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제6구간(남덕유산) 3대강이 발원하는 남덕유산을 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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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백두대간

백두대간 제6구간(남덕유산) 3대강이 발원하는 남덕유산을 지나고

by 정산 돌구름 2010. 2. 2.

백두대간 제6구간(남덕유산), 3대강 발원샘이 있는 남덕유산을 지나고..

(육십령 ~ 할미봉 ~ 남덕유산 ~ 무룡산 ~ 동업령)

 

○ 일시 : 2007. 5. 12(토) 09:05~15:35

○ 날씨 : 아침부터 비가 온 후 흐리고 강풍

○ 구간 : 19.31km (접속 4.25km포함, 총 23.56km) - 전북 장수 무주, 경남 함양 거창

  육십령~2.28km~할미봉~4.8km~서봉~1.3km~남덕유산~4.15km~삿갓골재~2.68km~무룡산~4.1km~동엽령

○ 소요시간 : 7시간15분 (접속구간 1시간35분 포함, 8시간50분) 

  육십령(09:05)~할미봉(09:55)~교육원갈림길(10:42)~서봉(11:50)~남덕유산(12:45~50)~월성재(13:09)~삿갓봉

  (14:00)~삿갓골대피소(14:13~18)~무룡산(15:05~10)~1380봉(15:54)~동업령(16:20)

  * 동업령(16:25) ~ 칠연폭포(17:25~17:35) ~ 안성탐방안내소(17:55)

○ 주요봉우리 : 할미봉(1,026.4m), 서봉(1,492m), 남덕유산(1,507m), 삿갓봉(1,418.6m), 무룡산(1,491.9m)

○ 산행팀 : 빛고을토요산악회 (30명) - 회비 30,000원

○ 교통

  문예회관(07:10) ~ 88고속 ~ 남장수IC ~ 19번 ~ 26번도로 ~ 육십령(08:55)

  안성탐방안내소(20:10)~덕유산IC~35번고속~장수IC~19번~남장수IC~88고속~남원IC~저녁식사(21:10~21:30)~

            녹주사우나(21:40~22:35)~남원IC~88고속~문예회관(23:30)

○ 구간소개

  이번 구간은 「덕유산권」육십령~동업령 구간으로 육십령부터 본격적으로 덕유산 줄기가 시작된다.

  남덕유산~삿갓봉~무룡산을 거쳐 덕유평전에 이르러 덕유산 주능선에서 지봉으로 빠지게 되는데, 덕유산 주봉인 북덕유산

  (향적봉) 정상은 마루금에서 벋어난다.

  덕유산은 무풍의 삼봉산에서 시작하여 수령봉~대봉~지봉~거봉~덕유평전~중봉을 넘어 향적봉에 올랐다가 다시 중봉,

  덕유평전을 거쳐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달리는 100리의 큰 줄기를 형성하였다.

  수계(水系)로 보면 낙동강의 지류가 되는 황강과 남강의 발원지가 될 뿐만 아니라 금강의 상류를 이루는 하천이 발원함으로써

  낙동강 수계와 금강 수계의 분수령을 이룬다.

  오늘날 덕유산은 그 산세와 위치로 흔히 북덕유와 남덕유로 구분되기도 한다.

  미학적인 시각으로 보아 북덕유는 이름처럼 넉넉하고 웅장한 육산(肉山)이고, 남덕유는 장쾌하고 힘찬 골산(骨山)이다. 

  빼재까지 단숨에 가기가 힘이 들면 동업령이나 향적봉을 거쳐 백련사로 하산하는 코스로 잡아도 좋다.

  삿갓골재에 대피소가 들어서 최근에는 이 대피소를 기점으로 육십령~빼재 구간을 2~3개 소구간으로 나누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산줄기 중 백두산과 지리산에 이어 세 번째에 속하는 덕유산은 100리길에 달하는 큰 산이다.

  산경표에 기록되기를 덕유삼봉에서 백운산까지를 덕유산으로 기록하였기에 덕유백리길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하는 것이다.

  경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마루금은 남덕유산에서 덕유산 주능선을 따라 보내고 남덕유산에서 남령을 지나

  월봉산과 금원산 기백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이어 가면서 거창군과 함양군의 경계를 이룬다.

  수계 또한 남강과 낙동강, 섬진강으로 나누어지는 곳이다.

○ 산행개요

  2주전 백두대간 5구간에 이어 6구간도 참가했다. 어제 저녁에 조금 과음을 한 탓에 약간 발길이 무겁다.

  빛고을토요산악회에서는 이번주에 흑산도~홍도~가거도(1박2일) 특별산행을 하고 가지 않은 사람만 백두대간을 산행키로

  했다. 육십령에 도착하니 빗줄기가 조금 거세진다.

 

육십령(六十嶺) 이야기..

장계에서 동으로 26번 국도를 따라 6km쯤 가면 명덕마을에 이른다.

이곳을 지나서 60여 구비를 돌아 올라가면 소백산맥 준령 700여m 고지에 호남과 영남을 가르는 도계 표식이 서있다. 

여기가 구름도 쉬어 넘는다는 육십령이다.

옛날에는 재가 너무도 험준하고 화적떼들이 들끓어 재를 넘는 이는 재물을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기가 일쑤였다 한다.

육십령이란 이름은 60명 이상이 모여서 넘어야 안전하게 재를 넘을 수 있다고 해서 붙여졌고, 또하나는 정상까지 60여 굽이가

된다고 해서 붙여졌다 한다. 삼국시대에는 나제국경(羅濟國境)의 요새지로서 성터와 봉화대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에 할미성(六十嶺城)의 장수 조억령(趙億齡)에 대한 애절한 사연이 전한다.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다. 조억령이 많은 병사 장정들과 할미성과 봉수대를 지키고 있었다.

조억령 집에서는 조씨가 집을 나간지 오래도록 소식이 없으므로 사방팔방으로 수소문을 해본 바 육십령에서 성을 지킨다는

소식을 듣고 조씨의 부인은 남편을 찾아 나섰다. 초행길에 물어물어 육십령을 찾아 골짜기로 들어서 한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난데없이 화적떼가 달려들어 부인을 붙잡아서 능욕한 뒤에 죽여 버렸다. 한편, 조억령은 집을 나온 지도 오래되고 간밤에

꿈자리도 사나워서 병사들에게 잠시 집을 다녀와야겠다고 이르고 재를 내려오다 날이 저물었다.

구슬땀을 흘리며 길을 재촉하는데 어두움이 깔리는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한 여자가 산발을 하고 자기 앞으로 다가온다.

순간 섬뜩하였으나 자세히 보니 자기 아내다.

깜짝 놀라 사연을 물었더니 남편을 찾아 헤매다 전날 일어났던 일을 눈물로 하소연하고 원한을 갚아달라며 사라졌다.

조씨는 꿈만 같은 현실에 터지는 가슴을 억누르고 성으로 되돌아가서 병사들과 화적떼를 도륙하고 아내의 시신을 거두어 재

아래 양지바른 곳에 후하게 장례를 치르고 원귀(怨鬼)를 위로했다 한다.

임진왜란 때 국토를 유린한 왜병들이 정유재란 때 호남지방을 침범하기 위해서 왜병 대부대가 육십령으로 침입해 오며,

조억령 장수는 병사 장정들과 육십령성에서 맞아 치열한 격전을 벌여 수백명의 왜병을 주살, 수차례 격퇴시켰으나 혼비백산

하여 퇴각하는 왜병이 숨어서 쏜 유탄에 맞아 장렬한 일생을 육십령에서 마쳤다고 한다.

조장수의 시신을 뒤에 남은 병사들이 거두어서 부인의 묘소 옆에 나란히 장례 지냈다 한다.

난이 끝난 뒤에 조억령 장수의 전적비를 육십령 전적지에 세웠다는데 비석은 없어지고 장수군지에 기록만 남아 있다..

 

09:05, 육십령(708m) 출발

빗줄기가 거세지면서 육십령 표지석 앞에서 기념촬영을 마치고 바로 들머리로 들어선다.

휴게소에서 도로를 따라 육십령 정상 표지판에서 절개지를 올라 능선에 오르면 무덤을 지나고 다시 우측으로 휘어져 오른다.

줄기가 몰아쳐 주위의 조망은 생각지도 못하고 바위지대를 올라서니 우측으로 능선을 따라 내리막길이 보이는

첫 봉우리인 915m봉으로 구조표시목(11-3)이 세워져 있다. 

 

09:55, 할미봉(1,026.4m)

부드럽게 이어지다가 헬기장을 지나고 고도를 높이며 가파르게 오른다.

앞쪽의 능선을 바라다보면 암릉이 병풍을 친 듯이 펼쳐져 있는 할미봉이다.

참나무 숲과 중간중간 암릉길이 나타나면서 할미봉까지 가파르게 이어져 있다.

공터에 조망안내판과 삼각점(함양304/2002복구)이 세워진 1026.4m고도의 할미봉은 함양군 서상면을 지나 전북 장계면으로

육십령고개 바로 북쪽에 솟아있는 암봉이다.

함양을 지나는 백두대간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할미봉은 기암괴봉의 운치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계절따라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할미봉과 합미봉으로 부르고 있는 1,026.4m봉은 할미성이 있는 곳이며, 덕유산의 봉우리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할미성은 어느 할머니가 치마폭에 돌을 날라 쌓았다는 설에서 유래하며 장수쪽 사람들은 할미봉 아래 일제시대 규석광산이

있었는데 쌓아 놓은 규석이 쌀처럼 보였다고 해서 쌀미봉이라 하였다.

다른 하나는 어느 도승이 백성이 석달동안 먹을 쌀이 있는 산이라 예언하여 합미봉이라 했다고 한다. 

또, 함양의 군장동 사람들은 군장동이란 이름은 군사를 숨겨놓은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며 군사들이 먹을 수 있는 군량미를

숨겨 둔 곳에서 합미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할미봉 조망 안내판」에는 쾌관산, 천왕봉, 백운산, 깃대봉, 영취산, 장안산이 차례로 바라보인다고 하나 조망이 흐려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10:42, 덕유교육원 갈림길

할미봉에서 내려서면 좌측에 대포바위로 가는 길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직벽의 로프구간이 나타나서 로프잡고 내려서는데

비 때문에 미끄럽고 안부에 내려섰다가 암봉인 975m봉을 오르니 또다시 로프구간을 내려선다.

봉우리 하나를 우측 사면길로 진행하여 안부를 지나 이정목 세워진 930m봉을 넘어 구조표시목(11-07)이 세워져 있고,

넓은 공터가 있는 925m봉을 넘어 내려서면 안부에 구조표시목(11-08)이 세워져 있다.

913봉에 오르면 우측에 교육원으로 내려가는 길과 함께 안내판(경상남도교육원)이 보이고 부드러운 능선을 완만하게 오르면

산죽밭을 지나 975m고도에 정표 「육십령5.2km/남덕유산3.6km/덕유교육원1.6km」가 세진 교육원삼거리를 지난다.

 

파른 오르막을 따르면 헬기장이 있고 계속해서 도를 높여 산죽사이로 오른 1,260m 암봉에는 구조표시목이 있으며,

로프를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선다.(11:13) 

 

암릉구간을 지나면 키가 작은 산죽군락으로 뒤덮여 있다...

 

운무가 휩싸여 있고 연달래가 군락을 이루어 피어있다  

 

계속되는 능선길에는 바위, 잡목, 연달래가 어울려 있고  이정표「남덕유산2.0km/육십령6.8km」를 지난다.

암릉지대를 지나 1,470m봉을 넘어서니 돌탑이 있는 약수터 갈림길에 이르고 잠시 후 바로 위에 서봉이 올려다 보인다..

 

11:50,  서봉(1,492m)

덕유산 서봉에 올라선다. 서봉은 장수덕유산으로 불리며 내용을 알 수 없는 삼각점과 구간안내도가 있다.

사방이 트여 조망이 좋을 것 같으나 오늘은 안개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서봉에서 남덕유산을 향하여 30여m를 가면 헬기장에 이르고 헬기장에서 남덕유산을 바라보니 운무에 잠겨 희미하다.

헬기장 끝에서 길게 뻗은 철계단을 따라 급사면을 내려서야 한다.

 

고도를 낮추며 한동안 내려선 안부에서 완만하게 봉우리를 넘어 산죽밭이 있는 공터 안부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지만

비에 젖은 몸이 추워 10여분 만에 점심을 먹고 일어섰다.(12:09~12:20)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 잠시 구름 사이로 조망이 트이고...

 

갈림길에는 이정표 「남덕유산0.1km/삿갓골재대피소4.2km」에 이르러(12:41) 남덕유산을 들렸다 오기로 하고 올라선다..

 

12:45, 남덕유산(1,507m)

대간 마루금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남덕유산에 오른다.

남덕유산(南德裕山)은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와 경계하여

솟아있어 덕유산과 맥락을 같이 한다.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에서 남쪽으로 약 15km 지점에 위치한 덕유산의 제2봉인데, 향적봉이 백두대간에서 약간 비켜 나

있는 반면에 남덕유산은 백두대간의 분수령을 이루므로 백두대간 종주팀들에게는 향적봉보다 더 의미가 있다..

 

정상에는 맑은 참샘이 있어 겨울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고, 여름에는 손을 담글 수 없는 찬물이 솟아오른다.

등산로상의 봉우리는 하봉, 중봉, 상봉으로 나뉘며 상봉이 되는 봉우리는 동봉(東峰)과 서봉(西峰) 두 봉우리가 된다.

그 중 동봉이 남덕유산이며, 서봉은 장수덕유산으로 불린다.

남덕유산은 북덕유와 달리 장쾌한 산사나이 기상으로 솟은 바위 뼈대로 솟은 개골산이다.

산경치가 묘향(妙香)과 금강(金剛)을 닮아 황홀할 만큼 아름답다. 등산길은 가파르고 험준하여 7백여 철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남덕유산에서 장수덕유산으로 불리는 서봉은 동봉과 사이 황새 늦은목이라는 능선을 갖고 남쪽으로 육십령의 대령을 안고

자수정 산지로 유명하다. 또한, 아름다운 토옥동(土沃洞)계곡을 거느리며 그 아래로 장수 온천이 분출되고 있는 반면에 동봉은

삿갓봉을 거느리고 한말 거창 의병사의 빛난 한쪽을 기록하고 있다..

 

남덕유산은 3대강의 발원샘을 갖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왜구들과 싸웠던 덕유산 의병들이 넘나들었던 육십령은 금강(錦江)의 발원샘이며,

정상 남쪽 기슭 참샘은 거룩한 논개의 충정을 담고 있는 진주 남강(南江)의 첫물길이 되며,

북쪽 바른골과 삿갓골샘은 낙동강(洛東江)의 지류 황강(黃江)의 첫물길이다..

 

남덕유산에서 나누어지는 산줄기는 남령에서 월봉산에서 거망산과 황석산을 서상으로 보내놓고, 금원산과 기백산을 솟구친

산줄기는 동남방으로 달려 진주의 선학산까지 이어가는 진양기맥을 낳는다.

양기맥은 남덕유산에서 월봉산~금원산~기백산~황매산~자굴산~집현산을 거쳐 남강댐에 이르는 도상거리 156.6km의

산줄기로 낙남정맥과 함께 진양호를 에워싸는 산줄기다.

정상에 서면 사방이 확 트이고 멀리 구름사이로 봉우리들이 내려다보인다. 

지금까지의 조망이 없었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구름사이로 조망이 트인다..

 

13:09,  월성재(1,240m)

정상에서 내려서면 우회길과 만나는 곳에 이정표「육십령8.5km/남덕유산0.3km/삿갓골대피소4.0km」가 있고

이제부터는 길게 이어지는 덕유산 주능선을 따라간다. 

큰 고도차가 없는 뚜렷한 능선 등로를 따라 1.4km를 정도 내려서면 해발 1,240m고도의 월성재이며, 서쪽에 샘이 하나있다.

 

좌측은 토옥동계곡을 따라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로, 우측으로는 바랑골을 따라 경남 거창군 북상면 황점마을로 연결된다.

이정표「남덕유산1.4km/삿갓골재대피소2.9km/ 황점마을3.8km」를 지나 이제부터 능선길을 다시 가파르게 올라가야 한다.

 

이제 비도 거의 그치고 구름사이로 멀리까지 시야가 트인다..

 

고도를 조금씩 올리면서 능선봉을 오르내리며 가야할 봉우리들을 바라본다..

 

이정표「삿갓골대피소2km/영각통제소5.7km/남덕유산2.3km」를 지난다.(13:32)

 

오르막을 따라 올라서면 조망이 확 트이는 암봉에 이른다.(13:39) 운해가 장관을 이루며 그나마 조망을 대신한다..

 

이어 1365m봉에 올라서면 바로 앞에 삿갓봉이 우뚝 솟아있다..

 

대부분 삿갓봉을 우회하여 사면길로 가지만 우측으로 희미한 등로를 따라 삿갓봉을 향해 가파르게 오른다.

정상은 조그만 공터지만 「삿갓봉/1418.6m」정상석이 있고 조망이 확 트이면서 대간 주능선과 지맥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월봉산~금원산~기백산을 잇는 능선과 현성산과 필봉 등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운무에 잠겨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14:13, 삿갓재대피소(1,280m)

삿갓봉에서 내려서면 삿갓봉을 우회하였던 길과 다시 만나고 가파른 내리막이 계속된다.

대피소에는 간단한 간식과 컵라면을 팔고 오른쪽으로 샘이 하나 있다.

삿갓재대피소는 2층으로 된 최신식 건물이다..

 

삿갓재대피소에서는 동남쪽은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황점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가장 빠르며, 

북서쪽 무주군 안성면 명천리의 물좋은 원통골 계곡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지형도와 구간별 거리남덕유산4.3km/월성재2.9km/동업령6.2km/ 향적봉10.5km/황점매표소4.2km」안내판이 있다..

 

삿갓골재대피소 1층에는 보일러실과 취사장이 있고, 2층에 숙소가 있다.

등산객들은 1층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2층에서 숙박을 해결한다. 숙소는 2층 침상으로 되어 있으며, 총7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용료는 1박에 5000원이며, 침구류(담요) 대여료는 1장에 1000원이다. 숙소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이곳에서는 라면이나 과자류 등 인스턴트식품을 판매하며 캔이나 음료수, 건전지, 휴지 등 꼭 필요한 물건만을 판매한다.

사고를 우려해 술은 일체 팔지 않는다고 한다. 

밤에는 심야전기를 이용해 난방을 하기 때문에 아주 따뜻한 편이다.

그리고 건물 외부에도 탁자가 마련되어 있어 대피소에 예약을 하지 않은 등산객들도 취사를 하거나 쉴 수 있다.

탁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화장실도 있어 이용이 가능하다..

 

삿갓골재대피소에서 5분여를 보내고 완만한 능선길을 오르면 조그만 헬기장이 있는 1,276봉에 오른다..

 

15:05,  무룡산(1,491.9m)

완만한 등로를 따라가다 1,270m안부에서 나무계단길로 고도를 높여 계속 오르면 계단길이 끝나는 1,425m 능선분기봉으로

대간마루금은 좌측으로 꺾어지며 완만하게 이어지다가 헬기장에서 고무판이 깔린 나무계단을 따라 긴 오르막을 올라서면 공터

헬기장에 삼각점(무주27/1987재설)과 정상 표지석이 있는 무룡산에 이른다..

 

이정표「남덕유산6.4km/삿갓골재대피소2.1km/향적봉8.4km」가 있고 운무속에 희미하게 지나온 능선과 가야할

덕유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제 무룡산에서 동업령까지는 4.1km..

 

능선길을 따라 고도를 낮춰 내려가면 산죽길이 시작되고 대간길은 바위가 있는 1,428봉에서 돌탑과 이정표 「삿갓골재대피소

4.2km/무룡산2.1km/ 동업령2.0km」가 있는 1,433봉을 지난다.(15:47)

 

좌측으로 꺾어 완만하게 내려가면 해발 1380m 이정표 「남덕유산9.1km/향적봉5.7km」를 지난다.(15:54) 

1380봉에서 좌측으로 꺾어 이어진 마루금은 암릉을 사면길로 우회하고 구조표시목(01-25)을 지나 봉우리를 넘어선다.

 

16:20,  동엽령(1,320m)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안내판과 전망대(목조시설물)이 설치된 동엽령에 이른다.

덕유산 동엽령(冬葉嶺)..

덕유산 구간의 산마루는 현재 전북과 경남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

덕유산의 주능선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전북 무주, 장수이며, 동쪽에는 경남 거창, 함양이다.

적에는 산마루를 사이에 두고 백제와 신라가 갈렸다.

넓게 보면 덕유산 일대에서 백두대간을 넘나들 수 있는 고개로는 빼재(신풍령),동엽령,육십령 등을 꼽을 수 있다.

빼재와 육십령이라는 이름은 덕유산이 깊고도 험한 탓에 산적과 짐승이 많았다는 점에서 비롯됐다.

냥꾼이나 도적들이 잡아먹은 짐승의 뼈가 수북이 쌓였으며(「뼈재」라는 발음이 경상도 땅에서 「빼재」가 됐다는 것이다)

산도둑이나 맹수들로부터 해를 보지 않으려면 일행이 60명이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고개를 넘어야 했다는 것이다.

빼재와 육십령은 현재 37번국도(무주~거창)와 26번국도(장수~함양)로 포장돼 있어 옛 모습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덕유산의 옛 고개 중 동엽령은 깊은 산중에 있는 덕에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겨울 잎」으로 해석되는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 일대에서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기가 어렵다.

무주와 동엽령을 마주하고 있는 거창군에서 동엽령을 「동업이재」로도 부르는 것을 보면 이런저런 짐작을 해볼 수는 있다.

동엽령에 대하여 거창군이 발간한「거창군사(居昌郡史)」는 이렇게 적고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의 토산품을 교역하기 위해 넘나들던 재이다. 재로 오르는 병곡 대하골(현재 거창군 북상면 병곡리)에는

옛날 동업이재를 넘나들던 나그네를 위해 술을 빚어 팔았다고 하는 주막터가 있다.’

「무주군지(茂朱郡誌)」에 소개돼 있는 전설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대강은 이렇다.

옛적 한 도사가 있었는데 신선이 되길 갈망하는 이였다. 천제(天帝)에게 기도하며 7년간 수도한 끝에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

우화등선(羽化登仙)하기 위해 덕유산정상 향적봉에 오르는 날 새벽이었다. 어느 부잣집 앞을 지나는데 구수한 밥 냄새가 났다.

허기를 참지 못한 도사는 밥 한 술을 먹게 해 줄 것을 이 집에 청했다. 측은히 여긴 며느리가 도사의 청을 시아버지에게 전했다.

노랭이로 유명한 시아버지는 “아침에 남에게 밥을 주면 재산이 축난다.”고 소리지르며 화를 내 도사를 밀쳐 그만 개울에 빠지게

했다. 화를 이기지 못한 도사는 며느리를 집 밖으로 불러낸 뒤 도술로 큰물을 일으켜 집을 통째 떠내려 보냈다.

그때 이곳에 폭포와 소가 생겨났다. 경거망동한 도사는 천제에게 혼이 난 뒤 다시 7년을 수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천제의 허락을 받아 향적봉에 올라 신선이 됐다는 것이다.

동업령은 덕유평전과 무룡산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남덕유산10.5km/삿갓재6.2km/향적봉4.3km/송계삼거리2.2km/안성매표소4.5km」)

 

새로이 설치한 계단을 내려서 계곡 옆을 한없이 내려간다.

동엽령에서 칠연계곡으로 내려가는 산길은 지게꾼 한명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비좁고 가파르다.

그러니 귀한 물자를 실어 나르는 대상(隊商)이 다닐 만한 길은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보따리장수 정도가 동엽령을 밟았을 것이다.

반갑게도 동엽령 오르는 길은 해발 1000m대에 이를 때까지 맑은 물이 쉼없이 산길 옆으로 흐른다.

보따리 장수들은 이 물로 빈속을 채웠을 게고 민가를 지날 때면 밥 한 끼를 구걸했을지 모른다.

더러는 면박을 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산중에서 보따리장수끼리 마주치면 ‘동업(同業)’을 만났다며 반가워했을 것 같다.

그런데 전설속의 그 며느리는 그 뒤 어찌 살았을까? 머리 깎고 중이 되었을려나?

혹 동엽령 너머 거창 쪽으로 넘어와 주막을 열고서 나그네에게 인심을 팔며 살지는 않았을까?

 

대간의 길은 끝이 나고 이제 안성매표소까지 내리막. 전설의 끝을 더듬으며 칠연계곡을 향하여 내려선다.    

 

17:28,  칠연폭포

계곡위의 목교량을 건너 직진하면 안성매표소로 가지만 왼쪽에 칠연폭포로 오르는 길이 있다.

후미가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므로 폭포를 갔다 오기로 하고 공터의 들머리에 들어 계곡을 따라 500m 정도 오르니

칠연폭포다.

 

칠연폭포(七淵瀑布)..

울창한 수림사이를 비단결 같은 암사면을 타고 쏟아지는 물줄기에 패인 일곱개의 못이 한줄로 늘어서서 칠연(七淵)을 만들었고

옥같이 맑은 물이 일곱개의 못에 담겨 잠시 맴돌다가 미끄러지기도 하고 쏟아지기도 하면서 일곱폭의 아름다운 폭포로 만든다.

 

칠연폭포에서 땀을 씻고 땀과 흙에 젖은 옷을 정리하며 잠시 머물다가 내려선다.

 

내려서는 길가의 폭포수 소리가 요란한 문덕소를 지난다.

 

비온 뒤라서인지 풍부한 수량에 폭포가 아름답다.

 

17:55,  안성탐방안내소

도로를 따라 내려서면 시인마을이 있는 안성탐방안내소에 이른다.

5시55분에 안성탐방안내소에 도착했지만 후미는 8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덕유산의 역사와 지리>

그 이름조차도 덕스럽고 넉넉한 산 덕유산(德裕山)은 우리 겨레의 산 중에서도 언제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아련한

고향과도 같은 산이다. 세상살이를 모두 겪고 소소한 마음으로 돌아온 이는 누구든 맑은 개울가 햇살 드는 양지녘의 따뜻한

산자락에 에워싸여 둥지를 틀고 싶은 그러한 곳이다.

옛 선현들은 ‘덕이 만물을 기르고 윤택하게 한다.(德潤身)’고 하였는데, 덕이란 바로 산의 속성(體)을 일컬은 말인 것 같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도 ‘산은 베푼다. 기를 베풀고 퍼지게 할 수 있어 만물을 살린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덕유산이란

이름은 산의 본성을 오롯이 담고 있는 산이름이 아니고 무엇인가?

덕유산의 지명 유래에 관하여 전하는 말로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이 전화를 피해 이곳에 들어왔는데, 신기하게도 왜병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짙은 안개가 드리어 산속에 숨었던 사람들을 보지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는 전설이 있으니 얼마나 덕유산을

겨레를 살리는 신령스런 산으로 존숭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연유로 덕유산에는 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은거하였고,

덕유산 지역은 전란이 미치지 않는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꼽히고 있었다.

덕유산은 백두대간의 산줄기 계통에서 위로는 삼도봉과 아래로는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과 연결해주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남한에서는 한라, 지리, 설악에 이어서 네 번째로 높은 해발 1,614m의 향적봉을 주봉으로 삼고 있다.

일찍이 미수 허목 (許穆 1595-1682)은 덕유산기(德裕山記)에 적기를 ‘남쪽 지방의 명산은 절정을 이루는데 덕유산이 가장

기이하다(南方名山絶頂, 德裕最奇)’고 찬탄하기도 하였다.

덕유산은 무풍의 삼봉산에서 시작하여 수령봉, 대봉, 지봉, 거봉, 덕유평전, 중봉을 넘어 향적봉에 올랐다가 다시 중봉, 덕유

평전을 거쳐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달리는 100리의 큰 줄기를 형성하였다.

수계(水系)로 보면 덕유산은 낙동강 지류가 되는 황강과 남강의 발원지가 될 뿐만 아니라 금강의 상류를 이루는 하천이 발원함

으로써 낙동강 수계와 금강 수계의 분수령을 이룬다.

오늘날 덕유산은 그 산세와 위치로 흔히 북덕유와 남덕유로 구분되기도 한다.

북덕유는 이름처럼 넉넉하고 웅장한 육산(肉山)이고, 남덕유는 장쾌하고 힘찬 골산(骨山)이다.

대동여지도에 의해 역사지리적인 사실을 고증하여 보면, 원래 덕유산은 현재 무주의 북덕유를 일컫는 것이었고,

남덕유산에 해당하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봉황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도 조선후기의 덕유산을 알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기에 인용하여 본다.

덕유산은 무주에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황봉, 불영봉, 향적봉이라 일컫는데, 향적봉이 더욱 높다.

산으로 들어가서 계곡을 건너는 것이 세 개인데 향적암이 있고, 남쪽에는 석정징벽이 있으며, 서쪽에는 향림이 있다.

즐비하게 서 있는 봉우리의 이름으로써 이 암자의 배경을 삼았으니 곧 상봉(上峯)이다.

봉우리 정상의 바위에는 단(壇)의 모양이 있고, 또 철마(鐵馬)와 철우(鐵牛)가 있으며, 동쪽에는 지봉(池峯)이 있고,

남쪽에는 계조굴이 있으며, 북쪽에는 칠불봉이 있는데, 모두 조령의 지맥이다.

서쪽으로 가면 대봉(臺峯)이 되고, 지봉, 백암봉, 불영봉, 황봉이 되는데, 백암에서 북쪽으로 돌면 향적봉이 된다.

그 서북쪽 산록의 골짜기가 매우 기이하다.’

유산은 한반도에서 삼도(충청,전라,경상)의 중점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적 경계를 결정짓는 유역권의 분수령을 이룬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덕유산은 충청, 전라, 경상 3도가 마주친 곳에 있다.」고 주목되고 있다.

덕유산의 권역은 전북 무주군 및 장수군과 경남 거창군 및 함양군, 그리고 충북 영동군 등 3개도 5개 군에 걸쳐 있으니

이러한 덕유산이 차지하고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신라, 가야, 그리고 백제의 접경지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역사경관이 덕유산 북쪽의 백제와 신라의 관문인 나제통문(羅濟通門)이다.

두대간의 덕유산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덕유 남사면 지맥의 자락에 해당하는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도 발견된 바 있으니,

아무리 늦어도 청동기에는 집단적인 주거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와 가야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여러 불교사찰이 덕유산에 입지하기 시작하는데, 북상면의 송계사, 영각사 등이

이미 통일신라기에 건립된 사찰이고, 이러한 불교유적은 북상면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갈계리 삼층석탑 등에서 현존한다.

덕유산 자락에 취락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특히, 덕유산은 유학자들의 은거지요, 은사(隱士)의 산으로 자리매김 될 만하다.

유환, 임훈, 정온, 신권, 송준길, 임수준, 임여남, 조상식, 신재서 등 수많은 선비들이 덕유산에서 은거하며 덕을 수양하였는데,

그들은 예기(禮記)에 ‘군자는 숨어 닦고 쉬며 노닌다(君子 藏焉,修焉,息焉,遊焉)’는 뜻을 덕유산에서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유환은 고려조가 망하자 덕유산 남쪽의 거창군 장기리 창마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으며,

그밖에도 조선시대에 은거한 덕유산의 선비로서 정온과 신권, 송준길 등이 있다.

유산의 은자 정온선생은 안음현에서 태어나서 과거에 급제한 후 경상도 관찰사와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68살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하다가 화의로 결정되자 할복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2월에 가마에 실려 내려와서도 집에 들지 않고 덕유산 모리에 숨어서 은거하다가 73세로

별세하였다. 선생이 은거하였던 곳은 현재 북상면 농산리에 모리재라는 장소로 중수되었다.

인근의 위천면 강천리에는 선생의 종택이 있으며, 거기에는 선생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짓고 후손들이 살고 있다.

신권 선생은 중종 때의 학자로서 학문에 부지런하여 성리학에 밝았고, 산천에 은거하면서 안빈낙도하며 수신(修身)하였다.

1540년에 구연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현지에는 그의 사후에 세워진 구연서원과 그 문루인 관수루(觀水樓)가 있다.

관수(觀水)라는 뜻은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연유한 것으로, ‘흐르는 물의 성질은 웅덩이가 차지 않으면 흘러가지 않는다.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고 하여 학문을 수양함에 있어서의 올바른 지표와 자세를 가리킨 것이다.

관수루 곁의 계곡에는 수승대로 잘 알려진 거북 모양의 거북바위 혹은 구연대가 있어 아름다운 계곡미와 수석미를 드러낸다.

이곳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성천, 산수천, 분계천과 갈천이 합류하여 위천으로 모여서 빚은 덕유산 계곡의 절경 중의 하나다.

신권 선생은 이곳의 아름다운 산천미와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정자가 산수 간에 있으니(亭於山水間) / 물을 사랑하고 산을 잃은 것은 아니네(愛水非遺山).

물은 산의 가에서 흘러나오고(水自山邊出) / 산은 물을 따라 둘러 있는데(山從水上還)

신령한 구역이 여기에서 열리니(靈區由是闢) / 즐거운 뜻이 더불어 관련된다네(樂意與相關)

그러나 인(仁)과 지(智)의 일을 생각하면(然爲仁智事) / 모든 것이 오히려 부끄럽네(擧一猶唯顔)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은 율곡과 사계의 문인으로 학문에 뛰어나서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병자호란 뒤에 북상면의 월성에 와서

초당을 짓고 거처하였으며, 후인들이 성천서원을 세워서 중수하였다.

그가 은거한 곳은 사선대(四仙臺)로, 이곳은 네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송기(宋基) 혹은 송대(宋臺)라

고도 불렸다. 이곳은 덕유산에 있는 신비스럽고 빼어난 신선경의 한 곳이다.

유산은 유학자들에게는 은거의 산이었지만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병화와 전란을 피하는 피난보신지이며, 또한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는 혁명의 산실이기도 했다.

민중사에서 덕유산은 정감록 십승지의 하나이기도 하였고, 농민항쟁이나 동학혁명, 그리고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것이다.

십승지(十勝地)란 정감록에 소개된 열곳 가량의 피난 보신의 땅으로서, 남격암산수십승 보길지지에 의하면,

‘무주 무풍 북쪽 동굴 옆의 음지이니 덕유산은 난리를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고 하였으며,

피장처에는 ‘전라도 무주 덕유산 남쪽에 원학동(猿鶴洞)이 있는데 숨어 살만한 곳이다.’라고 적고 있다.

무풍은 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으로 현존하고, 원학동은 현재 북상면 월성계곡, 혹은 거창읍 학리라는 설이 있다.

월성계곡은 덕유산에서 산수미가 빼어난 곳의 하나이며, 학동에는 400년 전에 청주 한씨가 세운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입지로 알려져 있다.

덕유산의 민중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농민항쟁과 항일독립운동이다.

농민항쟁으로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71년11월 금산의 이광성(李光星) 등이 덕유산에 진을 치고 웅거하였다고 한다.

덕유산지역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 중의 하나는 1906년부터 북상면 월성에서 시작한 것으로 북상면 출신 40여명이 월성서당

에 모여서 항일 의거를 결의하고 산중에 막사를 마련하고 활동하여 전과를 올렸다.

특히, 박화기 형제들은 덕유산의 의병 200명에게 자금과 군수물자를 조달하였다.

또한, 1908년7월11일 일본 헌병대의 보고서 내용에도 덕유산에 약 40명의 독립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이렇듯 덕유산은 겨레의 산의 역사에서 그 이름처럼 넉넉한 덕스러움으로 은자들과 민중들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 주인 되는

푸른 정신을 일깨운 산이었다.