면서 오르니 우측에 목조로 만들어 놓은 전망대가 있어 올라가서 풍기읍 야경을

바라보면사진 한 컷 찍고 내려온다.(05:30)  다시 오르는 시멘트 도로..

 

정표「연화봉2.7km/죽령휴게소4.3km/ 중계소0.2km」를 지나 갈림길에서 좌측에 보이는 임도는 활공장으로 가는 길로써

대강면과 단양읍의 경계선이 내려가며 백두대간 길은 우측으로 틀어진 도로다.  

죽령휴게소 4.5km 이정표를 지나(05:59) 잠시 내려가다가 다시 오른다. 

 천문대까지는 2.5km가 남았고 아직도 어둠이 가득 차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천체관측소까지 잘 나있는 임도 때문에 길을 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천문대 앞에 도착하니 첨성대를 연상케 하는 탑과 불이 켜져있는 천체관측소 건물이 보인다. 직원들의 숙소가 아닌가 싶다.. 

 

06:40,  연화봉(1,383m)

천문대 앞에서 탐방로 가는길과 희방사로 가는길 두 갈래로 길이 나누어진다.

어느 곳으로 진행하여도 비로봉으로 갈 수 있지만 연화봉을 거치려면 희방사 방향으로 간다.

연화봉에는 커다란 정상석과 이정표「천문대정상 해발1,340m/희방사2.4km/비로봉4.3km/죽령휴게소7.2km」가 있다..

 

꽁꽁 얼어붙어 찬바람만이 감돌아 사진 한장을 찍고 급히 내려선다. 

 

키가 큰 철쭉나무 사이로 나있는 급경사의 내리막을 따라 계속 내려서다가 부드러운 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헬기장이 지나 가파른 오르막이 나무계단으로 이어진다. 어둠이 걷히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07:13,  제1연화봉(1,394m)

고무가 깔린 나무계단을 밟고 고도를 높이자 제1연화봉이란 이정표「천문대2.0km/비로봉2.5km/국망봉5.6km」가 세워진

1394.4봉으로 정상은 이곳에서 좌측에 봉긋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이다.. 

 

어둠이 걷히고 차츰 드러나는 산중의 산맥... 사방을 둘러보아도 오직 맥을 이룬 산뿐....

제1연화봉에서 내려선 안부에서 계단을 따라 1382봉을 넘어가는데 이곳엔 「아고산지대」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기도원갈림길 이정표「비로봉1.7km/ 천문대2.8km」를 지난다.(07:26)  

 

내려선 안부 좌측으로 바위전망대가 있고 바로 앞에 능선을 따라 비로봉이 바라보인다.

 

바위가 듬성듬성 있는 1395봉을 넘으면「국망봉4.1km/비로봉1.0km/죽령10.5km/ 천문대3.5km」이정표(07:38)가 있다.

길게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가 암릉을 내려서면 이정표「비로봉0.6km/죽령휴게소10.9km/희방사6.1km/천동6.2km」가

있는 천동리갈림길의 1,385봉의 정상으로는 로프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비로봉을 앞에 두고 갈림길에 이르는데 직진길은 능선을 따라 비로봉으로 바로 가는 길이고 좌측길은 주목관리소를 거쳐서

비로봉으로 가는 길이다. 능선을 따라 비로봉으로 향한다.. 

 

07:54,  비로봉(1,439.5m)

좌측으로는 대피소 건물이 보이고 주목군락지 안내판을 지나면 좌측으로는 철망이 설치되어 있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주목군락지는 수령이 약 5백년된 주목 3,400그루가 96ha의 면적에 무리를 이루어 자생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24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국망봉과 연화봉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약 30,000그루가 분포되어 있었다.

현재 주목은 교목으로써 곧바르게 성장하는 수목이나 이곳의 주목은 고지의 강풍으로 인하여 대부분 휘어져 있어 그 형상이

기묘한 것이 특징이다. 목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넓은 공터에 커다란 정상석과 작은 정상석이 세워진 1439.5봉인 비로봉이다.. 

 

이젠 완전히 어둠이 걷히고 햇빛이 보인다.

칼바람으로 소문난 소백산 비로봉도 오늘은 잠시 바람을 멈추었으나 추위는 여전하여 사진 찍기가 힘이 든다.. 

 

비로봉은 소백산의 주봉으로, 비로는「비로나자」(毘盧遮那)의 준말이며 부처를 뜻한다.

부처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하여 삼존불이라 하며 미륵과 관음도 함께 한다.

소백산은 미륵이 주도하는 도솔봉(천)과 비로나자불(부처)이 주도하는 비로봉이 있으며 그 사이에 연화봉이 있다..

 

소백산은 다른 이름으로 이백(二白), 또는 백산(白山)으로 불린다.

「이백」은 산경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태백산과 하나의 산군으로 보아 태백과 소맥을 합친 말인 「이백」이라 하였고,

「백산」은 밝다, 깨끗하다, 으뜸이라는 뜻으로 가장 높고 정기가 맑은 산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상에는 거대한 정상표지석과 돌무지, 충북에서 세운 또 다른 조그만 정상석, 그리고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국망봉3.1km/비로사4.0km/죽령11.5km/희방사6.7km/천둥6.9km」와 삼각점(단양425/2003재설)이 있다.

 

한편으로는 긴 목재의자와 「비로봉에서 바라본 연화봉」안내판이 서있고 멀리 연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선명하다.

정상에서 직진하는 길은 원적산과 비로사로 가는 길로써 풍기읍과 순흥면의 경계선이 내려가고 있다.

비로사(毘盧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 말사로써 통일신라시대에 의상(義湘)의 10대 제자 중 한사람인 진정(眞定)이 창건한

화엄종 사찰로 신라 말에는 소백산사라고도 불렀다.

출가하기 전에는 가난하여 장가도 들지 못한 채 홀어머니를 봉양하던 진정은 의상이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가하여 의상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3년 뒤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그 소식을 의상에게 전하였다.

진정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소백산 추동으로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 3,000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벌써 하늘에서 환생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때의 소백산 추동이 비로사로 추정된다.

비로사사적기에는 의상이 683년에 이 절을 개창하고 「비로사」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말 한 승려가 중창하고 진공을 청해 이곳에서 살게 했는데, 그때 고려태조가 방문하여 법문을 듣고 그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가 이 절에서 입적하자 태조는 「진공대사」라는 시호와 보법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었다.

1126년 인종이 김부식으로 하여금 불아(佛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1385년 환암이 중창하였다.

1468년에는 김수온이 사재를 들여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석불상 2구만 남고 모두 불타버린 뒤 1609년 경희가 중건하였다.

1684년 월하가 법당과 산신각 등을 중창하였고, 1907년 범선이 요사를 증축하였는데 1908년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1919년 희방사 주지 범선이 법당을 중수하였고 1927년 요사를, 1932년 다시 법당을 중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새로 지은 법당과 요사채뿐이지만 「진공대사보법탑비」와 「석조당간지주」,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996호)」 등 중요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사방이 트여 조망이 아름답다.

 

아침 안개에 쌓인 산들이 겹겹이 둘러쌓여 자태를 뽐내고 동녘은 구름에 쌓여 일출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08:55, 초암사 갈림길

국망봉 방향으로 길게 뻗은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는데 뒤 돌아본 비로봉이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갈림길에는「어의곡리4.7km/비로봉0.4km/국망봉2.7km」이정표가 있다.(08:06) 

 

눈앞에 보이는 국망봉을 향해 좌측으로 비켜가는 철제 계단길로 내려섰다가 다시 철제계단을 타고 오른다.

또다시 봉우리를 넘어 우측에 커다랗게 보이는 바위가 있는 암봉을 우회키 위해 좌측으로 길게 감아 돌아 능선을 따라 올라

초암사 갈림길 이정표「초암사4.1km,돼지바위0.6km/국망봉0.3km/비로봉2.8km」가 있는 능선분기점에 도착한다.

초암사는 소백산 국망봉 남쪽 계곡 아래에 의상대사가 세운 조계종 사찰로 의상이 부석사 터전을 보러 다닐 때 초막을 짓고

수도하며 임시 기거하던 곳이다.

부석사를 지은 후 이곳에 다시 절을 세웠는데, 우람한 거석 축대, 주춧돌 등으로 미루어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백산 절경 속에 자리잡은 청량도량으로 6.25전쟁으로 파괴되어 다시 지은 법당이 남아 있다.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126호)과 동부도(경북유형문화재 128호), 서부도(경북유형문화재 129호) 등을 소장하고 있다.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향하면 초암사로 가는 길이고 대간길은 좌측으로 꺾어 능선을 타고 오른다. 

 

o 09:02  국망봉(1,420.8m)

암봉을 지나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면 이정표「상월봉0.6km/비로봉3.1km/초암사4.4km」가 있는 국망봉에 오른다.

커다란 정상표지석「소백산 국망봉 1420.8m」뒤로 암봉이 자리잡고 있으며  삼각점(영주11/2004재성)이 있다.

국망봉(國望峰)...

충북 단양군 가곡면과 경북 영주시 안흥면의 경계에 솟아 충북과 경북 도계를 이루고 있는 봉우리로 그 옛날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에 금강산으로 가던 중 왕궁이 있던 경주를 바라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마의태자의 울부짖는 소리인양 스치는 바람소리가 세차고 매섭게 들려온다. 

신라 마지막왕인 56대 경순왕은 나라를 왕건에게 빼앗기고 천년사직과 백성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명산과 대찰을 찾아 제원군

백운면 방화리 궁뜰에 동경저(東京邸)라는 궁을 짓고 머물러 있었다.

왕자인 마의태자는 신라를 회복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엄동설한에도 삼베 옷 한 벌만을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소백산으로

들어와 이곳에 올라 멀리 옛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는 연유로 국망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단양군지)

명종1년 배순이라는 사람이 순흥배점에 와서 대장간을 차려 놓고 좋은 철 물건을 만들어서 양심적으로 수요자에게 공급하였다.

특히 행실이 착하고 어버이와 조상을 모시는 효성이 지극하여 퇴계선생이 불러 “과연 들은 바와 같다.”하며 칭찬 했다고 한다.

그후 퇴계선생이 돌아가심에 철물로 상을 만들어 놓고 3년복을 입었으며 선조가 승하하시자 매월삭망(每月朔望)에 정성들여

장만한 음식을 들고 뒷산에 올라 북쪽 궁성을 향해 곡제사(哭祭祀)를 3년동안 지냈다.

그 슬픈 소리가 궁 안에 까지 들리어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리게 되었다고 하며 당시 그가 음식을 들고 올라 궁성을 바라

보며 곡을 했다는 산을 국망봉이라 한다.(풍기읍지).

고려 공민왕때 이의가 선왕을 경조하는 4배를 올렸다하여 그 산 정상을 국망봉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사방이 트여 조망이 막힘이 없어 맑은 하늘에 오랜만에 시원하게 보이는 고산준령의 장쾌한 산줄기와 아름다운 산하를

한없이 바라보다가 갈 길이 멀기에 상월봉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지나온 비로봉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망봉에서 북동쪽으로 내려서는 안부의 바람단지 고갯마루는 마치 해안가의 하얀 백사장을 연상케 한다. 

 

바람에 휘날리며 멋진 풍경을 자아내다가 얼어붙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09:22  상월봉(1,394m)

해발 1,260m의 넓은 평지에는 이정표「상월봉1.7km/국망봉1.8km」가 서있는 곳을 지나는데 바로 앞이 상월봉일터인데

1.7km라니 조금은 이상하다. 

능선길 안부에서 조금 올라서면 상월봉을 좌측으로 우회하는 사면길이 보이나 직진하여 상월봉에 올라서면 지나온 국망봉의

능선도 한눈에 들어온다..

 

건너편 신선봉능선과 한없이 이어지는 산줄기들..

 

가야할 대간 줄기가 대간줄기가 한눈에 펼쳐진다.

 

상월봉에서 바위지대를 조심스럽게 내려서서 조금 지나면 좌측에서 오는 우회길을 만나고 조금 더 내려서면 

이정표「늦은맥이재 1.0km/국망봉1.1km /비로봉4.2km」옆을 지난다.(09:27)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길이 전혀 보이질 않고 눈이 무릎까지 빠진다.

 

09:45  늦은맥이재

능선을 따라 무조건 가파르게 내려선다. 한참을 내려서니 1225m고도의 늦은맥이 고개...

이정표「국망봉2.1km/비로봉5.2km/마당치6.5km/ 울전5.0km/구인사(출입통제)8.1km」가 있다.

좌측길이 어의곡리 울전으로 내려갈 수 있다.

구인사(救仁寺)..

대한불교천태종의 총본산으로 충북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소백산 자락에 있다.

이 지역은 소백산 구봉팔문(九峰八門) 중 제4봉인 수리봉 밑 해발 600여m의 고지에 위치해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제7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고 한다.

1966년에 창건되었으나 천태종의 개조인 상월조사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46년이었다.

그가 초암(草菴)을 짓고 수도하던 자리에 현재의 웅장한 사찰을 축조한 것이다.

경내에는 초암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900평 대법당, 135평 목조강당인 광명당, 사천왕문과 국내최대 청동사천왕상 등이 있다.

지금은 50여동의 건물이 세워지고 동시 수용인원이 5만6,000명이며, 총공사비 122억원이 소요된 국내 최대규모의 사찰이다.

수리봉에는 주요한 참배 대상이 되는 상월선사의 묘가 있는데 이는 화장을 기본으로 하는 일반 불교에서는 볼수 없는 일이다.

상월선사는 생전에 화장을 원치 않는다며 미리 이 묘자리를 잡아놓았다고 한다.

이 절은 특히 치병에 영험이 있다고 하여 매일같이 수백 명의 신도들이 찾아와 관음기도를 드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부처님의 영험이 많고 신비스러운 기도처라 이름나 있으며, 누구든지 소원을 빌면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하여 더욱 유명하다..

 

눈이 소복이 쌓인 능선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자리를 잡았다.

곧 이어 후미가 도착하였고 라면을 끓이고 있어 뜨끈한 국물을 조금 얻어먹고 출발...(10:25)

 

눈길을 가파르게 오른다.

 

늦은맥이재에서 올라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1272봉을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신선봉으로 가는 길이고 대간은 우측이다.

이 길도 1272봉을 우측으로 우회하는 사면길로 굴곡이 없는 편안한 길을 따라 내려간다.

오르내림이 없이 평탄하게 진행하다 조금 급하게 내려서서 좌측에 사면길로 진행하고 이정표가 세워진 곳을 지나면 우측에

수풀 우거진 공터가 1046봉이고, 이어 조금 진행하자 좌측에 우량경보기가 있다는 이정표가 있다.

 

11:20  연화동 갈림길

크고작은 봉우리를 넘고 사면길을 부드럽게 진행하여 큰바위 옆으로 있고 이정표「국망봉 5km/고치령6.1km/연화동3km」

세워진 연화동 갈림길을 지나 완만하게 오르면 시멘트 바닥으로 된 헬기장을 지나 봉우리를 오르내린다.

급경사의 내리막을 지나 완만한 능성길을 진행하면 이정표 「국망봉 6.1km/상월봉5.5km」를 지나 부드럽게 이어진다.

990m안부에서 1,035m봉에 올라 다시 우측으로 꺾이는데 고치령3.4km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며 1031.6m봉은 좌측에

사면길로 비켜가나 눈으로 덮여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12:32  마당치(910m)

1031.6봉에서 조금 내려서 부드럽게 진행하다가 급경사의 내리막을 내려서 다시 완만하게 진행한다.

우측으로 지능선이 달려있는 능선분기점에서 좌측으로 꺾어 봉우리 우측 사면길로 긴 내리막을 내려서니 마당치다.

마당치에는「고치령2.8km/형제봉3.7km/국망봉8.3km」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지리상으로 좌측으로는 양다리, 우측으로는 좌석리로 가는 길표시가 있으나 눈에 덮여 길은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12:55  형제봉 갈림길(1,032m)

다시 고도를 높여 형제봉 갈림길을 향해 비탈길로 1010봉을 넘어 헬기장이 있다는 형제봉 갈림길인 1032봉 우측에 사면길로

비켜가서 형제봉 갈림길 (해발1032m) 이정표 「국망봉9.2km/고치령1.9km/ 형제봉2.8km」가 세워져 있다.

실제로 1032봉은 좌측 형제봉 방향으로 올라가면 헬기장이 있는 능선분기봉이다.

1032봉은 도계로써 지금까지 함께한 충북과는 완전히 헤어지는 지점이다. 

능선길을 따라 부드럽게 이어가다가 계속되는 내리막으로 이어지고 868봉은 오르지 않고 사면길로 우측으로 트는데,

좌측 상단에 헬기장 같은 공터가 보이며 내리막은 계속된다..

 

13:30  고치령(760m)

이정표「고치령0.8km/국망봉10.2km/형제봉3.8km」를 지나 오르내리면 부드러운 능선길을 따르고 헐벗은 묘지를 지나

마지막인 고치령에 내려선다.. 

 

이정표「국망봉11.1km/마구령8.0km/좌석리/마락리」가 있다..

 

비포장도로인 고치령에는 산신각과 장승들이 세워져 있다.

산신각에서는 굿을 하는지 몇몇이 앉아 있으며 징소리가 요란하다..

 

고치령(古峙嶺)..

국토지리원 자료에 고치(古峙, 옛고개)로 기록 되어 있는 이 재를 「양백지간 (兩白之間)」또는 「고치재」로 부른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를 가로 지르는 고치령은 조선중엽 때 까지만 하더라도 죽령 다음으로 중요한 고개였던 것으로 보이나

세조에 의해 유배당한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던 이 곳 사람들의 노력이 발각되어 폐쇄되었다는 설도 있는 곳이다.

양백지간이라 하는 이 곳에는 영월로 유배된 단종과 순흥으로 유배된 금성대군(단종의 삼촌으로 단종 복위운동으로 사사)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라 한다.. 

 

영월땅으로 유배되었던 단종이 어느 날 하얀 도포차림에 말을 타고 고치령을 넘어 가고 있었다.

단종대왕에게 「어디를 가느냐?」물어보는 백성들에게 단종이 답하기를「태백산에 놀러간다」고 하였다.

이 날 오후 단종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단종의 혼백이 태백산으로 들어 태백의 산신이 되었고 금성대군은 소백의 산신이 되었다고 믿어왔고 혼령이 되어

만나는 조카와 삼촌을 위해 양백지간인 고치재에 산신각를 짓고 매년 정월 14일에는 어김없이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산신각(山神閣)이라 썼고, 좌우에 있는 주련 왼쪽에 ‘차산국내지령지성(此山局內至靈至聖)’ 「산이 모두 영역이 모두 지극하게

성령스럽고 성스러웠으면 한다」라고 쓰고, 오른쪽에 ‘만덕고승성개한적(萬德高勝性皆閒寂)’ 「수만 가지 덕이 높고 번성해서

모든 사람의 본성이 여유로우면서 고요하기를 바란다.」고 써있다.. 

 

14:30  좌석교

늦은맥이에서부터 함께한 3명이서 고치령에 도착하였다. 좌석리까지는 앞으로 5km의 내리막길..

비포장도로를 지나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한시간을 걸어야 한다.. 

 

마지막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려면 두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데 차라리 걸어서 내려가기로..

2시30분에 좌석리에 도착..   한참을 지나서야 후미들이 속속 도착.. 

 

17:25  좌석리 출발

뒷풀이를 준비하고.. 먹고 있는데 마지막은 5시가 지나서야 도착하였다..

 

좌석리를 출발하여 풍기온천으로 향하여 풍기온천에서 목욕을 하였다..

광주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